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BC 57년에 건국되어 무려 천년을 이어간 나라입니다. BC 1세기는 민족 대 이동기로서 이 기간에 북방으로부터 한반도로의 수많은 종족이 이주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각기 나라를 세웠는데 사로국도 이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사로국만이 4세기에 신라로 국명을 변경하여 마지막까지 살아남았고, 고구려. 백제와 함께 삼국사기에 자신들의 왕력을 남겼습니다. 오직 세나라 만이 삼국사기에 왕력을 남겼고 그래서 제목이 삼국사기입니다.

 BC 57년에 신라가 건국하는 동인에 대하여 이곳의 조약돌님을 비롯한 여러분들의 연구결과가 있었습니다. 이번에 시리즈로서 그 내용을 정리해볼까 합니다. 맨 처음에 올리는 내용은 "삼한사의 재조명" 제2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1. 갈문왕제도의 기원


김성호의 『씨성으로 본 한일 민족의 기원』에는 신라의 갈문왕 제도에 대한 상당히 재미있는 고찰이 나와 이를 간략히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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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갈문왕 제도는 다음처럼 신라 초기부터 나온다.


․제3대 유리왕의 왕비 - 일지 갈문왕의 딸

․제5대 파사왕의 왕비 - 허루 갈문왕의 딸

․제6대 지마왕의 왕비 - 마제 갈문왕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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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문왕 제도는 신라초기부터 나오는 제도로서, 본래 왕의 장인 중에 아주 큰 세력가를 왕에 준하는 높은 대우를 해주는 제도였는데, 나중에는 본인은 왕이 아니더라도 왕의 아버지가 되면 역시 왕에 준하는 높은 대우를 해 주는 제도이다. 이는 고대 동양의 다른 나라에는 없는 신라 특유의 제도이며, 또한 박씨신라의 기원과도 연관된 문제이다. 즉, 갈문왕제도의 기원은 본래 왕족과 왕비족의 관계, 다시 말하면 왕비족의 대우와 관련된 문제이다.


이 신라의 갈문왕제도와 유사한 것이 중세에 들어서면 遼나라에 다시 나타나게 된다. 요나라에는 國舅帳제도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왕비족을 관장하는 제도였다. 즉, 왕의 장인 중에 세력가를 왕에 준하는 높은 대우로 관장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요나라의 국구장제도는 신라의 전통을 이어받아 실시한 것이 아니라, 본래 2천년 전 훨씬 이전부터 고대 東胡족(고몽골족)이 가지고 있었던 문화가 고대 신라에서는 갈문왕제도로 나타나고, 중세 요나라에서는 국구장제도로 나타난 것뿐이다.


박씨신라와 요나라 사이에는 우연으로 보기에는 유사한 점이 너무 많다. 우선 건국신화가 매우 유사하다. 요사에 나오는 거란족의 시조설화는 대충 다음과 같다.


"한 神人이 <白馬>를 타고 마맹산에서 토하를 건너 동쪽으로 왔으며, 한 天女는 <靑牛>가 이끄는 마차를 타고 평지 송림에서 황하를 따라 내려와 두 물이 닿는 목엽산 기슭에서 서로 만났다."


이른바 “백마-청우"설인데 전형적인 북방 기마민족의 시조설화이다. 그런데 신라 박씨왕조의 시조설화에 “백마-청우"가 등장한다. 삼국유사 박혁거세조를 보면 “白馬 한 마리가 꿇어앉아..." 라고 해서 <백마>가 나오고, 제5대 파사왕조에 고타군주로부터 靑牛를 받았다고 해서 새 왕비족에서 온 왕비를 하필 <청우>로 묘사하고 있다.


박씨신라와 거란족 사이에는 또 하나 유사한 것이 있는데 바로 왕을 이르는 왕호이다. 거란족은 왕을 莫弗이라고 했는데 본래 발음은 “박불"이다. 신라는 혁거세를 弗矩內라고 했는데 “불구"가 순수한 우리말로 “붉을" 赫이다. 그래서 “박혁거세"의 “거세"는 동호족 군장이름인 “가사"계 명칭이고, “박혁"은 거란족이 사용하던 왕호인 “박불"에 해당한다.


결론적으로 신라를 건국한 박씨왕조와 요나라를 건국한 거란족은 본래 東胡족이라는 동일한 뿌리에서 출발한 같은 민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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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입니다. 골품제의 완성은 법흥왕 때입니다. 당시 신라정부는 혈통을 따져 자신들과 동일계라고 인정되는 계열에 한하여 김씨를 주고 성골과 진골로 편입시켰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필 성씨를 김씨로 정한 것은 최초의 김씨라는 흉노왕 김일제의 성씨를 따라 김씨로 정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가야의 김씨 역시 북방민족의 이동에 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마 가야는 신라보다 한반도에 먼저 들어와 더 좋은 자리를 차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라의 건국이 더 빠른 이유는 신라는 만주에서 한반도로 남하 중에 혼돈지역인 한반도 중북부에서 건국한 반면에, 가야는 한반도 남부에 일찍 도착하였으나 마한이라는 안정된 거대세력이 존재하여 상대적으로 건국이 어려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중국을 통일한 秦이 서북방 유목민족 연합국이었던 것은 오늘날 진시왕릉의 발굴로부터도 확인이 가능합니다. 발굴결과 소위 漢族의 문화라고 보이는 것은 별로 없고 대부분 胡族문화입니다. 이는 한족이나 漢族문화가 무엇이냐는 정의를 다시 해야 한다고 봅니다. 秦을 이은 漢도 마찬가지로 보는 것이 오늘날 학계의 일반적인 경향인 것으로 보입니다. 과거에는 유목제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만 주로 漢이 북방유목민족에 의해 세워진 국가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대부분 동의하는 것 같습니다. 그 漢에게 귀부하여 관직을 받았다는 흉노세력도 漢의 지배세력과 유사한 계통이었을 것입니다. 秦에서 前漢으로, 또 前漢에서 後漢으로 바뀌는 북중국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몽골에서 만주로, 그리고 다시 만주에서 한반도로 이주한 북방유목민족의 일파가 김알지를 시조로 하는 신라 김씨의 시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