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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
일본서기에서 가장 중요한 기록
// Document: http://www.histopia.net/zbxe/10560 2008.03.04 10:43:41 (*.147.81.39) 기타2 Comments 1077 Views
지난 글에서 삼국사기에서 가장 중요한 기록을 살펴보았는데 그러면 일본서기에서 가장 중요한 기록을 하나 고르라면 무엇을 고를까? 일본학자들에게 물어보면 무엇을 고를까? 우리 학자들에게 물어보면 무엇을 고를까? 아마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심지어 옛날과 지금이 다르다. 우선 후보 몇가지를 올려보자.
[후보1] 신공 46-49-52년조: 내해이사금시기의 가야멸망기록
신공 46년(224년)-백제왕이 왜국에 철정등을 주겠으니 군사를 동원하라고 함.
신공 49년(227년)-군대를 보내 백제를 도와 가야 7국을 멸망시킴.
신공 52년(230년)-군대동원한 댓가로 백제왕이 칠지도를 보내옴.
일본서기는 전반적으로 가야에 대하여 우호적인 기록을 하고 있는데 유일하게 신공 후반부에 한해서만 적대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곳의 원사료 출전이 다른 사료와 달랐기 때문이다. 즉, 이곳의 신공은 신공기 다른 부분의 신공과 다른 여인이라는 뜻이다.
이 기록이 중요한 이유는 사료의 일치때문이다. 서로 독립적인 사료들이 일치함을 확인할 때 역사학도는 희열을 느낀다. 이 기록은 3세기 초반에 삼국사기에서 가야가 사라지는 이유를 설명하며, 삼국유사에서 전반기 남가라왕들의 재위기간이 과도하게 긴 이유를 설명하며, 또 <후한서-삼국지-진서>로 이어지는 동이전의 삼한 설립과정을 보여준다.
특히 가야 7국 이름이 삼국지 동이전의 변진한조에 안 나옴으로써, 소국이 멸망하여 삼한에 들어가면 국명을 바꾼다는 삼국사기 기림이사금조의 증언을 증명하고 있다. 더우기 칠지도라는 고고학적 유물이 남아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연호가 태화 4년으로 신공 52년의 사서기록과 완전히 일치한다. 금강유역의 진왕으로부터 칠지도를 받은 사람이 왜 여왕 비미호였다. 백제왕은 본래 진왕의 칭호였다. 삼국사기 아달라이사금조는 서기 173년의 비미호의 사신기록을 남겨,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비미호의 기록은 물론 일본서기와도 전체 기록의 줄거리가 완전히 일치함을 보여준다. 또 중애 9년=서기 173년이라는 것을 가지면 2세기 동양사의 기년을 제대로 복원할 수 있다. 한다. 비미호의 탄생부터 집권과정의 내란은 물론 비밀호의 즉위와 퇴위까지 모든 것을 알려준다.
[후보2] 응신 7년(396년)조: 영락6년의 잔국토벌기록
応神天皇 七年 九月。高麗人。百濟人。任那人。新羅人。並來朝。時命武內宿禰。領諸韓人等作池。因以名池號韓人池。
우선 이 기록이 믿을만한 이유는 임나인만 나오고 가야인은 안 나오기 때문이다. 영락 6년 잔국 토벌 당시 임나만 있었고 가야는 없었다. 가야가 다시 나오는 것은 영락 17년에 재건국하고부터이다. 따라서 만일 영락 16년 이전의 전쟁을 기록한 사료에 임나와 가야가 동시에 나온다면 이는 거짓이다.
응신조는 기 기록 앞의 응신 6년까지는 한반도 기록이고 이 7년조부터 일본열도 기록이다. 영락 6년의 잔국 토벌을 기록하고 있는데 고구려군의 잔국토벌이 음력 9월 직전, 즉 음력 8월경부터 이루어졌음을 보여주어 육로가 아니라 수로를 이용하여 공격하였다는 뜻이다. 즉, 고구려군은 <삼한사의 재조명>에서 설명한대로, 영락 6년에 수군을 동원하였다는 광개토왕비문과 일치한다.
이를 요약하면, 이 기록은 잔국이 고구려에게 토벌되고 금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백제의 일파가 왜국으로 피신해온 역사적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 동시에 5세기 중국사서에 왜 5왕으로 알려진 왜국의 기원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후보3] 웅략 5년(461년)조: 삼국지 한전의 진왕의 자립위왕 기록
雄略天皇 五年 四月。百濟加須利君〈盖鹵王也。〉飛聞池津媛之所燔殺〈適稽女郞也。〉而籌議曰。昔貢女人爲釆女。而旣無禮。失我國名。自今以後不合貢女。乃告其弟軍君〈崑攴君也〉曰。汝宜往日本以事天皇。軍君對曰。上君之命不可奉違。願賜君婦而後奉遺。加須利君則以孕婦。旣嫁與軍君曰。我之孕婦旣當産月。若於路産。冀載一船。隨至何處速令送國。遂與辭訣奉遣於朝。
곤지가 백제왕실의 여인을 데리고 왜국으로 가는 이 기록이 중요한 이유는 무령왕릉 지석을 통하여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었으며, 삼국지 한전에 나오는 진왕기록이 사실이고, 또 어떻게 진왕이 자립위왕하는가를 알려주고 있으며, 언뜻 보면 논리가 없어 엉망에 무규칙하게 보이는 5세기 일본서기가 어떤 원칙에 의하여 쓰여 졌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즉 왜 토도태자는 천황위가 안 주어졌고, 인덕이 동년배인 응신의 아들인 이유는 무엇이며, 5세기 왜 5왕 중에 찬, 진, 제, 무는 왕인데 무슨 이유로 흥은 왕세자인지도 알려주고, 칠지도를 백제왕이 아니라 백제왕세자가 주었는지도 알려주고 있으며, 백제왕 여휘가 동진에 사신을 보내면서 백제왕이 아니라 백제왕세자를 칭해야 했던 이유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第二子가 둘째아들을 나타내는 仲子와는 어떻게 다르며 무슨 뜻인가를 알려주며, 왜 백제초기 3루왕의 기록이 이상하게 되었고, 근초고왕조 처음 20년이 기록공백인가도 가르쳐주고 있다.
[후보4] 황극 원년(642년)조 : 새 이민 집단에 의한 일본건국기록
皇極天皇 元年 正月乙酉《廿九。百濟使人大仁阿曇連比羅夫。從筑紫國乘驒馬來言。百濟國聞天皇崩奉遣弔使。臣隨弔使。共到筑紫。而臣望仕於葬。故先獨來也。然其國者今大亂矣。二月戊子《二。遣阿曇山背連比良夫。草壁吉士磐金。倭漢書直縣遣百濟弔使所。問彼消息。弔使報言。百濟國主謂臣言。塞上恒作惡之。請付還使。天朝不許。百濟弔使人等言。去年十一月。大佐平<智積>卒。又百濟使人擲崑崙使於海裏。今年正月。國主母薨。又弟王子兒<翹岐>。及其母妹女子四人。內佐平<岐味>。有高名之人冊餘被放於嶋。
이 기록은 7세기 중반 무왕-의자왕 교체기에 발생한 내란과 여기에서 패한 천지 집단의 왜국 망명을 기록한 것이다. 이들에 의하여 대화개신이라는 난이 발생하여 소아씨 일족이 물러나고 이들이 왜국의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한다. 김춘추가 왜국을 방문하는 것도 이 때다. 이들은 백제가 멸망하자 구원군을 파견하고, 구원이 실패하자 일본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만든다. 일본인들에게 물어보면 아마 이 기록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정도의 후보가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요즘에는 생각이 바뀌고 있다. 요즘에 내가 생각하는 일본서기에서 가장 중요한 기록은 다음이다.
[후보5] 응신 39년(407년)조: 진왕국가 지속기록
応神天皇 三九年 二月。百濟直支王。遣其妹<新齊都媛>以令任。爰<新齊都媛>率七婦女而來歸焉。
한반도의 진왕국가가 왜국으로 피신했어도 소국제에 의한 진왕국가를 유지하려면 강력한 소국 왕실의 여인으로 왕후를 세우고 자립위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진왕집단이 이사갔어도 진왕국가를 유지하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왕국가를 왜국에서 계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한 것이, 영락 17년에 고구려군에게 마지막 타격을 입고 한반도의 삼한체제가 붕괴되자, 신제도원 공주를 비롯한 백제 왕실의 여인들이 왜국에 건너간 응신 39년조였다. 즉, 이들이 건너가서 인덕에서 윤공에 이르는 5세기 전반의 왜국 왕후를 공급한 응신 39년조가 있어서 왜국에서도 진왕국가를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왕실의 여인들이 더 이상 오지 않자 5세기 중반에 왜국 왕이 자립위왕을 못하고 왕세자(왜 5왕 중 興)를 칭한 것이다. 그러자 개로왕이 곤지에게 왕실의 여인을 주어 윤공(왜왕 제)의 양자로 집어넣어 진왕(왜왕)의 왕통을 잇게 한다. 그리고 자립위왕하지 못하고 퇴위한 흥(시변황자)의 재위기간 5년은 자립위왕 한 武(웅략=곤지)의 재위기간에 포함되게 되니 이것이 진왕제의 왕력기록방식이다. 만일 3-4세기 백제 진왕력이 발견된다면 틀림없이 5세기 일본서기의 기록양식과 비슷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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