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영락 10년 경자년(400년) 신라 구원과 왜의 임나가라 종발성 정벌
고려의 대왕이 영락(永樂) 6년(396년) 전쟁 이후 영락(永樂)8년 고려가 잠시 백잔에 대하여 주춤하자 백잔은 기회를 노렸다는 듯이 영락(永樂)9년 (399년) 왜(倭)와 △통(通)하게 되고, 이제 왜(倭)라는 동맹군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영락 10년조를 보면 고려를 방문한 신라사신의 입을 통하여 왜(倭)가 신라를 공격하는 모습이 포착된다.
왜(倭)는 고려에 박살난 백잔을 포섭하여 △통(通)하였고, 군사적인 행동을 통하여 신라를 제압하려고 한 것으로 보이는데 세상일이 어디 마음대로 되겠는가?
신라가 고려와 손을 잡음으로 인해 ‘백잔과 왜’ 그리고 ‘고려와 신라’라는 두 축으로 동맹관계가 이루어진다.
396년 1차전에서 서로가 서로를 탐색하면서 2차전에 대비하게 된다.
그러다 2차전은 고구려의 선제공격으로 이어진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본다
四十五年秋八月(사십오년추팔월) : 45년 (400) 비문 399
冬十月(동십월) : 겨울 10월,
王所嘗御內廐馬(왕소상어내구마) : 왕이 타고 다니던 궁중의 말이
跪膝流淚哀鳴(궤슬유누애명) :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슬프게 울었다.
영락9년조를 보면 고구려를 방문한 신라의 사신에게 대왕은 △계(計)(밀계)를 알려주어 신라로 돌려보낸다.
이 때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왕(내물이사금)이 타고 다니던 말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슬프게 울었다고 적고 있다. 영락 9년조에 밀꼐를 올린 신라왕의 처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영락9년조에는 △계(計)(밀계)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어지는 영락10년조의 기록을 통하여 그 △계(計)(밀계)를 추측할 수 있다.
△계(計)(밀계)가 실전에 적용된 과정을 살펴보자.
1단계
보기오만 왕구신라(步騎五萬往救新羅) 종남거성 지신라성(從男居城至新羅城) 왜(倭)△기중(其中) 관군방지(官軍方至) 왜적퇴(倭賊退) △△△△△△△△래배급추지임나가라종발성(來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성즉귀복(城卽歸服)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
(어떻게 우찌우찌하여 ~~~~~~~~~~~~~~,.. 성이 즉각 귀복했다. 안라인병사로 하여금 지키게했다.)
2단계
발신라성(拔新羅城)△성(城) 왜구대궤(倭寇大潰) 성(城)△△△△△△△△△△△△△△△△△△△진(盡)△△래(來)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
(어떻게 우찌우찌하여 ~~~~~~~~~~~~~~,..안라인 병사로 하여금 지키게했다.)
3단계(또는 3,4단계)
△△△△△기(其)△△△△△△△△[제3면]△△△△△△△△△△△△△△△△△△△△△△△△△△사(辭)△△△△△△△△△△△△△궤(潰)△△△△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
(어떻게 우찌우찌하여 ~~~~~~~~~~~~~~,..안라인 병사로 하여금 지키게했다.)
이제 고려-신라의 연합과 왜와 백제의 연합 전쟁은 고려대왕의 계획대로 완벽한 승리를 이루었다.
신라왕은 이 전쟁의 답례를 하기 위해 버선발로 고구려대왕에게 달려가서 고마움을 표시하고 귀복한다.
영락 10년의 전쟁을 통하여 백잔-왜의 연합이 공파된 후,
영락 14년 왜에 의한 대방계(帶方界) 공격이 있었으나 고구려가 승리하고 백잔과 왜는 참살무수를 당한다
영락 17년 고구려는 마지막으로 왜를 참살탕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