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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수 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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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
2008.03
[다시올림]<만어산의 전설에 나타나는 수로왕의 선주민 정복>-조약돌
// Document: http://www.histopia.net/zbxe/11179 2008.03.13 13:46:00 (*.147.81.116) 가야사0 Comments 958 Views
이 글은 과거에 조약돌님이 이 사이트에 올린 가야건국관련 내용을 다시 올린 것입니다. 최근에 KBS에서 작가 최인호씨를 등장시켜 가야건국과 관련된 내용을 4부작 시리즈로 다루고 있어서 거기에 혹시 참고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다시 올려보았습니다.
KBS에서 하는 내용은 3세기 후반에 낙동강유역에서 유물이 북방계로 급변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제 책 "삼한사의 재조명"의 '북방계 남하'에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즉,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3세기 중후반의 <중기왜>의 성립에 관한 것입니다. KBS와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저는 삼국사기를 가지고 설명하고, KBS는 삼국사기 없이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가야의 건국자인 수로왕을 뇌실청예왕으로 보고 일관되게 설명한 것입니다. 신라나 백제와 마찬가지로 가야도 서력 기원 전후에 북방에서 한반도로 이주한 세력입니다. 한반도로 이주하기 전의 선주지가 어디였는가는 아직 확신이 없습니다. 단지 가야인들이 선택한 지역이 바다를 접한 것과 농경지역을 차지한 것으로 보아, 만주에서 그와 비슷한 지역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정하는 정도입니다. 건국은 신라가 가야보다 빠르나 경상도 지역에 들어오는 것은 가야가 먼저입니다. 그래서 가야가 신라보다 더 좋은 자리를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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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에서 하는 내용은 3세기 후반에 낙동강유역에서 유물이 북방계로 급변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제 책 "삼한사의 재조명"의 '북방계 남하'에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즉,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3세기 중후반의 <중기왜>의 성립에 관한 것입니다. KBS와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저는 삼국사기를 가지고 설명하고, KBS는 삼국사기 없이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가야의 건국자인 수로왕을 뇌실청예왕으로 보고 일관되게 설명한 것입니다. 신라나 백제와 마찬가지로 가야도 서력 기원 전후에 북방에서 한반도로 이주한 세력입니다. 한반도로 이주하기 전의 선주지가 어디였는가는 아직 확신이 없습니다. 단지 가야인들이 선택한 지역이 바다를 접한 것과 농경지역을 차지한 것으로 보아, 만주에서 그와 비슷한 지역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정하는 정도입니다. 건국은 신라가 가야보다 빠르나 경상도 지역에 들어오는 것은 가야가 먼저입니다. 그래서 가야가 신라보다 더 좋은 자리를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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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3년 전 이 게시판에 올린「▩원(原) 불가리아 족과 원(原) 가야인」이라는 글에서
"원 가야인은 서나벌이나 해상신라(석씨족이 세운 신라)와는 달리 온 힘을 정복전쟁에 쏟아 붇지 않고 경상남도를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가락국기』에도 진한인과 원 가야인의 전투는 단 한번밖에 나오지 않으며, 김해를 뺀 다른 곳에서는 두 세력이 싸웠다는 기록이 없다[만약 다른 곳을 정복할 때도 싸웠다면 ‘나쁜 무리를 무찔렀다’거나 ‘천손에게 대드는 것들이 있었다’고 적어야 할 텐데, 그렇지도 않기 때문에, 나는 “진한의 유민”이 원 가야인에게 순순히 복속했으리라고 여기는 바이다])."
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런데 얼마 전, 글을 쓰려고『삼국유사』를 뒤져 봤더니, 그런 내 주장이 반은 맞지만, 나머지 반은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책의 「탑상」편에는 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이 경상남도 밀양군에 있는 만어산의 선주민을 굴복시킨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었다.
"『고기(古記)』에 이런 기록이 있다.
만어산(萬魚山)은 옛날의 자성산(慈成山), 또는 아야사산(阿耶斯山) - 아야사는 마땅히 마야사摩耶斯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어魚라고 이를 것이다 - 인데, 그 옆에 가라국(呵囉國 : 伽倻國)이 있었다.
옛날 하늘에서 알이 바닷가로 내려와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곧 수로왕이다. 이때 그 영토 안에 아름다운 못이 있었는데, 그 못 안에 독룡(毒龍 : 독기를 품은 용. 인간에게 해를 끼친다고 한다 - 옮긴이)이 살고 있었다. 만어산에 다섯 나찰녀(羅刹女 : '나찰'은 불교에서 이르는 사람을 잡아먹는 악귀의 이름이고, '나찰녀'는 그 나찰 중 여자 귀신을 일컫는 말이다 - 옮긴이)가 있어 그 독룡과 서로 오가며 사귀었다. 그러므로 때때로 뇌우(雷雨 : 우렛소리를 내며 내리는 비 - 옮긴이)를 내려 4년 동안 오곡이 결실을 맺지 못했다.
왕은 주술로써 이 일을 금하려 해도 할 수 없으므로 머리를 숙이고 부처를 청하여 설법했더니 그제야 나찰녀가 오계(五戒 : 불교에 귀의한 사람들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금기. 즉 살생, 도적질, 음행, 거짓말, 술 마시기 - 옮긴이)를 받았는데 그 후로는 재해가 없었다. 그 때문에 동해의 고기와 용이 마침내 골짜기 속에 가득 찬 돌로 변하여 각기 쇠북과 경쇠의 소리가 난다. - 이상은 옛 기록이다."
:『삼국유사』
우선 이 전설이 언제 생긴 것인지를 알아야 이 이야기가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후대에 꾸며낸 이야기인지를 알 수 있는데, 나는『삼국유사』가 인용한『고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이 이야기가 못해도 서기 3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며,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대답하려 한다.
"하지만『고기』에는 수로왕이 바닷가로 내려왔다고 적혀 있는데, 오늘날의 김해는 바다에 접하지 않았고 대신 김해평야라는 넓은 벌판만 있지 않느냐?"고 물어보실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간단하다. 1970여 년 전에는 (김해시 바로 밑에 있는) 김해평야가 없었고 대신 그 자리에는 바다가 있었다는 것이다.
금관가야(『삼국유사』에는 '대가락'으로 나옴. '금관가야'라는 이름은 고려시대에 붙여진 것이다. 나는 수로왕이 세운 나라의 이름이 '대가락'이었다고 생각한다)의 땅이었던 경상남도 김해시 예안리는 원래 바닷가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바닷물이 빠지고 평야가 된 것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는 것도 이런 내 가설에 힘을 실어준다 :
"(예안리의 - 옮긴이) 무덤 터는 겉으로 보기에 평범했다. 다만 바닷가에서 먼 곳인데도 무덤 터 여기저기 조개껍질이 흩어져 있었다. 발굴 당시 무덤을 덮고 있던 흙 속에서도 이런 패각(貝殼)들이 나왔다. 무덤 터에서 채취한 흙을 현미경으로 정밀 검사해본 결과 유공충(有孔蟲)이라 불리는 단세포 바다생물도 발견되었다. 3세기경만 해도 바닷물이 김해평야 일대를 덮어 해안선이 바로 고분군 옆에까지 와 있었던 것이다. 실제 고분군은 육계사주(陸繫沙洲)로 백사장같이 깨끗한 모래 지형이었다. 1600년 전 예안리는 바닷가 마을이었고 현재의 무덤 터는 백사장이었는데, 100년 뒤 바닷물이 빠지면서 이곳에 무덤을 만든 것이다. 무덤 터가 실제 백사장이었는지 알아보는 실험을 했다. 바닷물의 영향을 받은 땅에선 황화철이 만들어진다. 이 황화철이 과산화수소수와 만나면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실험 결과 예안리의 땅은 바닷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역사스페셜 2』의「가야인도 성형수술을 했다」에서
따라서 건국 당시(서기 42년), 가야인이 자기나라 남쪽의 땅을 - 구체적인 땅 이름이나 강 이름을 대지 않고 - 그냥 "나라의 끝"이라고만 한 것도 이해가 된다. 당시 김해 남쪽에는 아무것도 없고 그저 망망대해 뿐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이 때문에『고기』의 기록이 - 전설이라는 옷을 입고 있을 뿐 - 본질적으로는 정확한 기록이었다고 생각하며, 아울러 그 기록은『가락국기』에 나오는 수로왕의 출현 기사와도 비슷하여『가락국기』의 기록과『고기』의 기록이 아무런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도 덧붙이고자 한다.
『고기』:
- 나타난 사람 : 수로왕
- 나타난 방향 : 하늘 -> 바닷가(땅)
- 나타난 방식 : 알 -> 사람
『가락국기』:
- 나타난 사람 : 수로왕과 다섯 형제
- 나타난 방향 : 하늘 -> 땅
- 나타난 방식 : 알 -> 사람
(따라서 위 두 기록은 같은 전승에서 갈라져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수로왕의 강림 기사가 사실이라면, 이제 그가 만어산에서 한 일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가릴 차례다. 다시『고기』를 살펴보자. 거기에는 대가락(금관가야)의 영토가 된 땅 안에 연못이 있었고 그 못 안에 '독룡'이 살고 있었으며 만어산(자성산/아야사산)에 '다섯 나찰녀'가 살고 있었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이들이 서로 친한 사이였고 힘을 합쳐 가야를 괴롭혔기 때문에 곡식이 제대로 익지 못했다고 했다. 왕은 처음에는 주술로서 그들의 횡포를 막으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나중에 (불교의) 붓다(깨달은 이라는 뜻)에게 머리를 숙이고 도움을 요청하여 그들에게 불법(불교)을 가르쳤더니, 그때서야 다섯 나찰녀가 잘못을 뉘우치고 불교신자가 되어 더 이상은 대가락이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기사를 어떻게 풀이해야 할까?
나는 '독룡'과 '나찰녀', 그리고 '4년'이라는 말에 그 해답이 숨어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진짜 용과 나찰이 아니라, 경상남도의 선주민(가야인보다 일찍 도착하기는 했지만, 이들이 진짜 토착 세력인 원原 한국인이 아닐 수도 있어서 이렇게 표현했음)이며, 4년 동안 가야인에게 맞서 싸우다가 굴복했기 때문에 이런 기록이 남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난 시기는 구체적으로는 서기 48년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까닭은『고기』에 수로왕이 처음에는 주술로 독룡과 나찰녀들을 이기려고 했으나,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자 붓다에게 머리를 숙이고 불교의 가르침을 빌었다는 구절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 나오는 붓다는 서기 1세기의 가야에 살고 있었던 불교승려였을 테고, 그 사람은 수로왕의 왕비가 된 허황옥(서기 48년에 나타남)과 함께 가야로 건너온 그녀의 오라비 장유화상밖에 없다(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음).
기사를 좀 더 찬찬히(그리고 자세히) 뜯어보자. 우선 이 기사에 나오는 '독룡'과 '나찰녀'는 실제 독룡과 나찰녀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옛 기록이나 신화/전설은 임금이나 왕자, 지배자, 왕족을 '용'이라고 부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찰녀'라는 말은 그들이 진짜 『불경』에 나오는 여자 나찰이라서 그렇게 불렸던 것이 아니라, (가야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들이 나쁜 짓을 많이 하고 사람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독룡'은 수로왕의 영토인 김해군 부근에 자리잡고 있던 선주민 집단의 우두머리(어쩌면 작은 나라의 군주였을지도 모른다)였고, 다섯 '나찰녀'는 밀양 만어산에 자리잡고 있던 선주민 집단의 여성 사제(제사장 또는 무녀)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그들이 서로 오가며 사귀었다는 구절은 두 집단의 우두머리가 서로 밀접한 관계였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고, 그들 때문에 뇌우가 내려 4년 동안 곡식이 익지 못했다는 구절은 두 세력이 손을 잡고 대가락(금관가야)을 약탈해 4년 동안 대가락 백성들이 편히 살 수 없었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4년이라는 구체적인 기간을 적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는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을 신화화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들이 이렇게 가야와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까닭은 당시 밀양이 가야 땅이 아니었기 때문이고(『가락국기』에는 6가야가 "동쪽은 황산강"으로 경계를 삼았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황산강은 오늘날의 낙동강이다. 지도를 펼쳐보면 밀양은 낙동강에서 동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어 서기 42년의 가야 연방의 영역에 속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 원 가야인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경상도의 여러 지역을 공격했지만(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이 게시판의 글인「▩원 가야인이 내려온 길 - 경상도 편 (1)」과「▩원 가야인이 내려온 길 - 경상도 편 (2)」를 찾아서 읽어보기 바람) 밀양은 거기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원 가야인의 힘을 알지 못했던 밀양의 선주민들은 김해 부근의 선주민들과 손을 잡고 다섯 제사장의 지도 아래 4년 동안 대가락과 맞서 싸웠으며, 그들은 대가락의 신하가 된 진한 유민들(「▩『가락국기』에 나오는 9간의 출신 성분」참고)을 약탈하고 죽여 대가락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
수로왕(뇌실청예왕)은 처음에는 원 가야인만의 힘으로(그러니까 원 가야인 고유의 주술과 군사력만으로) 이들을 무찌르려고 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고,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장유화상을 모셔다가 '우리 대가락군이 이길 수 있게 석가모니에게 빌어달라. 그러면 (소승) 불교를 믿겠다.'고 부탁했을 것이다(프랑크 왕국을 세운 게르만족의 왕도 처음에는 프랑크 족의 전통 신앙을 믿었으나, 기독교도였던 서로마인 출신 왕비의 설득으로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는 그 때 왕비에게 "만약 당신의 신이 내가 적들과의 싸움에서 이기게 도와준다면, 나도 개종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그는 그 조건을 내건 뒤 싸움에 나가서 이기고 돌아왔다. 그는 약속을 지켜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와 비슷한 일이 가야사에서도 일어난 게 아닌가 한다).
결국 불교를 받아들인 가야군은 이 두 세력과 싸워서 이겼고, 밀양의 선주민들(나찰녀 집단)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정복자(원 가야인)가 강요하는 종교(소승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오계를 받아들임으로써) 가야의 백성이 되었다(이와 비슷한 일이 프랑크 왕국과 오늘날의 독일에 살고 있던 '작센'족 사이에서 일어났다. 프랑크 왕국은 작센족을 칼로 정복한 뒤 전통신앙을 고집하고 있던 그들에게 기독교를 강요했고, 그들은 목숨을 걸고 맞서 싸웠으나 힘이 딸려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기독교를 받아들여 프랑크 왕국의 백성이 되었다). 그들이 항복한 후에는 재해가 안 일어났다는 말은 김해의 백성들이 더 이상 경상남도의 다른 선주민들에게 약탈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애둘러 말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럼 나찰녀들이 대가락(금관가야)에 항복했기 때문에 "동해"의 "물고기와 용"이 돌로 변하였다는 구절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는 이것을 (김해의 동쪽에 있는) 부산의 선주민들이 가야와 맞서 싸우다가 가야에 정복당한 것으로 풀이한다. 가야의 "동해"는 부산광역시 동쪽에 있는 바다요, 그곳의 "물고기와 용"은 작은 지배자들(물고기들)과 큰 지배자(용)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찰녀들(밀양 선주민)이 항복한 다음에 동해의 고기와 용(부산 선주민)이 돌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밀양이 가야에 항복한 뒤 그 다음 부산이 가야(이 경우에는 대가락)에게 정복당했다는 것(힘을 잃었다는 것)을 은유한 것이고, 밀양이 항복하자 부산이 정복당했다는 것은 두 세력이 손을 잡고 가야에 맞서는 '공동 전선'을 펼치다가 어느 한 쪽이 무너지자 다른 한 쪽도 덩달아 무너졌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는 것이다.
(밀양은 내륙이고 부산은 바닷가인데, 어떻게 두 세력이 김해를 뛰어넘어 손을 잡을 수 있느냐고 물어보실 것이다. 그러나 지도를 보면 밀양강은 낙동강으로 흘러가고, 낙동강은 다시 부산의 바로 서쪽으로 흘러들어간다. 이로 미루어볼 때, 배를 잘 다루는 세력이 부산에 있었다면 강을 거슬러올라가 밀양으로 가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대가락은 이 때 얻은 영토(부산)를 '의부가라'(훗날 임나가라로 이름을 바꿈)라고 불렀을 테고, 부산은 이런 식으로 가야 영토에 편입된다.
가야의 긴 역사를 살펴보았을 때, 가야는 이후에도 계속 정복전쟁을 일으켰을 것이나, 불교와 상관없는 정복기사는『삼국유사』에 실리지 않았고, 그 때문에 우리는 (아쉽게도) 가야의 영토가 확장되는 과정을 다 알지 못하고 이렇게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을 따름이다.
(사족 : 나는 가야가 불교 - 소승불교 - 를 받아들인 시기가 서기 1세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나중에 올릴 글인「▩가야의 소승불교와 신라의 경교」에서 자세히 밝히겠다)
※참고 자료
-『삼국유사』
-『역사스페셜 2』(KBS 역사스페셜, 효형출판, 서기 2001년)
-『지리 부도』(이기석, 오홍석, 황만익, 반용부, 허행구, 보진재, 서기 1990년)
-『역사의 비밀 1』(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엮음, 이민수 옮김, ‘오늘의 책’, 서기 2000년)
"원 가야인은 서나벌이나 해상신라(석씨족이 세운 신라)와는 달리 온 힘을 정복전쟁에 쏟아 붇지 않고 경상남도를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가락국기』에도 진한인과 원 가야인의 전투는 단 한번밖에 나오지 않으며, 김해를 뺀 다른 곳에서는 두 세력이 싸웠다는 기록이 없다[만약 다른 곳을 정복할 때도 싸웠다면 ‘나쁜 무리를 무찔렀다’거나 ‘천손에게 대드는 것들이 있었다’고 적어야 할 텐데, 그렇지도 않기 때문에, 나는 “진한의 유민”이 원 가야인에게 순순히 복속했으리라고 여기는 바이다])."
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런데 얼마 전, 글을 쓰려고『삼국유사』를 뒤져 봤더니, 그런 내 주장이 반은 맞지만, 나머지 반은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책의 「탑상」편에는 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이 경상남도 밀양군에 있는 만어산의 선주민을 굴복시킨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었다.
"『고기(古記)』에 이런 기록이 있다.
만어산(萬魚山)은 옛날의 자성산(慈成山), 또는 아야사산(阿耶斯山) - 아야사는 마땅히 마야사摩耶斯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어魚라고 이를 것이다 - 인데, 그 옆에 가라국(呵囉國 : 伽倻國)이 있었다.
옛날 하늘에서 알이 바닷가로 내려와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곧 수로왕이다. 이때 그 영토 안에 아름다운 못이 있었는데, 그 못 안에 독룡(毒龍 : 독기를 품은 용. 인간에게 해를 끼친다고 한다 - 옮긴이)이 살고 있었다. 만어산에 다섯 나찰녀(羅刹女 : '나찰'은 불교에서 이르는 사람을 잡아먹는 악귀의 이름이고, '나찰녀'는 그 나찰 중 여자 귀신을 일컫는 말이다 - 옮긴이)가 있어 그 독룡과 서로 오가며 사귀었다. 그러므로 때때로 뇌우(雷雨 : 우렛소리를 내며 내리는 비 - 옮긴이)를 내려 4년 동안 오곡이 결실을 맺지 못했다.
왕은 주술로써 이 일을 금하려 해도 할 수 없으므로 머리를 숙이고 부처를 청하여 설법했더니 그제야 나찰녀가 오계(五戒 : 불교에 귀의한 사람들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금기. 즉 살생, 도적질, 음행, 거짓말, 술 마시기 - 옮긴이)를 받았는데 그 후로는 재해가 없었다. 그 때문에 동해의 고기와 용이 마침내 골짜기 속에 가득 찬 돌로 변하여 각기 쇠북과 경쇠의 소리가 난다. - 이상은 옛 기록이다."
:『삼국유사』
우선 이 전설이 언제 생긴 것인지를 알아야 이 이야기가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후대에 꾸며낸 이야기인지를 알 수 있는데, 나는『삼국유사』가 인용한『고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이 이야기가 못해도 서기 3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며,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대답하려 한다.
"하지만『고기』에는 수로왕이 바닷가로 내려왔다고 적혀 있는데, 오늘날의 김해는 바다에 접하지 않았고 대신 김해평야라는 넓은 벌판만 있지 않느냐?"고 물어보실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간단하다. 1970여 년 전에는 (김해시 바로 밑에 있는) 김해평야가 없었고 대신 그 자리에는 바다가 있었다는 것이다.
금관가야(『삼국유사』에는 '대가락'으로 나옴. '금관가야'라는 이름은 고려시대에 붙여진 것이다. 나는 수로왕이 세운 나라의 이름이 '대가락'이었다고 생각한다)의 땅이었던 경상남도 김해시 예안리는 원래 바닷가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바닷물이 빠지고 평야가 된 것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는 것도 이런 내 가설에 힘을 실어준다 :
"(예안리의 - 옮긴이) 무덤 터는 겉으로 보기에 평범했다. 다만 바닷가에서 먼 곳인데도 무덤 터 여기저기 조개껍질이 흩어져 있었다. 발굴 당시 무덤을 덮고 있던 흙 속에서도 이런 패각(貝殼)들이 나왔다. 무덤 터에서 채취한 흙을 현미경으로 정밀 검사해본 결과 유공충(有孔蟲)이라 불리는 단세포 바다생물도 발견되었다. 3세기경만 해도 바닷물이 김해평야 일대를 덮어 해안선이 바로 고분군 옆에까지 와 있었던 것이다. 실제 고분군은 육계사주(陸繫沙洲)로 백사장같이 깨끗한 모래 지형이었다. 1600년 전 예안리는 바닷가 마을이었고 현재의 무덤 터는 백사장이었는데, 100년 뒤 바닷물이 빠지면서 이곳에 무덤을 만든 것이다. 무덤 터가 실제 백사장이었는지 알아보는 실험을 했다. 바닷물의 영향을 받은 땅에선 황화철이 만들어진다. 이 황화철이 과산화수소수와 만나면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실험 결과 예안리의 땅은 바닷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역사스페셜 2』의「가야인도 성형수술을 했다」에서
따라서 건국 당시(서기 42년), 가야인이 자기나라 남쪽의 땅을 - 구체적인 땅 이름이나 강 이름을 대지 않고 - 그냥 "나라의 끝"이라고만 한 것도 이해가 된다. 당시 김해 남쪽에는 아무것도 없고 그저 망망대해 뿐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이 때문에『고기』의 기록이 - 전설이라는 옷을 입고 있을 뿐 - 본질적으로는 정확한 기록이었다고 생각하며, 아울러 그 기록은『가락국기』에 나오는 수로왕의 출현 기사와도 비슷하여『가락국기』의 기록과『고기』의 기록이 아무런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도 덧붙이고자 한다.
『고기』:
- 나타난 사람 : 수로왕
- 나타난 방향 : 하늘 -> 바닷가(땅)
- 나타난 방식 : 알 -> 사람
『가락국기』:
- 나타난 사람 : 수로왕과 다섯 형제
- 나타난 방향 : 하늘 -> 땅
- 나타난 방식 : 알 -> 사람
(따라서 위 두 기록은 같은 전승에서 갈라져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수로왕의 강림 기사가 사실이라면, 이제 그가 만어산에서 한 일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가릴 차례다. 다시『고기』를 살펴보자. 거기에는 대가락(금관가야)의 영토가 된 땅 안에 연못이 있었고 그 못 안에 '독룡'이 살고 있었으며 만어산(자성산/아야사산)에 '다섯 나찰녀'가 살고 있었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이들이 서로 친한 사이였고 힘을 합쳐 가야를 괴롭혔기 때문에 곡식이 제대로 익지 못했다고 했다. 왕은 처음에는 주술로서 그들의 횡포를 막으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나중에 (불교의) 붓다(깨달은 이라는 뜻)에게 머리를 숙이고 도움을 요청하여 그들에게 불법(불교)을 가르쳤더니, 그때서야 다섯 나찰녀가 잘못을 뉘우치고 불교신자가 되어 더 이상은 대가락이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기사를 어떻게 풀이해야 할까?
나는 '독룡'과 '나찰녀', 그리고 '4년'이라는 말에 그 해답이 숨어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진짜 용과 나찰이 아니라, 경상남도의 선주민(가야인보다 일찍 도착하기는 했지만, 이들이 진짜 토착 세력인 원原 한국인이 아닐 수도 있어서 이렇게 표현했음)이며, 4년 동안 가야인에게 맞서 싸우다가 굴복했기 때문에 이런 기록이 남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난 시기는 구체적으로는 서기 48년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까닭은『고기』에 수로왕이 처음에는 주술로 독룡과 나찰녀들을 이기려고 했으나,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자 붓다에게 머리를 숙이고 불교의 가르침을 빌었다는 구절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 나오는 붓다는 서기 1세기의 가야에 살고 있었던 불교승려였을 테고, 그 사람은 수로왕의 왕비가 된 허황옥(서기 48년에 나타남)과 함께 가야로 건너온 그녀의 오라비 장유화상밖에 없다(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음).
기사를 좀 더 찬찬히(그리고 자세히) 뜯어보자. 우선 이 기사에 나오는 '독룡'과 '나찰녀'는 실제 독룡과 나찰녀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옛 기록이나 신화/전설은 임금이나 왕자, 지배자, 왕족을 '용'이라고 부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찰녀'라는 말은 그들이 진짜 『불경』에 나오는 여자 나찰이라서 그렇게 불렸던 것이 아니라, (가야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들이 나쁜 짓을 많이 하고 사람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독룡'은 수로왕의 영토인 김해군 부근에 자리잡고 있던 선주민 집단의 우두머리(어쩌면 작은 나라의 군주였을지도 모른다)였고, 다섯 '나찰녀'는 밀양 만어산에 자리잡고 있던 선주민 집단의 여성 사제(제사장 또는 무녀)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그들이 서로 오가며 사귀었다는 구절은 두 집단의 우두머리가 서로 밀접한 관계였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고, 그들 때문에 뇌우가 내려 4년 동안 곡식이 익지 못했다는 구절은 두 세력이 손을 잡고 대가락(금관가야)을 약탈해 4년 동안 대가락 백성들이 편히 살 수 없었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4년이라는 구체적인 기간을 적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는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을 신화화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들이 이렇게 가야와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까닭은 당시 밀양이 가야 땅이 아니었기 때문이고(『가락국기』에는 6가야가 "동쪽은 황산강"으로 경계를 삼았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황산강은 오늘날의 낙동강이다. 지도를 펼쳐보면 밀양은 낙동강에서 동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어 서기 42년의 가야 연방의 영역에 속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 원 가야인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경상도의 여러 지역을 공격했지만(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이 게시판의 글인「▩원 가야인이 내려온 길 - 경상도 편 (1)」과「▩원 가야인이 내려온 길 - 경상도 편 (2)」를 찾아서 읽어보기 바람) 밀양은 거기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원 가야인의 힘을 알지 못했던 밀양의 선주민들은 김해 부근의 선주민들과 손을 잡고 다섯 제사장의 지도 아래 4년 동안 대가락과 맞서 싸웠으며, 그들은 대가락의 신하가 된 진한 유민들(「▩『가락국기』에 나오는 9간의 출신 성분」참고)을 약탈하고 죽여 대가락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
수로왕(뇌실청예왕)은 처음에는 원 가야인만의 힘으로(그러니까 원 가야인 고유의 주술과 군사력만으로) 이들을 무찌르려고 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고,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장유화상을 모셔다가 '우리 대가락군이 이길 수 있게 석가모니에게 빌어달라. 그러면 (소승) 불교를 믿겠다.'고 부탁했을 것이다(프랑크 왕국을 세운 게르만족의 왕도 처음에는 프랑크 족의 전통 신앙을 믿었으나, 기독교도였던 서로마인 출신 왕비의 설득으로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는 그 때 왕비에게 "만약 당신의 신이 내가 적들과의 싸움에서 이기게 도와준다면, 나도 개종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그는 그 조건을 내건 뒤 싸움에 나가서 이기고 돌아왔다. 그는 약속을 지켜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와 비슷한 일이 가야사에서도 일어난 게 아닌가 한다).
결국 불교를 받아들인 가야군은 이 두 세력과 싸워서 이겼고, 밀양의 선주민들(나찰녀 집단)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정복자(원 가야인)가 강요하는 종교(소승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오계를 받아들임으로써) 가야의 백성이 되었다(이와 비슷한 일이 프랑크 왕국과 오늘날의 독일에 살고 있던 '작센'족 사이에서 일어났다. 프랑크 왕국은 작센족을 칼로 정복한 뒤 전통신앙을 고집하고 있던 그들에게 기독교를 강요했고, 그들은 목숨을 걸고 맞서 싸웠으나 힘이 딸려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기독교를 받아들여 프랑크 왕국의 백성이 되었다). 그들이 항복한 후에는 재해가 안 일어났다는 말은 김해의 백성들이 더 이상 경상남도의 다른 선주민들에게 약탈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애둘러 말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럼 나찰녀들이 대가락(금관가야)에 항복했기 때문에 "동해"의 "물고기와 용"이 돌로 변하였다는 구절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는 이것을 (김해의 동쪽에 있는) 부산의 선주민들이 가야와 맞서 싸우다가 가야에 정복당한 것으로 풀이한다. 가야의 "동해"는 부산광역시 동쪽에 있는 바다요, 그곳의 "물고기와 용"은 작은 지배자들(물고기들)과 큰 지배자(용)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찰녀들(밀양 선주민)이 항복한 다음에 동해의 고기와 용(부산 선주민)이 돌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밀양이 가야에 항복한 뒤 그 다음 부산이 가야(이 경우에는 대가락)에게 정복당했다는 것(힘을 잃었다는 것)을 은유한 것이고, 밀양이 항복하자 부산이 정복당했다는 것은 두 세력이 손을 잡고 가야에 맞서는 '공동 전선'을 펼치다가 어느 한 쪽이 무너지자 다른 한 쪽도 덩달아 무너졌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는 것이다.
(밀양은 내륙이고 부산은 바닷가인데, 어떻게 두 세력이 김해를 뛰어넘어 손을 잡을 수 있느냐고 물어보실 것이다. 그러나 지도를 보면 밀양강은 낙동강으로 흘러가고, 낙동강은 다시 부산의 바로 서쪽으로 흘러들어간다. 이로 미루어볼 때, 배를 잘 다루는 세력이 부산에 있었다면 강을 거슬러올라가 밀양으로 가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대가락은 이 때 얻은 영토(부산)를 '의부가라'(훗날 임나가라로 이름을 바꿈)라고 불렀을 테고, 부산은 이런 식으로 가야 영토에 편입된다.
가야의 긴 역사를 살펴보았을 때, 가야는 이후에도 계속 정복전쟁을 일으켰을 것이나, 불교와 상관없는 정복기사는『삼국유사』에 실리지 않았고, 그 때문에 우리는 (아쉽게도) 가야의 영토가 확장되는 과정을 다 알지 못하고 이렇게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을 따름이다.
(사족 : 나는 가야가 불교 - 소승불교 - 를 받아들인 시기가 서기 1세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나중에 올릴 글인「▩가야의 소승불교와 신라의 경교」에서 자세히 밝히겠다)
※참고 자료
-『삼국유사』
-『역사스페셜 2』(KBS 역사스페셜, 효형출판, 서기 2001년)
-『지리 부도』(이기석, 오홍석, 황만익, 반용부, 허행구, 보진재, 서기 1990년)
-『역사의 비밀 1』(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엮음, 이민수 옮김, ‘오늘의 책’, 서기 2000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