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영산강유역 고대사학회에 참석해본 적이 있었다(네티즌 고대사 부록). 3일 정도 했던 것 같은데 나야 구경이나 하는 입장이었지만 들어보니 주요 의제의 하나가 이곳이 언제 백제의 영역이 되었느냐였다. 문헌사학하시는 분들은 주로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라고 하셨고, 고고학하시는 분들은 6세기 초라 하셨다(고고학이 맞다). 그때 백제사로 박사학위를 하신다는 분을 만나 근초고왕조 30년 중 처음 20년 기록이 공백인 이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답하기를 "왜 내게 물어보십니까? 김부식에게 물어보십시오" 라고 하였다.

그렇다. 책의 저자에게 물어보는 것이 가장 확실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김부식에게 물어보아도 모를 것이다. 그가 받은 사료에 이미 근초고왕 초반 20년이 공백이었을 것이다.

만일 내가 김부식을 만난다면, 그래서 딱 3가지만 물어볼 수 있다면 무엇을 물어볼까? 나는 다음 3가지를 물어보고 싶다.

(1) 삼국사기 편찬할 때 어떤 사료들을 참조하셨습니까?

아마 구 삼국사를 비롯한 여러 사료들이 있었을 것이다. 화랑세기도 있었을 것이고. 고조선 관련 사료들도 있일 수 있으나, 책이 고조선사가 아니라 삼국사기이므로 시간적으로 신라의 건국에서 멸망 바깥에 있는 사료는 별로 참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가 군데군데 인용한 '고기'는 무엇이었을가? 여러번 인용할 정도라면 당시에 상당히 권위있는 책이었을텐데.

(2) 어떤 기준으로 사료를 선택하였습니까?

수많은 사료를 받았다고 해서 이들을 모두 균등하게 쓸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조선사를 편찬한다면 당연히 조선왕조실록 같은 책이 기준이 되는 것이지, 근본도 잘 알 수 없는 야사책을 가지고 정사를 기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사료선택의 원칙을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 가장 우선되는 것은 유교적 합리주의다. 요즘으로 말하면 과학적인 사고다. 그런 면에서 당시 편집진의 시각으로 볼 때 일본서기는 누가 가져다 주었어도 사료로 채택되지 않았을 것이다.

삼국사기 편찬진은 객관전 사실 위주로 사료를 선택하였고, '비합리적이다'라고 생각되는 사료는 대부분 채택하지 않았다.  깊은 궁궐 내부에서 벌어지는 여인들의 이야기는 밖으로 새어 나오기도 어렵지만, 새어 나온다고 해도 그것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줄 알 수 없기 때문에, 야사는 될 수 있을지언정 국가공인기록은 될 수 없는 것이다. 반면에 사료가 이상해도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그대로 싣고, 대신 자신의 의견을 첨가했다. 기록을 조작한다던가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조작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삼국사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우연히 1971년에 발간된 <전북도사>를 펴보니 김제 벽골지는 백제 비류왕이 축조한 것인데 삼국사기가 착오를 일으켜 신라본기에 기록되었다고 하고 있다. 국가가 관선 사서를 편찬할 때는 보고 또 보고, 여러 번의 교정을 거친다. 삼국사기가 착오를 일으켰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벽골지는 논리적으로도 신라본기에 들어가 있어야 맞고 중국사서와 비교해서도 맞다. 

(3) 당시 고조선 관련 사료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습니까?

책이 고조선사가 아니라 삼국사기였기 때문에 고조선관련 사료는 모으지 않았을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그는 당대 제일의 석학이었기 때문에 꼭 물어보고 싶다. 고려시대만 하더라도 고조선에 관한 사료가 상당히 있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