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原) 가야인과 마한의 주종관계에 대한 고찰


나는「▩『숭선전지』에 나오는 원(原) 가야인과 백제의 전쟁」이라는 글에서 원 가야인의 군주인 이비가(뇌실청예[수로왕]와 뇌실주일의 아버지)가 백제에 반기를 든 해가 서기 16년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럼 원(原) 가야는 무엇 때문에 삼한백제를 반대하고 마한의 편을 들었을까? 그 의문을 풀려면 가야와 마한이 뗄 수 없는 관계였거나, 아니면 가야가 마한의 편을 듦으로써 얻는 것이 있었다고 추측해야 한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 추측을 뒷받침하는 사료가 남아 있다. 그 사료를 읽어보자.


『숭선전지』서문에는 "삼한(三韓)"이 "5가야(五伽倻)의 종주국"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러니까 흔히 '삼한'으로 불리웠던 '한韓'이 가야를 제후국으로 두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한'은 삼한백제가 아니라 마한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숭선전지』에는 5가야가 "삼한"의 신하였던 기간이 491년이라고 적혀있기 때문이다. 일도안사(김상) 님의 학설에 따르면 가야가 삼한백제의 지배를 받은 기간은 기껏해야 270년이지, 491년은 아니다(『삼한사의 재조명』참고).


게다가『숭선전지』는 원 가야가 "후한 건무(建武 : 광무제 유수. 재위기간은 서기 25년 ~ 서기 56년) 당시 신라와 더불어 삼한의 왕통에서 시작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건무라는 연호가 쓰이고 있던 서기 42년이면 가야는 아직 삼한백제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있던 때이니, 이 구절에 나오는 "삼한"은 삼한백제가 아니라 마한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마한이 존재했던 기간(203년)보다 가야가 '삼한'의 신하로 지냈다는 기간이 188년이나 더 길다는 문제가 생긴다. 마한이 생기기 전에 마한의 신하였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 문제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면『숭선전지』에 나오는 "삼한"이 마한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마한 이전에 세워진 기(箕)나라 - '기자조선' - (이 게시판의 글인「기자가 세운 나라의 이름은 「기자조선(箕子朝鮮)」이 아니다」를 참고할 것. 글의 카테고리는 '고조선'이다)도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옛 기록에 따르면 기자인 자 서여는 중국의 하북성에서 기 나라를 세웠고, 기 나라는 전국시대에는 요령성으로 밀려났으며, 그의 후손인 '기준'은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평안도로 달아났기 때문이다. 이 때 기준왕은 성을 '기'에서 한韓으로 바꾸고 나라 이름을 '기'나 '조선'이 아닌 '마한'으로 유지한다. 바로 이 때문에 '삼한의 신하였다'라는 대목은 원 가야가 남쪽으로 내려오기 전, 그러니까 기자의 후손이 평안도로 달아나기 전부터 가야인이 기자족의 신하였던 사실을 나타낸 글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 가설을 사실로 받아들일 경우, 원 가야인의 군주가 기자족(한씨족)의 신하가 된 해는


491년(가야가 마한의 제후국이었던 기간) - 9년(서기 9년. 마한이 망한 해) = 482년


그러니까 서기전 482년이 된다.


서기전 482년(서기전 5세기)은 기자족이 아직 요령성(요서?)에 있을 때였고, 고조선(단군조선)의 땅에 기 나라가 세워진 지 6세기가 지난 뒤였다.『위략』에는 "조선" - 기 나라 - 의 군주가 전국시대인 서기전 3세기에 스스로 왕王이라 일컫고 연나라와 싸운 사실이 적혀 있다. 다시 말해 기 나라 - "조선" - 는 서기전 3세기 이전에 왕 - 천자 - 이라 일컫고 이웃나라에 시비를 걸 만한 자신이 있는 힘을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다.『숭선전지』의 기사는『위략』의 기사를 통해 그 정확성을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기 나라는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강해져, 원 가야인 같은 작은 나라의 군주들을 신하로 삼을 수 있게 된 듯하다.


그러나 이 관계를 단순한 주종관계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볼 경우 원 가야인의 군주가 백제를 헐뜯으면서 군사를 일으킨 까닭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숭선전지』의 기록 - 그러니까 가야의 왕통이 "신라와 더불어 삼한(三韓)의 왕통에서 시작되었다"는 구절 - 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구절에 의하면 가야와 신라와 마한은 '한 집안'이다. 그것도 신라와는 '왕통'이 같다. 그러나 다른 기록(예컨대『삼국유사』와『가락국기』,『석리정전』,『청주 한씨 족보』)에 따르면, 이들의 기원과 계통은 서로 다르다. 이 모순을 설명하려면
원 가야인의 군주와 마한 왕실이 서로 통혼하는 관계였기 때문에 두 '나라'의 '왕통'이 '하나', 즉 '한 가족'으로 여겨지는 관계였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들은 '종주국'이자 '종가(宗家)'인 마한 왕실이 망한 뒤 완전히 독립했고, 이 때문에『숭선전지』가 참고한 옛 기록을 남긴 사람은 가야가 "삼한의 왕통에서 시작되었다(독립했다)."고 한 것이 아닐까?


만약
이런 관계가 491년 동안 계속되었다면, 원 가야인인 아버지와 마한 왕족인 어머니(내가 이렇게 가정한 까닭은『청주 한씨 족보』에 마한 왕이나 왕족이 가야인 여성과 혼인했다는 기록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이에서 태어난 원 가야인의 군주들은 당연히 마한 왕실을 '피로 맺어진 운명 공동체'로 여겼을 테고, 따라서 마한이 백제에게 망했을 때 분노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추측하는 이비가가 백제에 맞서 들고 일어난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