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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국원왕의 고구려가 369년에 근초고왕의 백제를 공격하였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왜 그것을 제게 물어보십니까? 고국원왕이나 근초고왕에게 물어보세요?” 가 답변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 맞는 답이란 것이다. 369년에 고구려의 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면 그 전 해인 368년에 백제가 고구려를 불편하게 하는 어떤 원인행위를 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펴고 368년에 백제가 무슨 일을 했는가를 보자.
 
*근초고왕 23年(368, 무진년, 내물 13), 春三月, 遣使<新羅>, 送良馬二匹.
*근초고왕, 24年(369), 秋九月, <高句麗>王<斯由>帥步騎二萬, 來屯<雉壤>, 分兵侵奪民戶. 王遣<太子>, 以兵徑至<雉壤>, 急擊破之, 獲五千餘級, 其虜獲分賜將士.
 
전쟁 나기 직전인 무진년(368)에 백제가 신라에 좋은 말 두필을 보냈다는 것이다. 이러니 전쟁이 날 수 밖에 없다. 말은 보통 혼인선물이다. 368년에 백제 근초고왕과 신라 내물이사금이 혼인한 것이다. 근초고왕이 신라왕실의 여인으로 왕비를 세우면 자립위왕하여 백제왕을 칭할 수 있게 된다. 신라본기를 보면 바로 확인이 가능하다.
 
*마지막 <백제왕>의 사신 : 2세기 기루왕...
*<백제>의 사신
...
*나물니사금, 11年(366), <百濟>人來聘.
*나물니사금, 13年(368, 무진년), <百濟>遣使 進良馬二匹. => 근초고왕의 자립위왕
------------------  250년만에 백제왕 시대 복원 -------------
*나물니사금, 18年(373), 百濟 禿山城主, 率人三百來投, 王納之, 分居六部. <百濟王>移書曰(백제왕이 글을 보내 말하기를):
*<백제왕>의 사신
...
 
말 두 필이 올 때를 기준으로 신라본기는 그 이전은 모두 백제의 사신이 온 것이고, 그 이후는 백제왕의 사신이 온 것이라고 하여 구분한다. 백제왕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2세기 초 기루왕 이후 무려 250년만이다. 예를 들어, 백제의 엄지(신지)였던 고이왕의 사신이 신라에 도착하면, 백제에서 사신이 왔다고 하지 백제왕의 사신이 왔다고는 하지 않는데 이것은 정확한 기술이다. 백제왕이란 목지국 진왕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때 근초고왕은 이미 근구수 태자라는 장성한 아들이 있었다. 신라여인이 낳은 왕자가 왕이 되면 元子가 되나 근구수는 그렇지 못하므로 그냥 子가 된다. 따라서 다음 기록은 정확한 것이다.
 
*근구수왕, 元年, [一云<諱須>], <近肖古王>之<子>
 
만일 근초고왕이 죽어 왕비를 합장해야 한다면 새로 왕이 된 근구수왕은 자기 어머니를 합장할까? 아니면 신라여인을 합장할까? 답은 신라여인이다. 그 이유는 신라여인이 아버지를 백제왕으로 만든 사람이기 때문이다. 대신 자기를 낳은 어머니도 별도로 왕릉에 버금가는 능을 꾸며주었을 것이다.
 
무령왕릉이 발굴되었는데 왕비가 무령왕의 아들 뻘 되는 젊은 여자였다. 왜 성왕은 자신의 어머니가 어머니가 아니라 이 젊은 여자를 합장했을까? 그 이유는 지석에 쓰여 있었다. 성왕의 어머니가 아니라 그 젊은 여인이 백제의 왕비였기 때문이었다. 대신 송산리에서는 비슷한 시기의 여인이 주인인 것으로 추정되는 꽃무늬 고분이 존재한다. 그러면 성왕의 왕자 신분은 무엇일까? 그도 당연히 그냥 子다.
 
*성왕, 元年, 諱<明穠>, <武寧王>之<子>也.
      
근초고왕이 왕비를 세우고 자립위왕하게 되자 황해도, 경기도, 강원서부의 마한소국들이 일제히 정치적으로 근초고왕에게 복속하여 근초고왕의 臣民이 되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이상하지만 이것은 부여의 전통이었다. 이전까지 근초고왕이 지휘하는 군사의 규모는 3천명 정도였지만 이제는 마한소국들이 모두 군대를 이끌고 오므로 3만 대군이 된다.  그런데 소국마다 군복이 다르고, 무기가 다르고, 명령체계가 다르고,... 그러면 어떻게 지휘하느냐? 바로 깃발을 통일하는 것이다.
 
*근초고왕, 24年(369), 冬十一月, 大閱於<漢水>南, 旗幟皆用黃.
 
고구려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은 이미 청산한 부여의 전통이 한강변에서 부활하여 과거 자신들의 속민이었던 황해도지역이 백제의 신민이 되는 것인데, 이것은 고구려의 남부지역이 통치에서 이탈하여 잘못하면 연쇄반응으로 국가가 붕괴될 수도 있는 것이다. 고구려에게는 명백한 도전으로 백제가 전쟁을 선포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만일 고국원왕의 비문이 발견된다면 거기에는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한 전쟁 원인이 적혀있는데, 자신들이 공격하였던 황해도 치양지역이 본래는 자신들의 속민이었는데, 무진년(368)에 백제가 파하여 그들을 신민으로 만들었다고 할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은 근구수왕 이후 잠잠해진다. 그러다 광개토왕 1년(영락 2년)부터 갑자가 다시 백제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다. 광개토왕은 391년에 왕이 되어 즉위는 392년에 하는데 이를 월년제라고 한다. 고구려가 왜 하필 392년부터 백제를 공격하는지를 알려면 그 원인이 391년(신묘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므로 신묘년 기록을 찾는다.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海破百殘○○新羅 以爲臣民 – 광개토왕비문
 
이 말은 신묘년에 금강유역 백제 진왕이 왕후를 세우고 자립위왕 하였다는 말이다. 진왕의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일본서기인데, 391년 신묘년은 응신천황 2년이므로, 일본서기 응신 2년조에 혹시 왕후를 세운 기록이 있는지를 찾는다.
 
*[일본서기] 응신천황, 2년, 봄 3월 경술삭 임자(3일)에 중희(仲姬)를 황후로 삼았다. 황후는 황전황녀(荒田皇女), 대초료천황(大鷦鷯天皇), 근조황자(根鳥皇子)를 낳았다.
 
따라서 위 일본서기의 왕후 세우는 기록은 광개토왕비문 신묘년조에 의하여 둘 다 정확함을 알 수 있다. 또한 비문에는 해만 나온 391년의 전쟁원인이 일본서기로 인하여, 그해 꽃 피고 새 우는 음력 봄 3월에 발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초고왕 역시 3월에 왕비를 세웠다. 음력 3월은 요즘으로 1년 중 참 좋은 시절이다.)
 
광개토왕비문의 이해 정도는 비문에 영락 몇년 하고 해만 나온 사건들을 몇 개나 달까지 쓸 수 있느냐에 달렸다. 달을 하나도 못 쓰면 아직 비문의 이해가 전혀 안 된 것이고, 달을 3개 정도 쓸 수 있으면 비문 이해의 첫 발을 내디딘 것으로 본다.
    

댓글 '10'

우람

2017.04.19 13:17:34
*.75.48.179

상당히 합리적이고 믿음직한 분석입니다. 고구려의 백제침공이유를 명쾌하게 해설하였읍니다. 백제가 부여풍습으로 자립위왕하여 고구려영역안에 있던 지역들이 이탈하자 그것을 되찾고 방지하고자 백제침공을 했군요.

그런데

2017.04.22 01:54:33
*.163.254.158

정말 간단한 질문인데요. 자립위왕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아직 헷갈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유력가문 내지 타 지역 왕실의 여인과 결혼을 하면 그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 하나의 명분이 되어서 근초고왕에게 주변 세력들이 자동적으로 붙어서 (일종의 이념적 연대) 패자가 된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그 결혼을 바탕으로 강력한 군사 경제적인 후원을 근초고왕이 얻게 되어서 힘의 불균형으로 인해 (일종의 힘의 논리) 주변 세력들이 복속을 한다는 의미인지.....어떤게 맞나요???

一道安士

2017.05.01 06:52:59
*.3.199.170

강력한 타국 출신 여인으로 황후 세우는 것은 고대국가성립기에 나타나는 혼인 동맹의 일종입니다. 국가를 부족들이 연합세력을 만들어 연방제식으로 운영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절대왕권의 성립과는 거리가 먼 부여 같은 나라가 됩니다. 이것을 계승한 나라가 삼국 중에 백제고, 일본에 이어져 지금까지 내려온다고 보는 것입니다.
저는 백제의 이런 제도를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는 것이 도시국사들의 연합인 고대 그리스와 비슷하고, 현대의 민주주의에도 가깝습니다. 아직까지 정치학적인 면에서 이것을 다룬 논문은 없습니다.

그런데

2017.05.06 04:32:19
*.163.254.158

답변 감사합니다. 위에 본문에 언급된 근초고왕의 사례에서 예를 들어 근초고왕이 내물이사금 가문의 여인을 왕후로 받아 들여서 자립위왕을 했기 때문에 내물이사금 시기의 신라도 일종의 '백제 연방'에 들어 왔다는 뜻인가요? 일종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의 세력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명분상 복종하면서 도요토미를 패자로 일단 밀어준 그런 관계라고 보면 되나요??

一道安士

2017.05.16 05:52:00
*.3.199.170

그렇습니다. 내물왕이 근초고왕과 혼인하며 신라가 고구려 세력권에서 떨어져 나와 백제 세력권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 전통은 본류인 한국사에서는 곧 사라졌으나 지류인 일본사에서는 늦게까지 나타납니다.

*흘해이사금 3년, 봄 3월, 왜국 왕이 사신을 보내 자기 아들의 혼처를 요청하자, 아찬 급리의 딸을 보냈다.
-> 신라가 신라본기 왜국(변진한)의 담로국이 되었습니다. 신라본기 왜국의 지방 통치제도가 담로제였습니다. 신라가 변진한 연방에 들어갔습니다.

*흘해이사금 35년, 봄 2월, 왜국이 사신을 보내 청혼하였으나, 딸이 이미 출가하였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 신라가 신라본기 왜국의 담로국으로부터 독립하였습니다. 신라가 변진한 연방에서 탈퇴하였습니다. 이후 변진한(왜국)으로부터 계속 공격을 받으니 근초고왕과 손을 잡게 된 것입니다.

혼인을 통한 동맹이 담로제도로서 신라본기에 나옵니다. 삼한소국들이 모두 진왕의 담로였습니다. 흔히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삼국지와 후한서를 보면 백제는 마한 속에 있고, 신라는 변진한 속에 있다. 중국사서가 증언하는 한 적어도 3~4세기에 확실히 그랬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보면 그 시기의 마한이나 변진한이 없다. 따라서 삼국사기로는 당시 마한과 백제, 변진한과 신라의 관계를 알 수 없다.>

알 수 있습니다. 백제본기의 왜가 마한이고, 신라본기의 왜가 변진한입니다. 백제는 마한과 대체로 사이가 좋았고, 신라는 변진한과 대체로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

한문권

2017.05.23 14:46:33
*.96.189.162

-자립위왕에 대해서 좀 더 상세한 설명을 부탁 드립니다.
교수님은 책에서도 읽었지만 왠지 선뜻 수긍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정치적으로 자기의 힘이 약한 세력이 더 큰 세력의 정치적 위상을 결정한다는게 상식적이지 않아서 받아 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아직 자립위왕에 대한 정치적 논문이 없는것 또한 이런 부분을 반영한것이 아닐가요?

신묘년조

2017.06.02 00:14:05
*.209.219.23

선생님의 광개토왕비 신묘년 해석을 예전 책을 통해 접하였고 상당히 신빙성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전부터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목지국왕이 혼인해 자립위왕하여 백제(왜)왕이되면 백잔 신라가 신민이 되는데, 굳이 '도해파'라는 표현을 쓴 이유가 무엇일까요? 당시 백제왕은 아산만 목지국에서 삼한을 지배했을텐데, 비문을 세운 장수왕이 '왜'가 '바다 건너' 백잔 신라를 깨부서 신민으로 삼았다고 기록했는지 궁금합니다.

시간순으로 정리하자면

1. 아산만 목지국에서 응신천황 자립위왕 (한반도 백제)

2. 광개토왕의 아산만 침공

3. 응신천황의 도주 및 기내 정벌 (왜열도 백제 성립)

4. 백잔이 한반도 백제 인수

5. 장수왕이 광개토왕비문 세움

5번 시점에서 백제가 열도로 쫒겨나 왜국이 되었다지만 1, 2번 사건을 왜가 바다 건너 백잔 신라를 굴복시켰다고 표현하는 것은 명백한 왜곡으로 보이는데, 굳이 바다를 건넜다는 표현을 꼭 써야만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신묘년조

2017.06.02 00:19:38
*.209.219.23

추가적으로 목지국왕이 자립위왕해 백제왕이 될 때마다 고구려와 백제가 전쟁을 벌여야했다면 두 국가가 국경을 마주할때부터는 삼십년에 한번 꼴로 국운을 건 전쟁을 멸망때까지 했어야될텐데, 광개토왕의 대규모 침공은 당시의 시대상을 기반으로 일어난 이벤트였을까요? 고구려와 백제가 동북아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 상황이라는? 덧붙여 장수왕이 개로왕을 참수한 전쟁도 혹시 개로왕이 자립위왕 하였기 때문에 발발하였을까요?

질문이 많아서 죄송합니다..

지나가다

2017.08.27 16:47:24
*.120.48.55

제가 받아들이는 교수님 견해 따르면... 그렇다고 봐야죠. 백제의 담로가 한반도만 있었던게 아니고. 요서,왜 등 훨씬 큰나라 였고....
장수왕이 잔국을 농번기때(이유는 백잔 들 이 구원군 보내기 어렵게 하기위해) 해군동원 기습하기위해 사전정지작업으로 백제군항을 치는데... 현재 사학계선 그걸 강화도로 비정한다던데... 거긴 무인도+ 왕실 사냥터였고... 아마 교수님은 요동반도-발해만 요즘도 군항인 여순군항?으로 보는걸로 이해했습니다.

지나다

2017.08.27 16:38:30
*.120.48.55

그건... 제기억이 맞다면....
지금에서(광개토비문 만들때)보니... 이제는 왜국이 되서 바다건너가 있으니... 도해파 라고 표현한거라 한거라고... 전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이건 제생각인데.
광개토 비문이 글읽을수 있는 일반인들수준 업적보라고 한거지. 당시 전문적 학자를 상대로 하진 않았을것

그럼 왜 하필 신묘년에 특정해서 도해파 라고 적어서 신묘년에 이미 바다건너편에 있었던거 같이 표현했나... 그건 좀 잘 모르겠습니다.. 저번에 듣긴했는데.. 잘 기억이 안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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