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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 초 공손씨의 대방군 설치와 민족 대 이동

백제사 조회 수 341 추천 수 0 2015.12.21 20:05:50
一道安士 *.42.237.224

대충 그려보았습니다. 혹시 이상하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으면 말씀을 주시기 바랍니다.


[지도 설명] 위나라와 공손연은 둘 다 낙랑군과 대방군이고, 삼국사기는 요동은 낙랑군과 대방군, 한반도는 낙랑국과 대방국입니다



3세기 평양의 낙랑은 고구려영토입니다. 고조선 멸망 후 낙랑인들이 이주한 지역입니다. 위나라와의 전쟁 후에 동천왕이 천도한 곳이기도 합니다. 후방으로 천도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동천왕 21년이니 247년입니다.


동천왕 20년(246)의 위나라와의 전쟁기록은 동천왕 19년(245) 기록이 잘못 가 있는 것입니다. 백제본기도 1년이 틀렸습니다. 고구려-위 전쟁에 대해서는 신라본기 기록이 정확합니다.(자세한 내용은 제 책을 보시기 바랍니다.)


삼국사기는 위군이 마지막 전투인 옥저전투에서 패하고 낙랑에서 물러갔다(낙랑이퇴)고 하였는데 만일 위나라의 통치지역이면 자신들의 근거지이니 오히려 주둔하지 물러갈 일이 없지요.


3세기 말-4세기 초가 되면 고구려가 황해도 대방지역에 남평양을 건설합니다. 3세기 후반(286)에 고구려가 대방을 치려고 하니 대방이 백제에 구원을 요청하였다는 기록이 맞는 것입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2세기에도 평안도와 황해도는 고구려 영토입니다. 그 유명한 고구려본기의 마한기록입니다.


미천왕이  317년에 요하유역의 현도성을 공격하는데 현도성을 공격하려면 반드시 그 전에 요동반도를 포함한 요동지역을 통과해야 합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가 공격한 장소가 다음 순서입니다.


1) 美川王-12年, 秋八月, 遣將襲取<遼東><西安平>.

2) 美川王-14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3) 美川王-15年,  秋九月, 南侵<帶方郡>.

4) 美川王-16年, 春二月, 攻破<玄菟城>, 殺獲甚衆. 秋八月, 星孛于東北.


(요동)서안평  --> (?)낙랑군  ->  (?)대방군  -> (요서)현도성


고구려 수도인 환도성에서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배열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서안평도 요동이라고 하니 더 먼 낙랑군과 대방군도 요동에 있어야 합리적입니다.

이 기록에 대하여 '평양에서 낙랑유물이 나오므로 평양의 낙랑이다'라고 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그러면 런던에서 로마유물 나오므로 네로가 불태운 로마는 런던인가요? 아니지요. 로마유물은 리비아에서도 나오고 튀니지에서도 나오고 알제리에서도 나옵니다.


고이왕이 공격한 낙랑은 요동의 낙랑입니다. 평양의 낙랑은 고구려 영토인데 고구려를 돕는 입장에서 고구려 영토를 공격한다는 것은 모순이지요. 요서에서 요동쪽으로 공격하니 당연히 낙랑군의 서쪽을 치는 것입니다. 삼국사기는 전체적으로 모순이 없습니다.


위가 공손연을 치러가는 가운데 백제가 있으면 백제부터 쳐야 하지 않는냐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백제는 칠지도에 위나라 연호를 사용하는 등 공손연과 다르게 위나라에 위협자인 세력이 아니었습니다.

공손씨가 낙랑군 남쪽의 황무지에 대방군을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황해도는 북한의 대표적인 곡창지대로 황무지와는 거리가 멉니다. 이에 대하여 '황지란 토지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정치적 공백지라는 것, 즉 자신들의 권력이 통하지 않는 지역이란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라고 한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볼 때는 억지해석입니다.


당시 요동반도는 황지라고 할만 했습니다. 더 중요한 고고학적 증거는 3세기에 한강유역에 출현하는 고구려 초기 돌무지 계단식 고분이 요동남부지역 묘제라는 것입니다. 요동지역 묘제가 북한에는 없고 한반도에서는 오로지 한강유역에만 나옵니다. 고고학계에서 3세기 초 이 고분군의 등장이 BC 1세기 비류와 온조 시기가 아니라 3세기 고이왕의 출현시기와 일치한다고 오래 전에 이야기 했습니다.


[문제] 대방군을 설치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가) 삼국지: 공손강이 설치했다.
(나)  진서:  공손도(탁)가 설치했다.


이 문제는 삼국사기를 보아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제 책을 안 보고 이 문제에 정확히 답변할 수 있으면 한강유역 고구려식 적석총을 이해한 것입니다) 대방군과 대방국의 건국과 소멸 등 3세기 대방사는 모두 삼국사기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거기서 왔기 때문입니다.


제가 요즘에 관심이 있는 것은 공손 연 멸망 후에 발생한 난민들의 행방입니다. 요즘 시리아 사태를 보면 대규모 난민이 발생하여 전 세계로 흩어지고 있습니다.


사마의는 공손연을 멸망시키고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였습니다. 공손연을 정복대상인 외국으로 본 것이지 자기들의 영토에 있는 자국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곤송연에서도 대규모 난민이 발생하는 것이고, 갈 곳은 적국인 위나라와 고구려를 피해 북쪽과 남쪽뿐입니다. 남쪽으로 간 난민은 백제를 만나게 되고, 그러면 삼국사기에 어떤 흔적이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공손연 멸망 후 난민들이 유입한 기록이 있는지 찾아보는 것이지요.


난민이 유입하면 다음과 같은 현상들이 발생합니다.

(1) 난민들을 정착시키고 먹여 살릴 새 농경지가 필요하다.
(2) 만일 난민들이 힘을 가지고 있으면 이들의 지도자를 등용한다.



다음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기록입니다.

* 내해이사금 10년, 春二月 拜<眞忠>爲一伐湌 以參國政


내해이사금 10년(205)에 진충이라는 사람을 일벌찬의 지위를 주어 국정에 참여시켰다는 뜻입니다. 이 기록이 맞습니까? 이 기록의 신빙성 여부를 어떻게 판단합니까?

진충은 고이왕 7년(240)에도 나오는데 동일인물인지 이것만으로는 불확실합니다.

* 고이왕 7년, 遣兵侵<新羅>, 夏四月 拜<眞忠>爲左將 委以內外兵馬事

* 고이왕 14년,  二月, 拜<眞忠>爲右輔, <眞勿>爲左將, 委以兵馬事.


백제의 북쪽은 말갈 접경지역입니다. 그리고 진씨는 백제의 말갈족 집단거주지인 북부 출신입니다. 따라서 백제도 아닌 신라에서 말갈인을 등용했다면 이것은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에 내해이사금 10년 이전에 말갈과 관련된 어떤 기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앞을 봅니다.

*내해이사금 8년(203), 冬十月 <靺鞨>犯境 桃李華 人大疫

내해이사금 10년조 바로 앞의 기록이 203년 겨울 10월에 말갈족이 신라를 침범한 것입니다. 따라서 내해이사금 10년조의 진충을 등용했다는 기사는 논리적으로 합당합니다.


내해이사금 8년조의 말갈기록은 2세기 초 고구려 태조왕이 마한과 손잡고 후한과 요서에서 전쟁할 때 사라진 말갈이 무려 80년 만에 신라와 백제에 나타난 기록입니다. 이후 대규모 말갈기록이 등장하고 백제본기에 이전과 전혀 다른 고이왕조라는 고구려식 정권이 탄생합니다. 이것이 한강변 고구려식 적석총 출현에 대한 삼국사기의 증언이고 공손씨의 대방군 설치기록입니다.


낙랑군 설치 후 5백년이 지난 기록인데 대방군 설치만으로도 이정도의 유민들(백제본기와 신라본기의 3세기 초 말갈)이 발생하였다면 낙랑군 설치로 인한 한반도로의 유이민은 엄청났을 것입니다.


대방군 설치가 한달 만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나 203년부터 시작된 것은 틀림 없습니다. 이때는 공손도 마지막 해로 공손도-공손강의 정권교체기입니다. 공손도 마지막 해에 공손강에 의해 대방군이 설치된 것이니, 대방군 설치자는 공손도로 볼 수도 있고 공손강으로 보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대방군 설치자가 누구냐에 대한 답변은 삼국지와 진서가 둘 다 맞는 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내해이사금조의 진충이 고이왕조의 진충이냐가 문제인데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진충을 동용하기 직전에 신라와 접촉한 기록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고이왕이 신라를 다시 공격한 것은 22년째입니다. 진충이 현직에 있었다고 추정되는 기간에는 신라와의 전투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공손연 멸망 후 난민들이 백제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입니다. 만일 난민들이 정권을 잡으면 기존에 살던 사람들의 토지를 뺏으면 되므로 새로운 토지가 필요 없지만, 그렇지 못하면 먹여 살릴 토지가 필요합니다. 공손연이 말명한 것이 238년(고이왕 5년)입니다. 따라서 이 직후 5년 이내에 혹시 백제에 땅을 새로 개간하거나 한 기록이 있는지 찾아봅니다.

*백제 고이왕 9년(242), 春二月, 命國人, 開稻田於南澤. (백성들로 하여금 남쪽 소택지에 논을 개간하도록 하였다.)


기대한 곳에 기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백제본기 토지개간기록은 온조왕때 새로 이주하여 나타난 기록 외에 이때가 유일합니다. 물론 이것이 공손연 멸망 후 난민 유치기록이라는 것은 단언하기 어렵습니다. 또 다른 보충적인 근거가 필요하고 아직은 여러 가능성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이에 대한 공부가 더 필요합니다.

 



댓글 '1'

syllien

2016.02.04 09:47:44
*.186.147.123

지도가 안나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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