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좀 이상한 부분이 있군요.

> 백제왕기의 재위기간
> 구지왕: 128-166 또는 208-226(39년), 초고왕: 166-194 또는 226-254(29년), 구수왕: 254-264(11년), 고이왕: 264-286(23년) 

구지왕의 재위가 39년이면, 188-226년이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공손씨 기록과 연대가 모두 맞습니다.
또한 박창화의 신라사 관련 기록과도 연대가 맞습니다.

다시 재검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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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박창화의 백제왕기 중 구지왕조를 128-166년이 아니라 60년을 내려 188-226년이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이 올라왔습니다. (제가 208년이라고 쓴 것은 188년의 오타입니다) 박창화의 초고왕조 역시 166년에서 60년을 내려 226년에 시작하게 됩니다. 연쇄적으로 다음 구수왕도 그렇고...

공손씨 기록은 중국사서만 보면 누구나 연대를 간단히 맞출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고학은 그것이 아닙니다. 박창화는 고고학은 잘 몰랐을 것입니다. 만일 구지왕-초고왕 조가 삼국사기처럼 128년에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공손씨 기록에 맞추어 188년에 시작하게 되면 삼국사기에서는 정확함에도 불구하고 백제왕기는 고고학적으로 문제가 생깁니다. 3가지만 지적하겠습니다.  

<문제 1> 한강유역 적석총 문제
 
3세기 초가 되면 한강유역에 고구려식 적석총이 대거 출현합니다. 당시 요동지역에 수만기가 축조되었는데 한반도에 나타나는 곳은 한강유역이 유일합니다. 삼국사기는 말갈기사를 통하여 공손씨 정권의 등장과 대방군의 성립 및 한강유역의 주도세력의 변동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백제왕기는 구지왕때 백제-신라는 혼인을 통한 평화기로 3세기 초에 한강유역에서 전쟁은 없어서 고고학과 모순입니다.

<문제 2> 풍납토성 문제
풍납토성은 백제 건국 전인 BC 1-2세기 경에 축조되기 시작하여 3세기 초에 죽조가 중단됩니다(끝납니다). 이 결과는 박창화 사후에 발굴을 통하여 알려진 것이라서 박창화는 몰랐습니다. 삼국사기 기년을 따르면 풍납토성이 누구에 의해 어떤 과정을 통하여 축조되고, 또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 축조가 중단되었는가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나 구지왕조는 전혀 설명을 못합니다. 풍납토성이 축조될 이유도 없고 축조가 중단된 이유도 없습니다.

<문제 3> 칠지도 문제
삼국사기를 보면 칠지도의 등장은 4단계를 거칩니다. 일본서기와도 일치합니다.

1단계: 209년(내해 14년) 변진한군을 동원한 가야공격과 신라의 간섭으로 인한 실패
2단계: 224년(내해 27년) 백제군의 대패로 인한 한강유역 마한군의 군사력 상실
3단계: 227년(내해 32년) 왜군동원 및 금강유역 마한군을 동원한 가야7국 정복
4단계: 230년 금강유역의 진왕이 왜왕 비미호에게 칠지도를 보냄 - 삼한체제의 성립(후한서)

그런데 남당의 기록을 보면 이를 전혀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야 7국은 멸망하고 신라는 겨우 살아난 227년에 신라군이 한강유역을 공격하여 상황에 모순입니다. 일본서기에도 물론 모순입니다. 일본서기 흠명천황조에 기록된 백제 성왕의 증언과도 모순입니다. 반면에 삼국사기 초고왕-구수왕조는 모든 사서와 고고학적 기록에 정확히 일치합니다.
 
또 3세기 전반의 한반도를 서술한 후한서와 3세기 중반의 한반도를 서술한 삼국지에도 모두 모순입니다. 후한서에 따르면 3세기 전반에 삼한체제가 완성되어야 합니다. 이는 삼국사기와 일치하나 말씀하신대로 60년을 내린 백제왕기의 기년을 따르면 엉망이 됩니다. 삼국지 동이전과도 모순입니다. 반면에 삼국사기는 연대는 기존의 모든 사료는 물론이고 아직 발굴되지 않은 사료까지 항상 정확히 맞춥니다.

제가 화랑세기를 믿는 이유는 이처럼 박창화가 천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삼국사기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개루왕과 초고왕 사이에 존재하는 공백을 2가지를 가지고 메웠습니다. 한 가지는 길선의 기록이고 다른 한 가지는 대방국과의 혼인기록입니다. 길선이 백제와 혼인하였다는 것은 어디에서 유추한 것인지 모르지만 저와 기본이 같습니다. 

개루왕을 이은 후개루왕은 자립위왕하기 위하여 신라인 세력가인 길선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길선의 신분이 너무 낮아 자립위왕이 안 되는(주변에서 인정을 못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길선을 지원하여 모반을 일으키는데 도움을 주었으나 그가 실패하고 돌아오자 자립위왕의 가능성이 사라진 후개루왕은 퇴위하고 새로운 왕인 초고왕이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왕제를 포기하고 백제의 진왕 아래의 마한왕 아래에 위치한 소국이 된 것이지요. 진왕제에 의하여 자립위왕 하지 못한 왕은 시호와 대수를 못 받고 이전이나 이후의 자립위왕한 왕(개루왕)의 재위기간에 포함되어버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후 한성백제 왕이 다시 자립위왕 하는 것은 4세기 후반에 근초고왕이 신라왕실의 여인을 왕후로 세우고 하는 것입니다.

신라사도 비슷합니다. 박창화는 신라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물왕과 실성왕이 미추왕의 사위로 설정된 것을 가지고 신라왕들의 재위기간을 조정하여 보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고고학적으로 백제왕기보다 더 많은 모순이 들어납니다. 신라에서 북방계 유물의 출현은 3세기 후반과 4세기 후반인데 이것이 미추왕의 출현 및 내물왕의 출현시기와 일치합니다. 벽골지 기사와도 모순이고 중국의 여러 사서와도 모두 모순이 됩니다. 박창화는 나름대로 삼국사기의 공백을 메꾸려고 노력하였으나 결국 고고학 앞에서 모순을 들어낸 것입니다.

*아래는 백제왕기의 구지왕-초고왕조로 참고로 붙입니다.

구지왕


위는 伯古이고 기루왕의 7번째 아들이며 개루왕의 배다른 동생이다. 너그럽고 인자하며 성덕이 있으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경모하여 仇臺王(건국자-일도안사)이 다시 온 것 같다고 하였다. 이때 개루왕의 동모 아우들이 모두 왕의 은총을 믿고 위세를 마음대로 하여 인심을 얻지 못하자 개루왕이 심히 걱정하였다.


개루왕이 죽음에 임박하여 왕후 沙씨(사씨)에게 이르기를, “내 아우들이 비록 많으나 오로지 백고만이 가장 지혜롭다. 내가 죽고 나면 아들이 모두 어리니, 만약 여러 아우들이 뜻을 얻게 되면 필시 너의 아들들에게 이롭지 않을 것이니 백고를 맞이하여 너의 남편으로 삼음만 못할 것이다” 하였다. 왕후 사씨가 깊은 밤에 몰래 백고를 궁중으로 맞아드렸다. 이날 밤 눈이 내려 10여자나 되니 왕의 아우들이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원년(188 무진) 12월, (형의 왕후였던) 사씨를 왕후로 삼고 어머니 屹씨(흘씨)를 태후로 삼다. 왕이 사저에 숨어 있을 때 관청에 있는 사람 가기의 처 苩씨(백씨)를 맞아들였는데, 백씨가 아들 苩仁과 딸 苩花를 낳자 총애가 깊어졌다. 가기의 아들을 자녀로 삼았다.


2년(189 기사) 2월,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 요동태수 공손도왕이 사신을 보내 화평을 청하였다. 왕도 동생 대지를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3년(190 경오) 3월 공손도왕이 딸 보루를 시집보내며 말하기를 “듣기로는 왕이 가정이 없다고 들었는데 그런 까닭에 감히 천한 자식을 보내오니 아내로 삼고 행여나 버리지 말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왕이 이내 백마 3쌍을 폐물로 삼고 장가들었다. 10월 왕이 요의 부산의 군대를 도와 많은 전리품을 얻고 승리하였다.


5년(192 임신) 2월 북한산(성)을 축조하여 고구려에 대비하였다. 8월 신라왕 일성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7년(194 갑술) 2월 왕후 사씨가 죽자 왕이 신라에 청혼하였다. 7월 신라왕이 근종의 딸 勿씨를 시집보내면서, “우리 물씨의 어머니는 선왕인 지마의 딸 밀화부인으로 그 아름다움이 나라에서 빼어났으며, 그 딸 역시 아름다움이 더하다” 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사신인 小光을 후대하여 보냈다.


10년(197 정축) 5월 고구려의 연우가 그 형(발기)을 내쫓고 그 형수(우씨)를 얻었다. 공손도왕이 죄를 묻고자 우리에게 군대를 출병하도록 명령하였으나 왕이 같은 조상의 나라끼리 서로 죽이는 것은 불가하다 하여 거절하자 공손도왕이 불쾌해 하였다. 10월, 勿씨가 왕자 餘勿을 낳으니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경사를 알렸다. 신라는 여물의 동복 오라비 길선을 보내 선물을 바쳤다. 왕이 私女 백화로서 길선의 처를 삼게 하였으나 백화의 나이가 11세라 아직 잠자리에 적당하지 않으므로, 그 어머니인 백씨로 대신하게 하였다. 길선이 그 모녀를 데리고 돌아가자 백씨의 지아비였던 賈杞가 마음에 병을 얻어 죽었다. 사람들이 불쌍하다 하였다.


17년(204 갑신) 9월 공손도 왕이 죽었다. 태자 공손강이 섰다. 왕이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고 위로했다.


22년(209 을축) 10월 고구려왕 연우가 환도로 도읍을 옮기면서 사람을 보내어 알리며 화친을 청하였다. 왕이 공손강 왕을 두려워하여 감히 들어내지 못하고 기다렸다가 태자 백인에게 명하여 그 사신을 은밀히 국경에서 만나고 돌려보냈다.


24년(211 신묘) 7월, 길선이 그 누이 勿씨의 나이가 30이 넘고 자녀를 많이 낳아 아름다움이 점점 퇴색해지므로, 그의 (배다른) 딸 田씨로서 첩을 삼도록 청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들이게 되었다. 田씨의 어미 彭田(팽전)이 데리고 와 龜宮에 묵으니, 왕이 그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귀궁에 몰래 들어와 전씨와 밀통했다.


田씨가 勿씨에 비해 더욱 아름다우니 왕이 매우 혹하여 길선에게는 좌평을 내리고 팽전은 국부인으로 삼아 장원과 노비를 내려 왕족의 예우를 했다. (전씨의 어미) 팽전도 역시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왕이 또한 밀통했다. 그때 사람들이 매우 애석히 여겨 이르기를, 우리 왕이 색을 밝혀 ‘알을 바꾸고 어미를 바꿨다’(易卵而換母) 하였는데, 이는 백화모녀를 전씨모녀로 바꾼 까닭이다. 田씨의 나이가 비록 15세이나 政事를 알아 나라 일에 자못 관여하였다.


25년(212 임진) 2월, 신라왕 일성이 죽었다. 왕이 苑古尸(원고시)를 보내 조문하고 부의하였다.(삼국사기는 154년 2월에 죽었다고 함-일도안사)


27년(214 갑오) 4월, 田씨가 왕자 素古(소고)를 낳았다. 왕이 그를 매우 사랑하여 태자로 세우고자 귀궁의 전속들을 중용하였다.


30년(217 정유) 3월 공손강 왕이 대방왕이라 칭했다. 그 여동생 보고를 왕에게 시집보냈다. 이때 조정에는 한인을 등용함이 자못 많았는데 요동왕에게 의지하였다. 이 때문에 보루와 보고를 중히 하였는데 아들이 없었다.


34년(A.D.221) 신축 7월 대방왕 공손강이 죽어 동생 공손공이 섰다. 이 때문에 공손강의 아들 공손황이 한왕 (헌제)에게 따져 물었다. 사신을 보내어 조문을 했다.


35년(222 임인) 2월 정비 보루부인이 죽었는데 춘추 50세였다. 왕후의 성품은 청아하고, 용모가 단정하며, 무리를 다스림에 어질고, 빈과 첩을 덕행으로 대하고, 일찍이 색을 시샘함이 없으며 항상 자식이 없음을 한탄하며 임종에 이르러 (동생) 보고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너를 위하여 좋은 자식을 구하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듣고 슬픔을 덮고 오판에서 장사를 지냈다.

 

36년(123 계묘) 2월, 길선으로 하여금 상좌평을 삼고 군사일을 맡기었다. (신라인에게 군사일을 맡긴 사연은 다음과 같다-일도안사) 길선이 그 누이와 딸을 (왕에게) 시집보내고 양국에 큰 집을 짓고 처첩을 두며 오고감이 예사롭지 않았다. 임금이 그를 의심하여 중용하지 않자, 길선은 스스로 지마왕의 자손이라 하며 왕에게 자못 서운한 마음을 가졌다. 왕이 그를 훈계하여 이르기를, “왕이란 것은 천명이지 인력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망동하지 말고 자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田씨에게 강력하게 권고함을 받아 길선에게 군사정무를 위임하자 길선이 크게 기뻐하며 신라로 돌아갔다.


38년(225 을사) 10월, 길선이 패하고 도망하여오자 신라왕이 그를 잡아 보내라하니 왕이 답하기를, “신하로서 불충함은 진실로 죄 줄만하다. 그러나 그의 딸이 이 나라에서 임금의 사랑을 받고 있으므로 그 한 목숨을 구하고자 한다” 하였다. 신라왕이 노하여 장군 大解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이롭지 못하여 돌아갔다.


39년(226 병오) 5월, 상좌평 길선이 죽으니 55세였다. 왕이 아주 슬퍼하여 태공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중략) 고시가 이에 왕을 핍박하여 깊은 궁에 가두고 소고를 세워 새로운 왕을 삼은 후 자신이 천하를 호령하였다.(이하 생략)


 

肖古王(초고왕)


휘는 소고, 구지왕의 다섯째 아들이다. 체격이 크고 멀리 아는 것이 있어 정사를 결정함에 가볍지 않았다. 고시와 전씨가 감히 두려워하여 멋대로 하지 못했다.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칭찬하였다.

 

1년(226 병오) 7월 어머니 전씨를 태후로 하였다.


2년(227 정미) 8월 신라의 조비천성을 깨뜨리고 1천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신라(왕: 아달라이사금)가 또 병사를 이끌고 우리 땅 한수를 핍박하였는데 우리가 빼앗은 신라의 땅을 돌려달라고 하였다.


3년(228 무신) 5월 대방왕 공손공이 옛 왕자 공손연에게 양위를 하였다. 사신을 보내어 경사를 알렸다. 왕이 구궁으로 행차하여 보과부인에게 잔치를 열었다. 보과가 슬픈 노래를 불렀는데 왕이 가엽게 여기어 구궁에서 머무르며 보과와 정을 통하였다. 스스로 이것은 묶여진 행운이다.


4년(229 기유) 4월 보고가 왕의 딸 구씨를 낳았다. 왕이 좌평 사시의 딸을 거두어 이에 태후 전씨를 용서하였다. 사씨는 태후의 아랫사람이다. 전씨가 왕이 보고를 사랑함을 투기하여 스스로 사씨를 중매를 서서 이로써 왕을 자기에게로 끌어들였다.


5년(230 경술) 8월 사씨가 왕의 아들 구수를 낳았다. 9월 사시를 상좌평으로 삼아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맡기고, 오후를 우좌평으로 삼아 군사에 관한 일을 맡기고, 부윤을 좌좌평으로 삼아 비밀스러운 일을 맡겼다. 태공 고시를 소웅도로 유배 보내고 태후는 팽선의 집에 있게 하였다. 10월 장수를 보내어 신라의 국경지역의 마을을 침략하여 관청의 창고를 약탈하였다. 12월 향기가 있는 옷을 입은 관청의 사람 진가가 왕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영명한 모습으로, 일찍이 고시의 간음함을 깨뜨리고 이로써 부왕의 수치스러움을 씻었는데 옳음이 있습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어머니를 원수로 대한 왕은 없습니다. 저번에 만약 태후가 아니었다면 폐하가 없습니다. 이에 왕이 얻은 게 무엇입니까. 모든 날 만약 곁에 없다면 곧 태후가 아니면 누가 있어 함께 하겠습니까?” 왕이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곧 눈이 오는 밤임에도 무릅쓰고 팽선가로 행차하여 태후와 함께 돌아왔다.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