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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
백제 초고왕과 속고왕
// Document: http://www.histopia.net/zbxe/16908 2008.04.17 21:58:05 (*.147.81.212) 백제사0 Comments 640 Views
우리가 역사책을 쓸 때 맨 먼저 하는 일 중의 하나가 용어의 통일이다. 예를 들어 고구려 건국자를 추모왕이라고 쓸 것인지 주몽왕이라고 쓸 것인지를 먼저 결정하고 일관성 있게 써야 혼돈이 발생하지 않는다. 만일 같은 책에서 앞에서는 추모왕이라 했다가 뒤에서는 주몽왕이라고 하면 독자는 혼란을 일으키기 쉽다. 그리고 동일인에 대하여 두 가지 이름이 있는 경우에는 다음처럼 쓰는 것이 사서편찬의 상식이다.
1. 肖古王(초고왕) 일운 素古(소고) - 그러면 ‘초고왕은 소고왕이라고도 불렸구나’ 하고 알게 된다. 아래도 같은 방식이다.
2. 仇首王(구수왕) 혹운 貴須(귀수)
3. 近仇首王(근구수왕) 일운 諱須(휘수)
따라서 우리는 위의 세 왕은 각각 두 가지 이름이 있었는데, 구수왕은 '귀수,' 근구수왕은 '휘수'라고도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 '구수'와 '귀수'와 '휘수'의 발음차이가 정확히 어느 정도였는지는 모른다. '구'와 '귀'는 같은 계열의 발음인데 '휘'도 같은 계열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사서는 이렇게 삼국사기처럼 쓰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일본서기를 보면 아무런 말이 없이 비슷한 이름이 여기저기에 나온다. 따라서 독자는 동일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가 어렵다.
5. 일본서기 신공 49년: 백제왕 肖古(초고)와 백제왕자 貴須(귀수)
6. 일본서기 흠명 2년: 聖明王왈 우리 선조 束古王(속고왕)과 貴須王(귀수왕)치세에 ... 여러 가야제국이 우리와 친교를 맺었는데...
일본서기 신공 49년조의 '초고왕'과 흠명 2년조의 '속고왕'은 동일인인가? 일본서기 집필진도 이 둘이 서로 한자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같은 책에서 이 둘을 통일하지 않고 왜 그냥 두었을까? ‘초’와 ‘소’는 당시에 발음이 같아서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했을까? 아닐 것이다. 국가에서 편찬하는 사서를 이렇게 쓸 수는 없다.
일본서기 저자들이 신공 49년조의 '초고왕'과 흠명 2년조의 '소고왕'이 글자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둔 이유는 이 두 기록의 출전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두 사료가 각기 독립적으로 다른 곳에서 얻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서기 편집진들도 이 둘이 서로 같은지 다른지 몰라서 그냥 두었다고 생각한다.
흠명 2년조에서 백제 성왕이 우리 선조라고 한 사람은 한성백제왕이다. 삼한백제 왕은 왜국 왕의 선조이므로 이들을 우리 선조라고 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가야제국이 '속고왕'과 '귀수왕' 시절에 백제와 친교를 맺었다고 하고 있다. '속고왕'만의 시절도 아니고 '귀수왕'만의 시절도 아니고 두 왕의 시절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신공 49년조에서 가야 7국이 평정되는 것은 '초고왕'이지 '귀수왕'의 시절이 아니다. 당연한 말인데 즉위하지 않은 세자는 아직 왕이 아니다.
나는 이전에 가야사를 설명하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이 성왕의 증언을 찾을 수 있음을 보였다. 임나가야가 한성백제와 친교를 맺게 된 것은(한성백제와 마찬가지로 삼한백제의 변진한에 들어간 것은) 내해이사금 12년(초고왕 42)이며, 다른 가야제국이 한성백제와 친교를 맺은 것은 내해이사금 32년(구수왕 14년)이었다. 소고왕만의 시기도 아니고 귀수왕만의 시기도 아니다. 한성백제가 삼한백제와 친교를 맺은 것은(삼한백제의 마한에 들어간 것은) 이 둘보다 훨씬 일러 아달라이사금 13년(백제가 80년간의 만에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하는 초고왕 1년)이었다. 결론적으로 흠명 2년조의 속고왕과 귀수왕 시기에 가야제국에 삼한에 편입되었다는 증언은 삼국사기와 일치한다.
반면에 신공 49년조에 나오는 백제왕과 왕세자는 삼한백제의 진왕과 진왕의 세자로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다. 일본서기는 이들을 초고왕과 귀수라고 하였으나 이들 이름이 4세기 한성백제 기록을 보고 베낀 것이라 실제 백제 진왕의 왕명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칠지도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227년에 삼한백제의 진왕이 가야제국을 평정할 때 왕과 왕세자가 함께 있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정확할 것이라는 정도이다. 이후 백제 진왕은 곧 죽고 왕세자가 왕이 되었는데, 칠지도를 보내던 230년에는 즉위 직후로써 아직 자립위왕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왕은 칠지도라는 외교문서에서 백제왕이 아니고 백제 왕세자를 칭해야 했던 것이다. 즉 진왕 1명의 교체가 227년과 230년 사이에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