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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략의 죽음과 武의 국서

백제사 조회 수 201 추천 수 0 2016.12.09 15:41:08
一道安士 *.232.249.89

아래는 일본서기 웅략천황조 후반부입니다.


*웅략 20년(475); 겨울에 고구려가 백제를 쳐 없앰.

*웅략 21년(476); 3월 문주왕에게 웅진을 주어 백제를 다시 일으키도록 함.

*웅략 22년(477); 1월 백발황자를 황태자로 세움.

*웅략 23년(478): (기록공백)

*웅략 23년(24년의 오자, 479); 4월 문근왕이 죽고 말다왕이 백제왕이 됨, 7월 천황이 병으로 자리에 눕고 황태자가 국사를 봄. 8월 웅략이 죽음, 10월 황태자가 옥새를 받음.

*청령 1년(480); 10월 웅략을 장사지냄.


웅략은 23년이 실제로는 24년이고 23년은 아예 없습니다. 23년은 24년의 오자거나, 478년을 지워야 하는 어떤 사정이 생겨 일부러 없앤 것입니다.


[문 1] 웅략은 언제 죽었습니까?


최고 권력자가 몸이 아파 국사를 못 본다는 것은 이미 죽었다는 뜻입니다. 웅략이 죽은 것은 후계자를 세우는 477년입니다. 어떤 이유로 왜국을 더 이상 다스릴 수 없게 되어 후계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후에 웅략이 직접 지시한 국정업무는 없습니다. 479년에 안치신과 마사신이 선단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는데 웅략이 지시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이는 왜국이 삼한 같은 소국체제라 가능합니다. 일본서기는 중요한 인물의 죽음에 대하여 괴기 기록을 남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웅략 말기의 괴기 기록을 찾아봅니다.


*웅략 22년; 7월 거북이가 갑자기 변하여 여자가 됨.


역시 후계자를 세운 웅략 22년조에 괴기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면 웅략은 477년 7월에 죽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문 2] 웅략은 언제 장사지내졌습니까?


청령 1년에 장자지낸 기록만 있으면 480년 10월인데, 479년 10월에 황태자가 옥새를 받는 의식을 거행합니다. 옥새를 받는 의식은 장사지낼 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둘 중 하나는 거짓인데 달이 10월로 같은 것으로 보아 10월은 확실합니다. 어느 기록이 맞을까요?


그것은 479년이 맞습니다. 이때 장사지냈다고 하면 죽자마자 2달 만에 장사지낸 것이 되어 모순이 발생하므로 장사지낸 것만 떼어 1년 뒤에 기록한 것입니다.


일본서기의 웅략에 대한 기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웅략은 477년 7월에 죽었다.

(2) 478년은 숨겨야 하는 어떤 이유가 있었다. 이때는 왜국을 통치할 수 없게 된 시기다.

(3) 479년 10월에 장사지내졌다. 죽은 지 2년 3개월 만이다.


자, 이제 저 일본서기 기록이 맞는지 틀린지를 확인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권위 있는 다른 사료로 비교해봅니다.


1. 삼국사기 백제본기


477년 7월에 곤지가 죽었다고 하여 웅략과 같은 해, 같은 달에 동시에 죽었습니다.


*문주왕 3년(477) 秋七月 內臣佐平<昆支>卒.


2. 왜왕 무의 국서


478년에 왜왕 무의 국서가 남조 국가인 송에 오는데 忿, 賁, 忠節 등 비장한 추도문 형식입니다. 책봉을 받으려는 국서에는 보통 좋은 말만 쓰는데 죽음을 상징하는 亡, 喪 등이 나옵니다. 之志는 유업을 뜻합니다. 이것은 또 무슨 말입니까? 不獲一簣.(마지막 흙 한 삼태기를 더 나르지 못하는 꼴이 됐습니다.) 무 신상에 불행한 일이 생겼습니다.

두 나라가 나오는데 백제와 고구려이고, 무는 고구려를 비난합니다. 최근에 아비와 형이 죽었다고 하는데 당시 아비와 형이 죽은 왕족은 누가 있습니까? 곤지왕의 형인 개로왕이 고구려에게 죽었고, 아버지인 비유왕도 고구려와 관련된 내전으로 죽었습니다.


封國偏遠, 作藩於外, 自昔祖禰, 躬擐甲冑, 跋涉山川, 不遑寧處. 東征毛人五十五國, 西服衆夷六十六國, 渡平海北九十五國, 王道融泰, 廓土遐畿, 累葉朝宗, 不愆於歲. 臣雖下愚, 忝胤先緖, 驅率所統, 歸崇天極, 道逕百濟, 裝治船舫, 而句驪無道, 圖欲見呑, 掠抄邊隷, 虔劉不已, 每致稽滯, 以失良風. 雖曰進路, 或通或不. 臣亡考濟 實忿寇讎, 壅塞天路, 控弦百萬, 義聲感激, 方欲大擧, 奄喪父兄, 使垂成之功, 不獲一簣. 居在諒闇, 不動兵甲, 是以偃息未捷. 至今欲練甲治兵, 申父兄之志, 義士虎賁, 文武效功, 白刃交前, 亦所不顧. 若以帝德覆載, 摧此強敵, 克靖方難, 無替前功. 竊自仮開府儀同三司, 其餘鹹各仮授, 以勸忠節.


478년에 도착한 국서는 무가 당시 어떤 사유로 왜국의 통치가 어려워졌으니 책봉이라도 받아보겠다고 사정하는 것입니다. 이 무렵에 천황이 몸이 아파 모든 국사를 황태자가 처리했다는 일본서기 기록과 일치합니다.


진왕제에서는 전 왕의 아들로 입적되면 자연스럽게 전 왕은 왕력상의 아버지가 됩니다. 무(웅략)가 제(윤공)의 아들로 입적되니 제는 무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흥도 무의 왕력상의 형입니다. 응신(백제왕)-인덕(궁월왕)-이중(인덕의 아들)-반정(아지왕)-윤공(목토숙녜)으로 이어져오며, 이중만 인덕의 생물학적 아들일 뿐 다른 왕들은 혈연적으로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臣亡考濟 : 여기서 아버지를 뜻하는 '고'는 제, 즉 윤공입니다.

奄喪父兄 : 여기서 아버지를 뜻하는 ‘부’, 그리고 '형'은, 고구려와 관련하여 상을 당한 아버지와 형인데, 생물학적인 관계로 비유왕과 개로왕입니다.

 

비유왕의 죽음은 내란인데 내란을 일으킨 자들이 고구려로 도망갑니다. 그리고 이들이 나중에 장수왕의 고구려군을 따라 내려와 개로왕을 죽입니다. 그러니 무(곤지)가 고구려를 아버지인 비유왕 죽음의 배후로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3. 무령왕릉 지석


무령왕릉 지석을 보면 당시 백제 부여씨 왕족은 죽은 후 2년 3개월 후에 장사를 지냅니다. 웅략은 백제 왕실의 예법에 따라 장사 지내진 것입니다.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는

계묘년(523년) 5월 7일 임진날에 돌아가셔서,

을사년(525년) 8월 12일 갑신날에 이르러

대묘에 예를 갖추어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


===================================================================

 

아래를 보면 비전공자가 왜 욕먹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학설이 처음 나온 것이 1970년입니다. 462년의 왜왕 무의 사신 기록도 모릅니다. 502년의 무의 왜왕 책봉기록은 새로 양나라를 건국한 무제가 주변국 왕들을 일제히 책봉합니다. 왜국에서 사신을 보낸 적도 없고, 반대로 왜국으로 사신을 보낸 적도 없는 양나라 혼자만의 잔치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만일 지금 “조지 워싱턴을 미국 왕에 책봉하노라.” 하면 조지 워싱턴이 살아있습니까? 비전공자로서 역사상식이 부족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만일 20년이 아니라 40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고 하면 혹시 애교로라도 보아줄만 합니다. 역사전공자들은 당시 이 발표를 듣다가 다 나갔을 것입니다. 

 

...........................

백제 무령왕은 10대의 어린나이에 「무」라는 이름으로 위왕의 자리에 오른뒤 적어도 20년동안 위국을 다스렸으며 그뒤 환국해 백제왕에 즉위했다는 연구가 나왔다. 소진철 원광대교수(정치사상)는 이같은 연구결과를 15일 한국 프레스센터에서 한일문화교류기금주최로 열리는 「제30차 한일문화강좌」에서 발표한다.


(중략)


무가 직접 써 송 순제에게 478년 보낸 「상표문」은 위기에 처한 백제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 것. 소교수는 「상표문」을 쓴 사람은 백제의 불운이 곧 자신의 불운으로 이어지는 백제와의 일체감을 가지고 있는 인물일 수밖에 없다고 추정했다.

그는 이어 「상표문」에는 「자신의 부형이 갑자기 죽었고 … 이제 망부의 유지에 따라 적(고구려)의 강토를 무찌르겠다」라는 내용이 담겨있는데 이무렵 왜나 백제에서 있었던 왕과 왕자의 갑작스런 죽음은 백제 개로왕의 비참한 최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의하면 475년 겨울 고구려대군의 7일간에 걸친 공세로 창례성이 무너지고 개로왕과 대비, 그리고 왕자가 아차성에서 무참히 살해됐다. 무가 「상표문」에서 말한 「아버지와 형의 죽음」은 바로 개로왕과 왕자의 비참한 최후를 말한다는 것.

무는 바로 개로왕의 아들로 뒤에 무령왕이 된 사마군이라는 주장이다. 「송서」에 의하면 송 순제는 478년에 무가 자청한 「안동대장군·위국왕」, 20년후인 502년에는 양 무제가 「정동대장군·위국왕」이라는 관호를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무의 왜왕 재위가 적어도 20년이상 지속되었다는 증거로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각각 501년 및 502년으로 적힌 사마왕, 즉 무령왕의 백제환국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 소교수의 주장이다.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19940413013001#csidxae73ec0eccb7253b56f90673f12ae25  1970-01-0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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