나는『숭선전지』의 기사를 참고하여 마한과 가야가 지배층끼리의 혼인으로 동맹을 맺은관계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물론 마한 왕은 가야 사람들에게 살 땅을 나눠주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마한 왕실은 원 가야인에게만 이랬던 것은 아니다.『숭선전지』를 보면 "신라"도 "삼한의 왕통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구절에 나오는 "신라"는 서나벌(박씨족)이 아닌 용성국(석씨족)이라고 보는데, 그 까닭은 박씨족은 서기전 69년에야 마한 땅으로 들어오지만, 석씨족은 - '용성'이라는 땅 이름이 지금의 요서지방(기 나라가 있던 곳)에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기자족(한씨족)과 함께 행동했고, 마한이 망한 뒤에도 백제를 따르지 않고 동남쪽인 경상도로 달아나기 때문이다(『삼국유사』「기이」탈해왕 조/『수서』「신라전」).


(사족이지만 서나벌이 마한 왕자의 망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청주 한씨 족보』], 마한의 옛 장수인 맹소의 항복을 받아들인 까닭[『삼국사기』]도 원 가야인이나 용성국 사람들과는 달리 마한의 유민과 땅을 요구할 '명분'이 약했기 때문일 것이다)


석씨족은 원 가야인처럼 마한 왕실과 오랫동안 통혼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 가설이 옳을 경우 그들이 백제의 편을 들지 않고 달아난 까닭을 합리적으로 풀이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용성국은 옛 종주국이자 '종가'였던 마한의 몰락을 직접 목격했고, 그 때문에 백제를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삼한백제가 서기 1세기에 전라도를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까닭도 박씨족 ․ 석씨족 ․ 원 가야인이 마한 유민과 손잡고 삼한백제를 공격했기 때문일 것이다. 삼한백제는 이들을 경상도로 내쫓은 뒤 '피로 맺은 주종관계'가 여러모로 쓸 만한 제도라고 생각했을 테고, 따라서 마한의 '혼인 동맹'을 참고하여 담로제도를 만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