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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광개토왕 비문의 기년 조정 재해석

백제사 조회 수 249 추천 수 0 2016.11.29 08:39:30
9. 광개토왕 비문의 기년 조정 재해석

광개토왕(391-412년) 비문은, 백제와 왜 사이의 화호(和好), 결호(結好), 교친(交親)을 다음과 같이 표현 했다: 

“왜가 신묘년(391년)이래 바다를 건너고, 백잔(백제), 가라(임나), 신라를 쳐 부시고 그들의 신민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호태왕은 병신년(396년)에 몸소 수군을 인솔하여 백잔국을 토벌했다. 고구려 대군은 백잔의 국경을 넘어, 수많은 성을 공격해 빼앗으면서 백잔의 수도로 핍박해갔다. 

그러나 백잔은 항복을 하지 않고 감히 출병하여 싸움을 벌렸다. 광개토태왕이 어찌 이런 광대 같은 도전을 용납할 수 있을 것인가? 
왕은 대노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아리수를 건너, 선두부대를 독려하면서 백잔의 수도를 향해 진격했다. 

백잔 군대는 두려워서, 그들의 소굴로 도망을 갔다. 고구려 군대는 즉시 그들의 왕성을 포위했다. 백잔 (아신) 왕은 빠져나갈 방법이 없게 되자, 남녀 생구 1천명과 세포 1천 필을 헌납하면서, 광개토태왕 면전에 꿇어앉아, 이후로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고 서약을 했다. 
광개토태왕은 아신왕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하고 용서를 해준 뒤, 백잔왕이 후에 얼마나 성심껏 자기가 서약한 말을 지킬 것인지를 주시해 보기로 했다. 광개토태왕은, 이 백잔과의 전투에서, 58개의 성과 7백 개의 촌락을 얻었다. 광개토태왕은 백잔 아신왕의 동생과 대신 등 10여명을 잡아가지고, 출정했던 군사와 함께 왕도로 돌아왔다.”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 

백잔(百殘) 신라(新羅) 구시속민(舊是屬民) 유래조공(由來朝貢) 
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 백잔(百殘)[임(任)][라(羅)][신(新)]라(羅) 이위신민(以爲臣民) 
이(以) 육년병신(六年丙申) 왕궁솔수군(王躬率水軍) 토벌잔국(討伐殘國) 군(軍)지(至)窠남(南) 공취일팔성(功取壹八城) ...
핍기국성(逼其國城) 

잔(殘)불복의(不服義) 감출영전(敢出迎戰) 왕위혁노(王威赫怒) 도아리수(渡阿利水) 견자박성(遣刺迫城) 잔병귀혈(殘兵歸穴) 
취편위성(就便圍城) 

이잔주곤핍 헌출남녀생구일천인(而殘主困逼獻出男女生口一千人) 세포천필(細布千匹) 
跪왕자서(王自誓) 종금이후(從今以後) 영위노객(永爲奴客) 
태왕은사 시미지건(太王恩赦始迷之愆) 록기후순지성(錄其後順之誠) 어시득오십팔성(於是得五十八城) 촌칠백(村七百) 
장잔주(將殘主) 제병대신십인(弟幷大臣十人)




백제는 372년 삼한의 진왕인 여구(372~384)가 중원으로 부터 백제왕을 책봉받은 뒤 
근초고왕의 백잔(온조백제)과 여구의 백제(왜: 삼한백제), 두나라로 되어 이야기가 전개된다.
여구의 뒤를 이어 여휘가 임나가라 종발성에서 384~416) 까지 집권한다.
이후 여휘(384~416) 와 여영(416~427)은 400년경 경자년 대원정으로 일본의 규슈로 건너가 왜5왕 시대를 이어간다.
427년 비유왕(427~455)이 일시적으로 백잔과(온조백재)와 왜(삼한백제)를 통합하여 백제로 이어진다.

삼한백제는 이전에는 왜로 불리었다.
왜는 후에 372년 삼한백제로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삼국사기나 비문에는 여전히 왜라 적고있다 

광개토태왕 비문에는 신묘년이 391년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광개토태왕의 즉위년도를 삼국사기는 392년 비문에는 391년으로 적혀있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는 392년으로 되어 있어 기년을 391년으로 고쳐 재해석 해야한다.

고구려는 신묘년 391 광개토태와의 즉위연도로 한다.
응신(여휘)조은 390년이 원년이므로 기년조정하여 389년으로 한다
삼국사기 백제 아신왕조는 삼국사기 292년에 즉위하였지만 비문에 맞춰 신묘년 12월에 즉위하였으므로 원년을 391년으로 한다.
삼국사기 신라 실성왕 또한 삼국사기에 402년 즉위하여 비문에 맞추어 즉위 원년을 401년으로 한다


응신(應神) 팔년(八年) 춘삼월(春三月) (396)
백제인래조(百濟人來朝) 백제기운(百濟記云) 아화왕립무례어귀국(阿花王立无禮於貴國) 
고탈(故奪) 아침미다례(我枕彌多禮) 급 현남(及峴南) 지침(支侵) 곡나(谷那) 동한지지(東韓之地) 
시이(是以) 견왕자직지우천조(遣王子直支于天朝) 이(以) 수선왕지호야(脩先王之好也) 상(上)367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제삼(第三) 
아신왕(阿莘王) 륙년(六年) 하오월(夏五月) (396)
왕여왜국결호(王與倭國結好) 이태자(以太子) 전지위질(腆支爲質)


태자 전지의 도래
일본서기 오진 8년(396) 3월조는 백제기(百濟記)를 인용 한다: 

“아화왕이 [과거에 진사왕이 그랬던 것처럼 삼한의 진왕에게] 대항하여 무례하게 백제로 부터 독립(立)을 칭하였기 때문에, 
[삼한의 진왕은 군사를 보내] 침미다례, 현남, 지침, 곡나 등 동쪽의 땅들을 빼앗았다. 
그러자 백제 아화왕은, 선왕 때처럼 우의를 한층 돈독하게 하기 위해, 왕자 직지를 삼한 조정에 보냈다(遣).” 

삼국사기는 아신왕 6년(396년) 5월조에, 
아신왕이 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를 질(質)로 보냈다고 기록을 하고 있다. 
일본서기는 그저 “보냈다(遣)”라는 표현을 했는데, 신라 지배층의 후손인 김부식은 “질(質)”이란 표현을 한 것이다.

응신조에서 <아화왕립(立) 무례어귀국>은 온조백제 아신왕이 삼한백제에 대항하기 위해 독립(立)하려 하였기 때문에 무례하였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삼한백제가 군대를 보내어 겁박하니 아신왕은 396년 5월에 태자전지를 삼한백제에 인질로 보냈다는 이야기다. 
당시 삼한백제의 왕은 여휘로 추정된다. 여휘는 386년 중원으로 부터 백제왕이란 책봉을 받는다.
최초로 삼한백제의 왕으로 책봉을 받은 이는 372년 삼한백제왕 여구이다.

오진 8년은 백제 아신왕 6년(396년)에 해당된다. 소위 신공황후 섭정 기간에 나타난 120년 괴리 현상은 이제 오진 조의 기록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일찍이 아스톤(NI: 256-257)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학자들은, 바로 이와 같은 삼국사기의 기록들을 근거로 역산을 해서, 당시 일본서기의 내용이 실제보다 120년이나 앞으로 당겨져서 기록 된 것이라고 판단했다.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기록내용이 일치할 경우, 삼국사기 쪽의 년도가 분명한데다 믿을수 있다.
일본서기는 호무다(응신)가 왕위에 오른 해를 270년(庚寅年)으로 기록해 놓고 있다. 
우리가 측정하는 390년(庚寅年)과는 정확하게 120년의 차이가 난다. 
이것은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호무다를 신공왕후의 아들로 만들고, 또 그녀를 위서 동이전에서 나오는 히미꼬 여왕으로 설정했기 때문에 생긴 괴리다. 

그래도 일본서기가 호무다 즉위 년도를 “경인년”이라고 기록을 해 준 것은, 후세 독자들로 하여금 실제 즉위년도를 쉽게 추정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있다.

일본서기 기록과, 삼국사기와 중국 정사에서 나오는 실제 연도 사이의 괴리는, 호무다 시대 이후에도 상당기간 유지되다가, 점차로 그 간격이 작아져서 결국은 양쪽의 연도기록이 일치하게 된다. 최초로 양쪽의 연도가 완전히 일치한 기록은, 무녕왕이 461년에 탄생했다는 사실 기록이다.

물론 461년 기록 이후에도 양쪽 년도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390-461년 기간 같이 황당한 괴리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120년의 격차가 영의 격차로 좁혀지는 과도기(390-461년)의 일본서기 기록들은, 중국 송서의 왜 5왕 기록 등을 참조 해 본다 하더라도, 그 정확한 년도를 추정하기가 그리 쉽지가 않다.

나는 호무다의 왕위 등극을 기준으로, 그 바로 앞뒤의 기록은, 일본서기가 말하는 년도에다 무조건 120년을 더해, 실제 해당 년도들을 모두 추정했다. 그러나 그 기준 시점에서 멀어질수록, 120년의 격차를 내 나름대로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방법으로, 계속 축소하면서 추정을 해야만 했다.

온조백제 왕실과 삼한백제왕실과의 관계는, 396년에 아신왕이 태자 전지를 삼한백제 조정으로 보낸 후 아주 현저하게 친밀한 관계가 된 것 같다. 아신왕은, 진사왕과는 달리, 삼한백제 왕국을 백제와의 공동 운명체로 보고있다. 

진사왕은 391년 삼한백제로 부터 독립(立)하기 위해 백제왕을 칭하다가 삼한백제의 왕에 의해 살해당하게 된다
396년 아신왕 이후, 다시는 온조백제왕이 백제왕을 칭한다는 무례한 내용의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실제로 427년 구이신왕을 끝으로 온조백제는 삼한백제왕이였던 여비에게 통합되어 백제로 흡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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