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본기」일성이사금 11년 조에 나오는 오환족의 풍습

▩ 조약돌 2007.04.20

『삼국사기』에 따르면, 서나벌의 일성이사금(박씨족)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사치’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다. 그가 “그러한 명령을 내린 것은 그 이전에 민간인들이 금과 은 그리고 주옥(珠玉. 구슬과 옥 - 옮긴이)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일 것(윤내현 교수. 이하 존칭 생략)”이다.

“봄 2월에 영을 내렸다. ‘농사는 정치의 근본이요, 식량은 백성들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이니 여러 주군(州郡)은 제방을 고쳐 완전하게 하고, 논밭과 들을 널리 개간하라.’ 또 영을 내렸다. <‘민간에서는 금은과 구슬/옥의 사용을 금하라.>’” -『삼국사기』「신라본기」일성이사금 11년(서기 144년) 조 ( < >는 조약돌)

그런데 이 기사에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다른 게 아니라 왕실이나 귀족(6부 포함)에 비해 넉넉하지 못했을 서나벌의 ‘백성’들이 금은과 옥(玉)을 쓴다는 것이다. 서나벌에 복속한 피지배민들은 농민(낙랑인/고구려인/마한인)이나 그다지 넉넉하지 못한 반(半) 유목민족(진한/변한인)이었는데 어떻게 금/은/옥을 마음껏 쓰고 다닐 수 있었을까?

그 의문을 풀려면 이 기사에 나오는 ‘민간(民間)’에 주목해야 한다. 이 ‘민간’이 정복당한 피지배민이 아니라 정복자였던 오환족 출신 백성들일 가능성이 있고, 그들이 원래 금/은/옥을 많이 쓰는 풍습이 있었기에 군주(일성이사금)가 이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고 풀이(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생각이 인정을 받으려면 오환족이 금은을 쓰는 기록이 나와야 할 텐데, 실제로『삼국지』에는 오환족 여성이 금과 옥을 사용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부인이 시집으로 갈 때는 머리를 기른 채 나누어 상투를 틀고, 구결(句決-여인의 머리치장)을 쓰고 <금과 옥>으로 장식하니, 이는 중국의 관보요(冠步搖-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머리장식)와 같다.” ―『삼국지』「오환전」(< >는 조약돌)

오환족의 여성이 혼인할 때 머리를 금과 옥으로 꾸민다는 구절은 오환족이 평소 집안에 금과 옥을 보관하고 있다가, 혼례 같은 행사에 이용했다는 뜻이다. 이들(오환족 평민 여성들)이 그다지 부유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금과 옥으로 몸을 꾸민 까닭은, 땅과 거기서 나오는 곡식이 재산이었던 농경사회와는 달리,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는 유목 사회는 이사할 때 갖고 다닐 수 있는 금붙이나 옥 장식, 가축이 재산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한/조선 반도로 들어온 뒤에도 이 풍습을 유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농경민족 출신 피지배자들의 마음은 편치 않았을 것이며, 그들의 풍속을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그들만이 사치를 누리는 혜택을 입고 우리는 푸대접을 받는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당연히 피지배민과 지배자의 사이는 멀어졌을 것이다.

일성이사금은 이런 현실을 알고 있었기에 - 보기에 따라서는 ‘부당한 사치’로 여겨질 수 있는 - 오환족의 풍습을 폐지하고, 대신 농사를 적극적으로 권장함으로써 피지배민인 농경민족의 반발을 잠재우려고 한 게 아닌가 한다. 물론 오환족 백성들이 쓰지 않게 된 금은은 나라의 창고에 넣었을 것이며(민간이 금은과 옥을 쓰지 못하게 막았다는 것은 백성들이 그것을 집 안의 창고에 고이 모셔 두고 꺼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라가 그것들을 백성들로부터 - 아예 쓰지 못하게 - 거두어들인다는 이야기였을 테니까), 이는 국가 재정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일성이사금은 이런 것까지 다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영을 내린 듯하다.  

(타브가치[탁발선비]족의 임금인 탁발굉拓跋宏 -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 - 도 서기 494년 금령을 반포하여 유목민족의 풍속인 변발이나 유목민족의 복장을 금지하고 서른 살이 안 된 선비족에게는 선비 말을 쓰지 못하게 했다. 또한 선비족 귀족 중 남쪽으로 옮겨온 자들의 본관을 낙양으로 옮기고 죽은 뒤에도 초원에 가서 묻히는 것을 엄금했다. 그가 이런 한화정책을 펼친 까닭은 백제와의 전쟁에서 거듭 패한 뒤, 유목민과 한족이 따로 노는 국가 체제로는 그런 패배가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성이사금의 개혁정책은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봐야 한다)    
  
(*사족 : 윤내현의 학설과 내 가설의 다른 점은 윤내현은 신라의 수공업은 “진한의 수공업을 계승”한 것이라고 주장하나, 나는 그것이 박씨족/석씨족/모씨족[:김씨족]의 수공업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윤내현은 일성이사금이 거론한 ‘신라인이 금과 은 그리고 주옥을 많이 쓰는 풍습’이 진한인의 것이라고 주장하나, 기록에 따르면 백성들이 금과 옥을 쓰는 풍속은 진한인이 아닌 오환족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풍속을 진한인의 것이 아닌 오환족의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열국사연구』(윤내현, 지식산업사, 서기 1998년)
―『삼국지』
―『삼국사기』
―『중국역사』[상권](이근명 편역, 신서원, 서기 1993년) 
―『한글 동이전』(김재선/엄애경/이경 역편, 서문문화사, 서기 199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