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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로왕조의 공백기

백제사 조회 수 4528 추천 수 256 2004.02.21 10:06:25
一道安士 *.232.248.48
1. 개요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개로왕조는 원년이 아니라 15년부터 시작한다.

개로 14년; 천체관측(일식)
개로 15년(469); 8월 고구려의 남쪽 변경 침공
개로 18년(472); 위(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공격에 동참할 것을 요청함.
개로 21년(475); 9월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되고 왕이 죽음

개로왕조는 기록의 분량이 아주 많지만 21년 재위기간 중 단 4년에 한한다. 그것도 천체기록을 제외하면 기록이 존재하는 해는 고구려와 관련된 것으로서 단 3년뿐이다. 하지만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14년 공백동안 고구려와의 접촉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고구려와의 접촉은 삼국사기에 모두 나와야 한다.

일반적으로 국가의 창업자와 멸망자는 기록이 상세하고 길다. 개로왕조가 긴 것은 북위에 보낸 국서 때문인데 어찌 보면 이 역시 한성백제의 멸망과 관련이 있으므로 그는 멸망을 지켜본 군주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한성백제의 멸망이 아니고 그의 즉위 후 공백기 14년이다. 왜 처음 14년이 기록의 공백일까? 14년 동안 백제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우리는 그 14년 동안 생긴 일을 삼국사기와 중국사서와 일본서기를 통해서 추론해보고자 한다. 만일 모든 사료가 연결되는 이야기를 한다면 이는 14년의 공백의 추론에 대한 신빙성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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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삼국사기의 기록

우선 삼국사기가 14년 공백에 대하여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보자. 공백 앞뒤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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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 29년(말년); 9월, 흑룡이 나타났다가 잠시 후에 구름과 안개가 끼어 캄캄해지며 날아갔다. 왕이 죽었다.

(14년 공백)

개로 18년; 위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고 왕이 표문을 보내 말하기를 ... 제가 임명한 관군장군 부마도위 불사훠 장사 여례와 용양장군 대방태수 사마 장무 등을 보내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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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들이 높은 지위를 받는 것은 신권을 강화시키고 왕권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큰 것으로 어느 왕도 내켜하지 않는 일이다. 이로부터 14년 공백기간에 개로왕은 제대로 왕권을 행사할 수 없었지 않은가 추측한다. 특히 비유왕이 비명에 간 것(흑룡이 날고 죽은 것)으로 보아 14년 공백기간 중에 백제에 발생했을 사건은 권력의 공백으로 인한 혼란이다.

비유왕은 한성백제의 중시조에 해당한다. 구이신왕 이후 한성백제의 왕권이 부여씨에게 넘어갔는데 부여씨는 본래 한성백제계가 아니고 진왕계열이었다.

비유왕은 탁월한 지도력으로 고구려와의 전쟁 상처를 씻고 새로운 백제를 건국하였으나 그가 죽을 무렵이 되자 후계구도를 두고 내란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마치 고구려에서 동명왕 말년에 발생한 왕자들 사이의 내란이나, 신라에서 혁거세 말년에 발생한 왕자들 사이의 내란이나, 고려에서 태조 사후 발생한 왕자들 사이의 내란이나, 조선에서 태조 말년에 발생한 왕자들 사이의 내란이나, ... 다 건국자가 겪는 비슷한 범주의 사건이다.

특히 비유왕은 이전의 韓 영토를 형식적으로나마 모두 흡수하였기에 그 내부에서 오는 세력다툼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내부적으로 안정되지 못하면 외부적으로도 힘을 쓸 수 없다. 이로부터 비유왕은 왜국을 비롯한 요서에 힘을 쓰지 못했을 것이란 것은 추정이 가능하다. 비유왕이 이전의 한 영토를 흡수하면서 그곳에 세력가들을 어떻게 흡수하느냐의 문제가 비유왕 사후 폭발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잠시 비유왕의 출생연도를 생몰이 확실한 무령왕으로부터 추정해보자. 우선 이전의 근초고왕 계열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근초고왕 : 300년 경 출생, 46세-75세 재위
2. 근구수왕 : 322년 경 출생, 53세-62세 재위
3. 진사왕 : 345년 경 출생, 40세-47세 재위 * 침류왕은 이곳에 포함됨
4. 아신왕 : 367년 경 출생, 25세-38세 재위
5. 전지왕 : 390년 경 출생, 15세-30세 재위
6. 구이신왕 : 412년 경 출생, 8세-15세 재위

비유왕 계열은 무령왕릉 지석으로 기준을 삼고 또 일본서기를 보면 웅략(477년에 죽은 개로왕의 친동생인 곤지)이 62세에 죽었다고 하는데 이를 받아들이면 대충 다음과 같다. 문주와 삼근은 부여씨 계열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제외한다. 동성왕은 곤지왕이 젊었을 때 낳은 아들이고, 무령왕은 개로왕이 말년에 후궁으로부터 낳은 아들이다.

1. 비유왕 ; 390년 경 출생, 35세-65세 재위
2. 개로왕 ; 415년 경 출생, 40세-60세 재위 * 곤지는 이곳에 준함
3. 동성왕 ; 445년 경 출생, 35세-55세 재위
4. 무령왕 ; 461 출생,  41세-63세 재위

삼국사기는 비유왕을 전지왕의 서자라 하였으나 실제로는 동년배이다. 백제본기가 전혀 다른 왕통을 연결시키다 보니 그렇게 된 것뿐이다.

다시 14년 공백기로 돌아가면 내란으로 인한 혼란기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만일 이를 다른 사서가 기록하였다면 누가 언제 백제의 왕이 되었는지에 대한 혼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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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백제에 부여씨 출현

한성백제에 부여씨가 출현하는 부분에 대하여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백제의 건국을 요약한 건국서문에 나옵니다. 그리고 영락 17년 2월에 나옵니다.

<건국서문에서>
... 그 후(비류의 백제가 망한 후) 위례로 올 때 많은 백성들이 따랐다 하여 국호를 (십제에서)백제로 개칭하였다. 그의 조상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부여로 성을 삼았다. ...

즉, 비류의 백제는 부여씨가 등장하기 직전에 멸망하였습니다. 다음은 제가 오래 전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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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에 부여씨 출현

5세기 초에 백제에 나타나는 가장 큰 변화는 부여씨의 최초 출현이다. 영락 17년 2월에 한성백제에 새로운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는데 이 인사의 핵심이 부여씨의 출현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세력이 정계에 진출하면 세력을 키워 정권을 장악할 때까지 약 1-2세대가 걸리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백제의 부여씨는 나타나자마자 당시 수상격인 내신좌평에 올라 한성백제의 권력을 장악하고 한성백제를 접수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상좌평이란 최고 직책을 신설하여 餘信이 이에 취임한다.

전지왕은 즉위한 바로 다음 해(406) 동진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한다. 침류왕 이후(384) 무려 22년 만에 행하는 대 중국왕조 외교이다. 그러나 백제왕이라는 책봉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전지왕 12년(416)에 동진에서 사신이 와서 받는다. 그 이유가 삼국사기에 있다.

․전지왕 3년(407); 2월, 서제 餘信을 내신좌평으로 삼고, 해수를 내법좌평으로, 해구를 병관좌평으로 삼았는데 모두 왕의 친척이었다.

․전지왕 4년(408); 1월, 餘信을 승진시켜 상좌평으로 삼고 군국의 정사를 위촉하였다.

누가 백제의 실제 왕인지가 명확해졌다. 전지왕은 명목상의 왕이고 이때부터 여신이 실권자이다. 전지왕 3년 이후의 업적들은 실제로는 여신을 필두로 한 부여씨의 것이다. 여신은 구이신왕 대의 혼란기를 마감하고 비유왕을 옹립한 것이다. 백제의 권력은 부여씨가 출현하자마자 그들의 손으로 넘어갔는데 이는 그들이 백제에 출현하기 전부터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미 4세기의 중국사서에 부여씨가 나온다.

백제 제31대 의자왕의 태자 부여융의 묘비가 현재 중국의 河南省에 있는데 거기에는 부여씨의 출신을 다음처럼 기록하고 있다.

“公諱隆 字隆 百濟 辰朝人也 ...” - 부여융 묘비

즉, 부여씨는 한성백제계열이 아니라 진왕계열이라는 뜻이다. 부여씨가 백제에 등장한 시기는 영락 17년 2월이다. 일본서기에 신제도원 공주 일행이 왜국으로 건너가던 시기도 영락 17년 2월이다. 따라서 우리는 영락 17년에 고구려 보기 5만 대군이 작전하던 달도 그 직전인  1월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광개토왕은 영락 16년 말 겨울에 강이 어는 것을 기다려 보병과 기병 5만 대군을 남하시킨 것이다. 그리고 다음해 1월, 비문왜의 마지막 거점이던 변진한 지역을 초토화한 것이다.

한반도 남부에는 강이 많아 대규모 원정군에게 강을 건너는 것은 고된 일이다. 강은 기마군단 이동의 장벽이 되어 기동력을 중요시하는 군대가 시간을 지체할 우려가 있다. 342년에 전연의 모용황군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도 강물이 어는 그해 말 겨울이었다. 영락 6년에는 추수기인 가을에 수군으로 적의 후방에 침투하여 잔국을 토벌한 후, 강이 어는 겨울에 육로로 철군하였다. 반면에 영락 17년에는 육로로 들어왔기 때문에 처음부터 강이 어는 406~407년 겨울을 공격시점으로 택한 것이다.

영락 14년 가을에 고구려는 대방계를 공격당하고 왜국에 보낸 사신이(9월) 다시 고구려에 돌아와 왜국이 더 이상 한반도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보고한 것이 10월일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는 그 해 겨울(404~405년) 바로 공격하지 않고 2년 후 겨울(406~407년)에 공격한다. 이미 2차례의 대군을 보내 韓과 전쟁을 치렀고, 후연과의 전선에도 전투가 계속되는데 다시 대군을 소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영락 6년의 잔국토벌 후 다시 보기 5만 대군을 투입하여 잔국피난민을 격파하는데도 4년이 걸렸다. 고구려는 보기 5만 대군을 준비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영락 17년, 韓의 잔존세력이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철갑옷으로 중무장한 수만 대군을 내세워 고구려 보기 5만 대군과 마지막 결전을 벌였으나, 패하여 더 이상 국가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한성백제와 결합한 것이 영락 17년 2월의 부여씨의 등장이다. 餘信으로 대표되는 부여씨는 영락 17년 비문왜의 지휘부였을 것이다. 중기왜 역시 한의 변진한의 일부로서 고구려군과의 전투에 참전하였으나 패하여 임나 10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것이다. 이후 중기왜 휘하에 있던 가야제국이 독립해 나가고, 그 결과 중기왜는 약해져 후기왜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영락 17년 2월은 잔국토벌 후 왜국으로 가지 않고 한반도에 남아있던 비문왜의 중추세력이 영락 17년의 전쟁을 계기로 한성백제의 정권을 장악한 시점이다. 이제 왜 이해 2월에 훗날(418)의 인덕의 황후가 되는 신제도원 공주가 왜국에 갔는지를 알 수 있다. 부여씨가 백제조정에 전면적으로 대두하여 왕권을 위협하자 전지왕은 왜국의 힘을 빌려 부여씨를 견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혹시 영락 17년에도 수군을 동원하지 않앗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영락 14년조를 보듯이 동아시아 해상권은 백제(왜)가 장악하고 있었다. 영락 6년의 수군을 이용한 기습은 아산만으로 고구려군이 출발한 것으로 추정되는 황해도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었고 또 운이 좋았다. 반면에 영락 16-17년에 수군으로 서해안을 돌아 남해안에 상륙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다. 또 수군을 동원한다면 구태여 강이 어는 겨울을 택할 필요가 없다(영락 6년에는 추수기인 가을이었다). 영락 17년의 결전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대로 그해 1월이다.

영락 17년 이후 백제의 정권을 장악한 부여씨는 한성백제사 최초로 백제왕이라는 책봉을 받는다.

․전지왕 11년(414); 동진의 안제가 사신을 보내어 왕을 책명 하여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장군 백제왕'이라 하였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晋 義熙 十二年(416), 以百濟王<餘映>爲<使持節都督 百濟諸軍事 鎭東將軍 百濟王> - 南史 백제전.  

이제 한성백제왕이 백제왕이라는 뜻이다. 이리하여 韓의 수많은 소국 중에서 온조왕에서 전지왕에 이르는 한성백제 왕통이 선택되어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왕력을 구성하게 되었다. 이 기록은 중국사서에도 똑 같이 나오는데 차이가 하나 있다. 중국사서에 전지왕의 이름이 餘映 혹은 餘腆이라고 나오는데 비하여 삼국사기에는 이름만 있고 성씨가 없다는 것이다. 만일 영락 17년 이전에 전지왕이 중국왕조에 사신을 보냈다면 餘映이 아니고 解映이었을 것이다.

이후 백제와 왜가 각각 도독제군사를 내세워 대 중국왕조 외교전에 나서는데 사실 그들은 본래 같은 세력이었다. 4말5초에 고구려와 대결하다 패한 비문왜의 한 그룹은 왜국을 정복하고, 다른 한 그룹은 한성백제를 접수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건너간 세력과 건너가지 않은 세력 사이에 주도권 다툼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5세기 후반 곤지 이후 건너가지 않은 세력이 건너간 세력을 통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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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송서의 기록

455년에 비유왕이 죽음

개로 14년; 천체관측(일식)
개로 15년(469); 8월 고구려의 남쪽 변경 침공
개로 18년(472); 위(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공격에 동참할 것을 요청함.
개로 21년(475); 9월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되고 왕이 죽음

송 '世祖 大明' 2년(458년), '경(백제 개로왕)'이 사신을 보내어, 표를 올려 말하길, "신하의 나라는 대대로, 한쪽을 얻어, 은혜를 받았습니다. 문무가 함께 뛰어나, 대대로 알현하여, 작위를 받으니, 행관군장군 우현왕 '여기'등 11명은 충성스럽고, 근면하여 벼슬을 함이 마땅하니, 엎드려 원하는데, 불쌍히 여기어 청을 받아들여, 제수하여 주십시오." 이에 행(1)관군장군 우현왕 '여기'를 관군장군에 삼고, 행(2)정노장군 좌현왕 '여곤', 행(3)정노장군 '여훈'을 정노장군, 행(4)보국장군 '여도', (5)'여예'를 보국장군, 행(6)용양장군 '목금', (7)'여작'을 용양장군, 행(8)영삭장군 '여류', (9)'미귀'를 영삭장군, 행(10)건무장군 '우서', (11)'여루'를 건무장군에 삼았다. - 송서 백제전

송서 백제전을 통하여 백제의 내전이 455년에 시작하여 458년에 종식되었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정노장군 좌현왕 곤지의 왜국 파견은 반드시 내전이 종식된 이후여야 한다. 하필 곤지를 왜국에 파견한 이유는 그가 왕의 동생이란 것 외에도 정치적인 것이 고려된 듯 하다. 일본서기를 보면 그는 아주 잔인하다. 미루어 짐작하건데 개로왕의 옹립에는 공을 세웠으나 그 과정에서 다른 여러 제 세력으로부터 거부감을 초래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한마디로 국가통합을 위해서는 개로왕에게 부담되는 존재가 아니었는가 싶다. 개로왕은 그리고도 거의 10년 동안 제대로 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백제왕의 요청에 대하여 송나라 황제는 단 한번도 거절한 적이 없다. 비유가 조금 뭐 한데 과거 12.12 이후 전두환 장군의 인사 요청에 대하여 최규하 대통령이 단 한번도 거절한 적이 없다. 백제왕과 송황제 사이에 백제관료들의 임명에 대하여 어느 쪽에 실권이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보면 이상한 것은 개로왕이 그냥 임명하면 되지 왜 하필 제3자의 보장을 요구하느냐이다.

문제는 개로왕이 한의 영역을 인수하면서 발생하였다고 생각한다. 비유왕 사후 서로 자기가 실권자가 되겠다고 나서도 승자가 결정되지 않자(마치 서로 쇼군이 되겠다고 싸우던 훗날 전국시대의 일본과 유사하다) 그래도 비유왕의 장자이던 개로왕이 추대 형식으로 왕위에 옹립된 것이다. 그리고 대신에 추대한 인물들이 자신들의 직위에 대한 보장을 요구한 것이다.

만일 개로왕이 충분한 권력이 있었다면 왕권으로 밀어버리면 된다. 신라는 그랬다. 하지만 백제라는 나라는 통치구조가 담로제(소국제)인 지방분권제이다보니 그게 안 되었던 것이다. 개로왕이 제대로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에 대하여 반격하는 즉위 15년만인 469년이다.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 '부마도위 불사(전주로 추정)후 여례'라 하여 전주지역의 인물이 나오는 것을 보아, 개로왕대에 금강유역까지는 어느 정도 포섭에 성공한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백제본기에 확실한 금강유역기사가 (온조왕대 건국기사를 제외하고) 처음 나오는 것은 475년의 웅진천도이다. 이때 문주왕이 신라에서 데려온 1만 기병대로 금강유역을 장악한 것이다. 따라서 금강유역이 한성백제의 직접통치에 들어가는 것은 475년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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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일본서기의 기록

455년에 비유왕이 붕하고 14년 동안 계속된 개로왕조의 공백에 대하여 일본서기가 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1) 웅략 2년; 가을 7월조에 “백제신찬이 말하기를 己巳年에 개로왕이 즉위하였다고 한다.”

5세기의 기사년은 429년이 있는데 이 해는 비유왕 3년으로 개로왕과는 무관하다. 60년 후인 489년도 기사년이지만 이는 동성왕 시기이므로 가능성이 없다.

일본서기에는 전지왕과 구이신왕을 이어 개로왕이 나오며 그 사이의 비유왕은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비유왕대에 백제와 왜국 사이에 전혀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타당하다. 그런데 비유왕대는 백제와 왜국 사이에 주도권 다툼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본서기는 백제신찬을 인용하여 객관성을 보이려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비유왕의 존재를 삭제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비유왕은 부여씨 후기백제의 건국자이자 백제의 주도권을 가져간 중요한 인물이다.

일본서기를 읽다보면 초고왕-귀수왕-침류왕-진사왕-아화왕-직지왕-구이신왕-개로왕-문주왕-삼근왕-동성왕-무령왕-성왕-.. 으로 이어져 다 나오는데 5세기 초의 비유왕이 없다. 따라서 이 모순을 처리하기 위하여 5세기 초에 백제왕이 비유왕이 아니라 개로왕인 것처럼 하기 위한 서술로 생각된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비유왕이 웅략(곤지)이 아닌 개로왕을 후계자로 선택한데에 대한 일본서기의 반감이다. 곤지는 비유왕 이후 건국에 공이 큰 자신이 왕이 될 것으로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나 비유왕에 의해 선택받지 못하자 군웅이 할거하는 내란의 한 이유가 되었고, 일본서기 웅략조(곤지조)는 이것을 마치 백제인의 뜻인 것처럼 하여  “기사년 개로왕입”이라는 구절로 기록했다고 본다.

(2) 웅략 5년; 여름 4월조는 당시 백제왕인 개로왕을 왕이라 호칭하지 않고 “가수리君”이라 호칭하고 있다. 君은 여러 왕족 중의 한 명이라는 뜻이다. 이는 당시에 개로왕이 백제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당시의 삼국사기 개로왕조가 공백이라는 사실과 상황이 일치한다.

*일본서기를 보면 웅략은 462년부터 왕권을 행사한다. 이는 461년 말에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곤지 회상 참조,  또는 홍익대 고대사학회 논문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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