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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
▩『숭선전지』에 나오는 원(原) 가야인과 백제의 전쟁
// Document: http://www.histopia.net/zbxe/17470 2008.04.30 17:17:45 (*.143.129.220) 가야사0 Comments 674 Views
- 원(原) 가야인이 남쪽으로 내려온 까닭에 대한 고찰
4년 전(서기 2005년), 일도안사(김상) 님은 "1세기 가야의 건국은 마한의 멸망이 가져온 현상일 것"이라고 주장하셨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마한이 쓰러지자 그 힘의 공백이 한반도 남부의 낙동강유역에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불러일으킨 것"이라고 주장하신 것이다(가야의 이동은 일찍이 천관우와 김성호가 주장한 학설이기도 하다).
나는 원(原) 가야인이 원래는 경상도 바깥에서 살고 있다가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웠다고 생각하므로(원 가야인의 이동설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이 게시판의 글인「▩수릉왕묘의 위치와 가지산」,「▩원 가야인이 내려온 길 - 경상도 편 (1) ․ (2)」,「▩원(原) 불가리아 족과 원(原) 가야인」을 읽어보기 바람. 카테고리는 모두 '가야사'다), 일도안사 님의 주장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이를 직접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물적인 증거(예컨대 기록이나 유물)가 나오지 않아, 이 주장은 말 그대로 '가설'이자 '추측'일 뿐이었다.
그런데 약 한 달 전(서기 2008년 3월 23일), 잠실에 있는 롯데월드 민속 박물관의 서적 판매대에서 읽은 책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떤 '해답'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책은 가야가 마한을 위해 백제에 맞서는 군사를 일으켰다고 설명하기 때문이었다. 책의 원문을 소개한다 :
백제가 마한을 멸망시킴에 수로왕은 백제를 견제하게 된 것을『숭선전지』에 이렇게 기록했다. "백제가 기씨(기자의 후손 기준왕이 세운 마한)를 모질게 멸망시키매 수로왕은 곧 죄를 묻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이에 신령스러운 덕이 대양에 넘쳐 멀리 퍼지니 변한의 옛 땅과 마한의 54국이 모두 손 안에 들어오고, 삼남의 여러 소국이 다들 와서 조공을 바치면서 왕을 높여 태왕원군이라 하였다."
-『일본을 낳은 나라 금관가야 왕국』(최종철 엮음, '미래문화사' 펴냄, 서기 2006년)에서
보시다시피 마한 왕실이 백제에 멸망하자, '가야의 수로왕'이 군사를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변한과 마한이 '가야'의 편을 들고 있다. 이를 어떻게 풀이해야 할까? 물론 이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수로왕은 서기 28년에 태어났고(「▩9간의 나이와 수로왕의 나이」참고. 글의 카테고리는 '가야사'임) 마한은 그보다 20년 전인 서기 9년에 망했기 때문이다(『삼국사기』「백제본기」시조 온조왕 조). 따라서『숭선전지(崇善殿誌)』에 나오는 '수로왕'은 실제로는 수로왕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일 가능성이 높다. 후세 사람들이 가야의 이동을 감추고 수로왕을 신격화하기 위해 그의 선대(先代)가 한 일도 수로왕이 한 것처럼 쓴 것이다.
그렇다면『숭선전지』에 나오는 가야의 임금은 수로왕의 아버지일까, 아니면 할아버지일까? 이 문제에 대해 대답하기 전에, 먼저 원 가야인이 들고 일어난 해가 구체적으로 서기 몇 년인지를 알아보자.
『삼국사기』를 보면, 이상한 기사가 나온다. 마한의 옛 장수인 '주근(周勤)'이 백제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겨울 10월에 마한의 옛 장수 주근이 우곡성牛谷城에 웅거하여 배반하므로, 왕은 친히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그를 치니 주근이 스스로 목매어 죽으므로 그 시체의 허리를 베고 그의 처자들도 베어 죽였다."
―『삼국사기』「백제본기」시조 온조왕 34년(서기 16년) 조
마한이 망한 지 7년 만에 마한의 장군이 갑자기 들고 일어나고 있다. 마한이 망하던 해에 들고 일어난 게 아니다. 백제의 사관(史官)이 주근의 행동을 '배반'이라고 평가한 점으로 미루어볼 때, 주근은 서기 9년에는 백제에 항복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 주근은 왜 들고 일어났을까? 자기 혼자서 들고 일어나면 백제와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랬을까? 여기서 우리는 원 가야인이 백제에 반기를 들자 마한 유민들과 변한이 가야를 지지했다는『숭선전지』의 구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약 원 가야인이 마한이 망하자마자 들고 일어난 게 아니라, 서기 16년에 들고 일어났다면, 마한의 유민들이 가야군이 도와줄 것이라고 믿고 백제에 반기를 들었다고 풀이할 수 있는 것이다. 항복한 장군이 '배반'할 정도였다면 반(反) 백제 연합군의 힘이 보통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제 서기 16년에 원 가야인 - 마한 유민 연합군이 들고 일어났다고 가정하고 나이를 계산해 보자. 뇌실청예(수로왕)는 서기 28년에 가야산에서 태어났으므로(『석리정전(釋利貞傳)』), 그의 아버지인 '이비가'는 그 때 20대 후반 정도는 되어야 한다. 편의상 그가 서기 28년에 27세였다고 치자. 그런데 그 가설을 받아들일 경우, 서기 9년에는 이비가가 8세여서 군사를 이끌 수가 없다. 그러나 서기 16년이라면 다르다. 8 + 7 = 15 이므로 15세에 군사를 이끌었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은 것이다. 그의 아들인 뇌실청예도 9간과 싸울 때 10대 중반이었다(「▩9간의 나이와 수로왕의 나이」참조). 그리고 조선시대에도 남자나 여자가 16세가 되면 '어른'으로 인정하고 그에 따르는 권리와 의무를 주었다. 이에 나는『숭선전지』에 나오는 원 가야인의 군주를 이비가로 보고 이야기를 계속하고자 한다.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자.『숭선전지』에 따르면, 원 가야인의 군주인 이비가는 마한을 위해 백제에 반기를 들었다. 그런데『숭선전지』는 그 다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만약 이겼다면 그 사실을 강조해야 할 텐데, 그러지 않는 것이다. 이는 원 가야인과 마한 유민, 변한의 연합군이 전쟁에서 지고 남쪽으로 쫓겨났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경상북도에 있는 '가야/가라'라는 땅 이름과, 이비가가 충청북도가 아닌 경상도 가야산에서 정견모주와 만나 혼인했다는『석리장전』의 구절은 그 가설을 뒷받침한다.
그러니까『숭선전지』의 기사는 원 가야인이 남쪽(경상도)으로 내려온 '원인'을 설명하고 있고, 최치원이 인용한『석리장전』의 이야기 ('이비가'가 '정견모주'와 혼인해서 '뇌실청예' - 수로왕 - 와 '뇌실주일'을 두었다는 이야기) 는 그들이 임시로 고령에 정착한 과정을, 그리고 『가락국기』의 기사와 고령의 전설(정견모주가 낳은 두 알 가운데 하나는 김해까지 굴러가서 수로왕이 되었고, 다른 하나는 고령에 남아서 대가야의 시조가 되었다는 전설)은 그들이 김해로 내려와 나라를 다시 세우고 정착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는 이야기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마한은 서기 9년에 "드디어 멸망(『삼국사기』)"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한 왕실이 백제에 항복한 해가 서기 9년이다.
이 때 원 가야인의 군주(이비가 왕의 아버지)는 백제에 반감을 품었고, 그의 아들에게도 백제가 한 짓을 잊지 말라고 가르쳤을 것이다. 그 때 여덟 살이었던 이비가는 15세에 왕위를 물려받았고(아마 서기 16년에 이비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게 아닌가 한다. 불행하게도, 나는 그의 이름을 모른다. 앞으로 새로운 기록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백제에 반기를 들었다.
가야군은 한 때는 마한의 유민들과 변한 사람들까지 합세해서 삼한백제를 뒤흔들 정도로 세력이 커졌지만, 곧 반격에 나선 백제에게 패해 충청북도의 남쪽인 전라도와 경상도로 뿔뿔이 흩어졌다(전라도에 가야라는 땅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비가 왕은 나머지 원 가야인을 이끌고 가야산으로 들어와 선주민들의 지도자인 정견모주와 혼인했고, 그를 통해 가야산 선주민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뒤 다시 힘을 키운다. 그러나 그는 삼한백제군의 끈질긴 추적에 시달리며 이리저리 옮겨다녀야 했다. 그는 죽을 때(서기 42년으로 추정함) 권력을 맏아들인 뇌실청예와 그의 동생인 뇌실주일에게 물려줬고(훈족도 서기 434년 그들의 왕인 '루아Ruga'가 죽었을 때, 그의 두 조카인 '아틸라'와 '블레다'에게 정권을 맡겼다. 두 사람은 잠시나마 훈족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물론 원래 왕은 블레다였고, 아틸라는 블레다가 죽을 때까지 "막강한 제후"이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블레다의 지휘를 받는 이인자에 지나지 않았다." 어쩌면 뇌실청예와 뇌실주일의 관계도 - 그리고 뇌실청예와『가락국기』에 나오는 그의 형제들과의 관계도 - 이와 똑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원 가야인은 그 두 사람의 지도 아래 김해로 쳐들어가 9간이 이끄는 진한 유민들을 굴복시킨 뒤(사실은 타협했음. 진한 유민과 원 가야인의 타협에 대해 알고 싶으신 분은 이 게시판의 글인「▩구지가(龜旨歌)속에 숨어있는 9간과 수로왕의 전투」- 카테고리는 '가야사' - 를 읽어보시기 바람), 그곳에 뿌리내린다.
『숭선전지』는『석리정전』과 더불어 원 가야인의 이동을 증언하는 아주 중요한 기록으로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참고 자료
―『삼국사기』
―『훈 족의 왕 아틸라』(패트릭 하워스 지음, 김 훈 옮김, '가람기획' 펴냄, 서기 2002년)
―『일본을 낳은 나라 금관가야 왕국』(최종철 엮음, '미래문화사' 펴냄, 서기 2006년)
*『숭선전지(崇善殿誌)』:
대한제국 시절인 서기 1903년 '허식'이 "널리 고적(古籍)을 찾아보고", "(조선) 조정의 (가야 - 옮긴이) 관련 문서를 공경히 베껴 써서" 그것들을 바탕으로 정리한 김해 김씨 집안의 역사서.『가락국기』나『삼국사기』․『삼국유사』도 참고했으나, 그 책들이 싣지 않은 사실도 다루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