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광개토왕 비문의 기년 조정 재해석
광개토태왕의 즉위년도를 삼국사기는 392년 비문에는 391년으로 적혀있다.
광개토왕(391-412년) 비문은, 백제와 왜 사이의 화호(和好), 결호(結好), 교친(交親)을 다음과 같이 표현 했다:
“왜가 신묘년(391년)이래 바다를 건너고, 백잔(백제), 가라(임나), 신라를 쳐 부시고 그들의 신민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호태왕은 병신년(396년)에 몸소 수군을 인솔하여 백제국을 토벌했다. 대군은 백제의 국경을 넘어, 수많은 성을 공격해 빼앗으면서 백제 수도로 핍박해갔다.
그러나 백제는 항복을 하지 않고 감히 출병하여 싸움을 벌렸다. 호태왕이 어찌 이런 광대 같은 도전을 용납할 수 있을 것인가?
왕은 대노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아리수를 건너, 선두부대를 독려하면서 백제수도를 향해 진격했다.
백제 군대는 두려워서, 그들의 소굴로 도망을 갔다. 우리 군대는 즉시 그들의 왕성을 포위했다. 백제 (아신)왕은 빠져나갈 방법이 없게 되자, 남녀 생구 1천명과 세포 1천 필을 헌납하면서, 호태왕 면전에 꿇어앉아, 이후로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고 서약을 했다.
호태왕은 은혜를 베풀기로 하고 용서를 해준 뒤, 백제왕이 후에 얼마나 성심껏 자기가 서약한 말을 지킬 것인지를 주시해 보기로 했다. 호태왕은, 이 백제와의 전투에서, 58개의 성과 7백 개의 촌락을 얻었다. 왕은 백제왕의 동생과 대신 등 10여명을 잡아가지고, 출정했던 군사와 함께 왕도로 돌아왔다.”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
백잔(百殘) 신라(新羅) 구시속민(舊是屬民) 유래조공(由來朝貢)
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 백잔(百殘)[임(任)][라(羅)][신(新)]라(羅) 이위신민(以爲臣民)
이(以) 육년병신(六年丙申) 왕궁솔수군(王躬率水軍) 토벌잔국(討伐殘國) 군(軍)지(至)窠남(南) 공취일팔성(功取壹八城) ...
핍기국성(逼其國城)
잔(殘)불복의(不服義) 감출영전(敢出迎戰) 왕위혁노(王威赫怒) 도아리수(渡阿利水) 견자박성(遣刺迫城) 잔병귀혈(殘兵歸穴) 취편위성(就便圍城)
이잔주곤핍 헌출남녀생구일천인(而殘主困逼獻出男女生口一千人) 세포천필(細布千匹)
跪왕자서(王自誓) 종금이후(從今以後) 영위노객(永爲奴客)
태왕은사 시미지건(太王恩赦始迷之愆) 록기후순지성(錄其後順之誠) 어시득오십팔성(於是得五十八城) 촌칠백(村七百) 장잔주(將殘主) 제병대신십인(弟幷大臣十人)
=> 여기서 틀렸습니다. 즉위년을 세는 방법이 월년제, 당년제 등 여러가지입니다.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비문과 삼국사기는 일치합니다. 논지의 시작이 틀리니 그 이하는 논하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