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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제21대 웅략천황

백제사 조회 수 203 추천 수 0 2017.10.06 07:36:49
一道安士 *.3.199.170
455년
*백제본기 비유왕 29년, 가을 9월, 흑룡이 나타났다가 잠시 후에 구름과 안개가 끼여 캄캄해지면서 날아갔다. 왕이 죽었다.
*신라본기 눌지마립간 39년, 겨울 10월, 고구려가 백제를 침범하므로 왕이 군사를 보내 구원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비유왕조를 보면 29년이 몰년인데 한강에 흑룡이 출현하고 죽는다. 이는 큰 내란이 벌어졌다는 뜻으로 비유왕을 이은 개로왕이 이후 북위에 보낸 국서에도 내란상황이 나온다. 선왕인 비유왕의 유골을 찾아 무덤도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를 비난하는 것으로 보아 비유왕 말년의 내란을 사주한 세력이 고구려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유왕-개로왕의 왕권교체가 고구려의 공격과 관련이 있음은 신라본기로도 확인이 가능하다. 비유왕이 죽고 개로왕이 즉위한 455년에 신라 눌지 마립간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백제를 구원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곤지의 유전학적 아버지와 형인 비유왕과 개로왕은 모두 455년과 475년에 고구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다.

내란이 진압되고 내란을 일으킨 세력은 고구려로 도망쳤다고 보이는데, 이후 장수왕이 내려와 개로왕을 죽일 때 고구려로 도망친 백제 장군들이 선봉에 섰기 때문이다. 즉, 이들이야말로 고구려의 사주를 받아 비유왕을 죽인 사람들이다. 이들은 한성백제의 구 백제계 인물들로서, 해씨에서 5세기 당시 왜국 왕성인 부여씨로 왕권이 넘어가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개로왕은 모두 21년을 재위했는데 처음 14년이 기록공백이다. 즉 혼란기였다는 뜻이다. 그런데 다행히 이 기록 공백기인 개로왕 3년(457)에 개로왕이 중국 남조국가인 유송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존재한다. 개로왕이 백제왕의 책봉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458년에 즉위 직후 공을 세운 장군들을 후왕으로 책봉하여 달라는 것인데, 이 공이란 내란을 진압하고 자신을 왕으로 세운 것이다. 

이 국서에 공을 세운 여러 명의 장군들이 나오는데 곤지는 정로장군 좌현왕으로 서열 2위의 책봉을 받는다. 서열 1위는 관군장군 우현왕 여기다. 그런데 여곤은 여기를 제끼고 왜국 최고의 통치자가 된 것이다. 

http://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BfRN&fldid=4ulU&datanum=197&q=%C1%C2%C7%F6&_referer=V7kfJwkeLEGMZxGlgqZEmZmpEDTL3UHLgKrMu1BeDfc0

당시 일본서기를 보면 457년은 웅략 원년이다. 456년에 왜국에 내란이 벌어져 대박뢰황자(훗날의 웅략천황)가 왜국의 대세력가들을 모두 죽이고 즉위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록이 이상하다. 왕이 되었으면 왕권을 행사해야 하는데 왕권은 웅략 6년인 462년부터 행사한다는 것이다. 1, 2년도 아니고 5년이나 지난 다음이다. 통상 권력이란 집권 초기가 가장 강력한데 말이다. 이것은 일본학계의 오랜 고민이기도 하였다.

일본학계는 송서에 나오는 왜5왕들 중에 왕세자 興을 20대 안강천황에, 武를 21대 웅략천황에 비정하고 있다. 하지만 고민이 있다.
 
첫 번째 고민은 송서를 보면 흥과 무의 교체는 461~462년에 이루어졌는데, 일본서기를 보면 456~457년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1~2년 같으면 일본서기 연도가 틀려서 그러려니 할 수 있으나 5년의 차이가 난다. (웅략 이후는 연대가 1~2년 오차로 잘 맞아들어간다.) 두 번째 고민은 다른 왜왕들은 다 왕인데 왜 하필 흥만 왕이 아니고 왕세자냐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아는 정도의 객관적 사항들이고 지금부터가 내 설명이다.
 
참고로 흥과 무를 형제관계라 한 것은 권력의 수평교체라는 뜻이다. 찬과 진도 형제관계라 하였는데 이것도 수평교체라는 뜻이다. 반면에 제와 무는 부자관계라 하였는데 이는 수직계승이라는 뜻이다. 웅략이 윤공의 5번째 아들이라는 것은 다섯번째로 왕력이 입적되었다는 뜻이다. 인덕은 응신의 네번째 아들인데 마찬가지다, 인덕은 응신과 동년배이거나 오히려 나이가 더 많다고 하지만 왕력기준을 따르면 문제가 안 된다.
 
일본서기는 웅략이 456년에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즉위했다고 하는데 왕권행사는 457년이 아니고 5년이 지난 462년부터다. 462년 4월에 오국 사신들을 접대하는 것이 처음인데, 오국은 절강성이나 복건성 일대로 추정되므로 왕복에 4개월 정도 걸린다. 이는 즉위 축하사절로 보아야 하므로 웅략의 즉위는 461년 말이다.
 
즉 웅략의 앞 5년은 웅략이 아니라 시변황자가 왕이었다는 뜻이다. 왜 하필 시변황자냐면 (1)그가 안강이 후계자로 지명한 사람이며, (2) 최대 세력이었던 시변세력이 다 죽고 내전이 끝났기 때문이다. 

웅략이 왜국 지배층을 456년 8월부터 죽이기 시작하였다는데, 실제로는 461년 8월부터 죽이기 시작하여, 10월에 시변황자를 죽이고, 11월에 즉위한 것이다. 웅략 1년부터 5년은 시변황자의 1년부터 5년이다. 즉 웅략의 왜국 지배층에 대한 숙청은 곤지가 왜국에 들어온 다음 달부터 시작되었다. 참고로 이미 수십년전 일본에서 곤지가 왜국에 들어온 다음해인 462년에 왜국 통치자가 흥에서 무로 바뀐다 하여, 무가 곤지라는 학설이 나왔었다. 

이 부근의 일본서기 기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서기 기록순서
 
*456년, 안강 3년(말년) 8월, 미륜왕이 안강천황을 죽임. 8월 대박뢰황자가 팔조백언황자를 베어 죽임. 미륜왕과 흑언황자를 불태워 죽임. 10월, 시변압반황자를 활로 쏘아 죽이고 그 일족을 모두 죽임. 11월, 대박뢰뢰황자가 웅략천황으로 즉위함.
*457년, 웅략 원년, 3월, 황후를 세움.
*458년, 웅략 2년, 왕실 여인들의 이야기
*459년, 웅략 3년, 왕실 여인들의 이야기
*460년, 웅략 4년, 왕실 여인들의 이야기
*461년, 웅략 5년, 왕실 여인들의 이야기, <7월, 곤지 일행이 왜국의 수도에 입성>
*462년, 웅략 6년, 4월 오국 사신을 접대함 - 최초의 왕권 행사.
 
실제 사건 순서
 
*456년, 안강 3년(말년) 8월, 미륜왕이 안강천황을 죽임.
*457년, 시변원년
*458년, 시변 2년, 왕실 여인들의 이야기
*459년, 시변 3년, 왕실 여인들의 이야기
*460년, 시변 4년, 왕실 여인들의 이야기
*461년, 시변 5년, 왕실 여인들의 이야기, <7월, 곤지 일행이 왜국의 수도에 입성>, 8월 대박뢰황자가 팔조백언황자를 베어 죽임. 미륜왕과 흑언황자를 불태워 죽임. 10월, 시변압반황자를 활로 쏘아 죽이고 그 일족을 모두 죽임. 11월, 대박뢰뢰황자가 웅략천황으로 즉위함.
*462년, 웅략 6년, 실제 웅략 원년, 3월, 황후를 세움. 4월 오국 사신을 접대함 - 최초의 왕권 행사.
 
그러면 문제는 왜 일본서기는 시변황자에게 천황위를 주어 안강과 웅략 사이에 배치하지 않고, 시변의 재위기간 5년을 삭제한 후에 웅략의 재위기간을 연장하여 포함시켜버렸느냐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시변황자(흥)가 왕이 아니라 왕세자 신분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배경설명은 삼국지와 후한서의 진왕 기록에 나온다. 진왕은 즉위해도 공립되지 못하면 대외적으로 왕세자를 칭해야 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 3루왕(다루왕-기루왕-개루왕) 시대를 보면 더 자세히 나온다. 공립이란 왕후를 세우는 것을 말한다. 왕후를 세우면 천황위를 받는 것이고 못 세우면 못 받는 것이다. 세우더라도 왕비 신분이 '후'이면 문제가 없으나 '비'나 '부인'이면 왕권이 약해져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이를 보완하고자 책봉이 필요한 것이다.

5세기 일본서기를 보면 '후'를 세운 응신, 인덕, 윤공은 재위기간을 대폭 늘려주었으나, '비'나 '부인'을 세운 이중이나 반정은 재위기간을 전혀 늘여주지 않았다. 또 천황시호마저도 나쁜 글자를 주어 차별대우하였다. 웅략은 백제 왕실의 여인을 데려올 수 있음으로해서 '후'를 세울 수 있었다. 진왕은 가장 큰 소국 왕실의 여인을 데려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왕제인데 결국 5세기 왜국의 기원 문제로 귀결된다.(더 이상의 설명은 '삼한사의 재조명2'를 볼 것) 
 
이상으로 본 바와 같이 <일본서기 = 송서 = 무령왕릉지석>이 하나로 일치한다. 

[사족] 과거 정치사회사를 하시는 분이 503년에 양나라 무제가 옛 기록들을 보고 주변국 왕들을 일제히 재 책봉한 것을 가지고 왜왕 무가 503년에도 양나라에 사신을 보냈다거나, 462년의 왜왕 무가 당시 1살이던 무령왕이라거나 하여 웃음거리가 된 일이 있는데, 이는 사서를 보는 기본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방송에 나왔다고 하여 권위가 있는 줄 아는 사람도 있는데 방송에 나오는 것은 담당 PD가 결정하는 일일 뿐이다.

일본서기를 보면 웅략은 권력을 잡을 때 내란이 벌어지고 죽을 때 또 다시 내란이 벌어진다. 한마디로 힘에 의한 철권통치였다는 뜻이다. 그의 말년 무렵 일본서기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일본서기 웅략천황 후반
 
*웅략 20년(475년); 겨울에 고구려왕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쳐 없앴다. 백제 왕족이 모두 죽었다.
 
*웅략 21년(476년) 봄 3월, 천황이 백제가 멸망했다는 것을 듣고 구마나리(웅진)를 문주왕에게 주어 백제를 다시 세우게 하였다.
 
*웅략 22년(477년) 봄 정월, (다섯 왕자들 중 제3자인) 백발황자를 황태자로 하였다. 가을 7월, 큰 거북이가 갑자기 변하여 여자가 되었다. ... 봉래산(사람이 죽으면 간다는 이상향)에 가서 두루 신선들을 만났다. - 괴기 기록
                                                        <<478년이 없음>> 
*웅략 23년(478년이 아니라 479년) 여름 4월, 백제 문근왕이 죽었다. 곤지왕의 다섯 아들 중 말다왕이 총명하므로 백제왕으로 삼았다. 축자국 군사 5백인으로 호송하게 하였다. 동성왕이 되었다. 가을 7월 천황이 병이 나서 국사를 황태자에게 맡겼다. 가을 8월, 천황이 죽었다. 이후 큰 내란이 일어났다. 겨울 10월, 백발황자가 국새를 받았다.
 
*청령 원년(479년이 아니라 480년) 봄 정월, 내란을 진압하고 즉위했다. 겨울 10월, 웅략천황을 장사지냈다.
 
웅략 21년에 문주를 도와 백제를 다시 세우게 했다는 것은 삼국사기에도 나온다. 문주의 천도를 도운 사람이 목협만치와 조미걸취인데, 목협만치가 당시 일본서기에 나오는 왜국의 원로대신인 소아만지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목협만치는 404년생으로 당시 71세였다. 그런데 소위 역사를 전공했다는 사람이 ‘목협만치는 370년생으로 475년이면 100살도 넘었는데 어떻게 천도를 돕지?’ 하는 것을 보았다. 이 사람은 역사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해 사서를 보는 법을 배우지 못했거나, 아니면 역사 선생을 잘 못 만났다. 

백제의 수도인 한성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자 웅략은 목협만치와 조미걸취를 지휘관으로 하는 구원군을 급히 파견했는데 이미 늦었다. 가보니 이미 함락되어 문주왕의 웅진 천도를 돕게 된다. 웅략은 한시가 급하여 백제에서 가장 가까운 구주 지역의 군대를 파견했을 것이다.
 
[문제] 5세기의 제4사분기(475~499)에 영산강유역에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묘제인 전방후원분이 나타난다. 이 전방후원분은 주로는 일본의 어느 지역 양식인가?
 
이 문제는 누구나 풀 수 있을 것이다. 답은 구주 지역 양식이다.
 
[문제] 5세기에 왜국이 신라의 공격을 받아 국가적 위기에 빠지가 백제가 구원한 적이 있다. 언제인가?

이 문제는 고고학을 알아야 한다. 사료와 고고학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삼한사의 재조명(1)에 답이 있다. 삼국사기의 백제와 신라의 전쟁기록을 연도순으로 모두 뽑아보면 자연스럽게 답이 보인다.

언제 설명할 기회가 오겠지만 문주왕은 신라 출신이다. 비유왕이 신라와 결혼할 때 왕비를 따라온 신라 지배층 출신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신라왕통인 문주-삼근에게 부여씨를 주고 백제왕력에 포함시킨 것이다.
 
천황이 몸이 아파 국정을 못 본다고 하였는데 이는 이미 죽은 것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웅략이 죽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반대 세력이 들고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천황이 죽었다는 479년 8월은 죽음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어서 공표한 것이다.
 
그러면 웅략은 언제 죽었을까? 477년인 22년조를 보면 황태자를 세우는데 이는 어떤 이유로 왜국을 더 이상 다스릴 수 없다는 뜻이다. 더욱이 7월조를 보면 괴기 기사가 있는데 일본서기는 왕 같은 중요한 인물이 죽었을 때 괴기 기사로 표현한다.(삼국사기도 동일함) 즉 웅략은 477년 7월에 죽은 것이다.
 
477년 7월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곤지가 죽었다고 한 때다. 양 사서가 정확히 일치한다. 일본서기는 <천황崩>이고 삼국사기는 <곤지卒>인데 이는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쓴 것이기 때문이다.
 
청령 원년의 장사 지낸 기록과 웅략 23년의 국새 기록은 둘 다 10월인데 본래 장사 지낼 때 국새를 받는다. 이는 479년이 맞는다고 본다. 그 이유는 479년으로 적으면 죽자마자 장사지낸 것이 되어 모순이 되므로 달은 그냥 두고 해만 1년 뒤에 기록한 것이다. 아니면 청령의 즉위년이 479년인 것이다. 일본서기를 보면 청령이후 왜국은 한반도에 큰 소리를 치지 못하는데 이는 당연한 것이다. 웅략 사후 동성왕이 왜국에서 벡제로 천도한 것이다. 이후 왜국은 백제의 부속도서가 된다.
 
일본서기는 웅략이 477년 7월에 백제로 건너갔다가 죽자 그의 죽음을 숨겼다. 웅략이 죽은 477년과 장사 지낸 479년 사이의 478년 기록이 없다. 일본서기는 478년의 기록을 삭제한 것이다. 웅략 사후 왕실 내외에 큰 내란이 발생하는데 외부는 과거 웅략이 죽인 왜국의 지배층들의 후계 세력이다. 

웅략 다음인 백발황자가 청령천황으로 즉위했으나 5년만에 죽고, 왕권은 시변황자 후계 세력에게 돌아간다. 웅략의 아들들은 이것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이를 다시 웅략계가 가져오는 것은 무령왕 즉위 후 계체천황이 왜국에 파견되면서부터다.
 
웅략의 죽음을 숨긴 기간인 478년(송서 순제 昇明 2년)에 송나라에 왜왕 무의 국서가 도착한다. 무의 국서는 비통함으로 가득 차 있어 무의 신변에 어떤 안 좋은 일이 발생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고구려를 욕하고 아버지와 형이 죽었다고 하고 있다. 5세기 중후반에 고구려와 관련하여 아버지와 형이 죽은 지배층 인물은 곤지 뿐이다.

일본서기는 웅략을 윤공의 아들로 입적하였는데 이는 호적이 그렇다는 것이다. 윤공은 왜왕 제다. 따라서 웅략은 아버지가 비유왕과 윤공천황의 두 명이다. 

5세기의 일본서기가 중요한 이유는 지금은 사라진, 비류에서 시작하는 또 다른 백제인, 4세기 이전 목지국 진왕력을 짐작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일본서기를 보면 8세기에 일본서기를 쓸 때 1대 진왕인 비류부터 14대 진왕인 여휘까지의 한반도에서의 모든 진왕의 기록이 다 있었다. 그 근거를 나중에 설명할 생각이다.


댓글 '1'

새나라

2017.10.18 11:11:04
*.126.66.6

기대됩니다.
또 다른 백제의 역사가 밝혀지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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