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gital Resources about Korean History

디지털의 옷을 입은 역사자료. 이제 史料는 공유되어야 한다.

VIEW

삼국유사 | 三國遺事

고려시대 일연에 의해 작성된 한국 고대 문화사의 최고 원천.

GO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고등학교 7차 교육과정 국사교과서

MORE

History through images & Photos, Maps

이미지와 사진, 그리고 지도로 본 역사

VIEW

오늘:
10
어제:
122
전체:
1,223,637

김상님이 한국고대사를 새롭게 조망하는 곳입니다.
※첨부파일은 hwp, zip, jpg, gif 만 가능합니다.
게시물 혹은 댓글을 남기실때는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시기 바랍니다.
비속어, 욕설, 반말 등을 사용하면, 본 사이트의 방침과 맞지 않으므로 글을 삭제하겠습니다.

웅략의 즉위와 興에서 武로의 교체

백제사 조회 수 212 추천 수 0 2016.12.08 12:04:00
一道安士 *.232.249.89

남당유고를 읽다보면 이분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특히 백제본기 초기 기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1. 온조왕 46년 재위
2. 다루왕 28년 재위
3. 기루왕 52년 재위
4. 개루왕 39년 재위
5. 초고왕 49년 재위
6. 구수왕 21년 재위
---------------
6왕 평균 재위기간 42년
 
연 이은 6명이 평균 42년씩 재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왕위는 부자관계로만 계승될 때 가장 긴데 이것도 30년입니다. 특히 3루왕(다루-기루-개루) 시대는 120년인데 3명의 왕으로 통치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적어도 2배인 6명은 있어야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남당은 이 문제를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해결하고자 왕력을 단축시킵니다. 하지만 후한서와 삼국지 한전에 이렇게 된 자세한 이유가 나옵니다. 책을 잘 읽어야 합니다.
 
일본서기를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일본서기 천황들 중에서 실권자는 5세기 천황들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권력자는 웅략천황(대박뢰황자)입니다. 웅략천황조를 보고 그가 언제 왕이 되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즉위 전년; 8월, 팔조백언황자, 판합흑언황자, 미륜왕을 죽임. 10월, 시변황자를 죽임. 11월 즉위
웅략 1; 3월, 황후를 세움.
웅략 2; 왕실의 여인들 이야기
웅략 3; 왕실의 여인들 이야기
웅략 4; 왕실의 여인들 이야기
웅략 5; 왕실의 여인들 이야기,
웅략 6; 4월, 오국 사신을 영접.
 
자, 웅략이 언제 왕이 되었다고 보십니까?
 
답은 웅략 6년입니다. 웅략 6년에 오국 사신을 접대하는 것이 왕권을 행사하는 최초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웅략 즉위 전년은 실제로는 웅략 5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를 앞으로 떼어다 놓은 것입니다. 웅략 5년, 8월부터 10월 사이에 지배층을 다 숙청하고 11월에 즉위했고, 웅략 6년 4월에 오국에서 즉위 축하사절이 온 것입니다. 오사카에서 양자강 하류까지 편도에 약 2달이 걸리기 때문에 매우 합리적입니다. 왜 하필 웅략 5년 8월부터 왜국에 대 숙청이 시작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웅략 5년 7월에 왜국에 왕권과 관련된 어떤 큰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웅략 1년부터 5년까지 왜국을 통치한 인물은 시변황자입니다. 그러면 5년 동안은 시변황자를 천황으로, 6년부터는 웅략을 천황으로 쓰지 왜 이렇게 썼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시변황자를 천황으로 쓰지 않은 이유는 삼국사기 3루왕 시대를 보면 압니다. 120년 동안에 백제왕이 3명뿐인 이유는 백제왕이 3명뿐이기 때문입니다.
 
비류와 온조가 아산만에 상륙하여 비류는 남고 온조는 북상하여 한강유역에 자리 잡았습니다. 처음에는 둘 다 부여에서 가져온 진왕제를 실시하여, 왕후를 세우고 자립위왕 하면 왕의 시호와 대수를 받고, 못하면 시호와 대수를 못 받고 앞이나 뒤의 즉위한 왕의 재위기간에 통합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즉 왕이 설사 10명이어도 자립위왕에 성공한 왕이 1명이면 그 사람만 왕으로 기록되고 나머지 9명은 그 사람에게 통합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비류계는 계속 자립위왕하여 가서 진왕을 배출하였는데, 온조계는 이것이 잘 안 되어 결국 개루왕을 끝으로 진왕제를 포기하고 백제의 마한의 1국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즉 3루왕 시대에 자립위왕에 성공한 왕은 다루-기루-개루의 3명뿐입니다. 초고왕부터는 더 이상 백제왕을 칭하지 못합니다. 왕자도 원자라는 호칭은 쓸 수 없고, 왕비는 왕후라는 호칭을 쓸 수 없습니다. 왕비의 호칭은 부인입니다. 다시 백제왕을 칭하는 것은 근초고왕 이후입니다.
 
시변황자가 5년 동안 왕후를 세우지 못하자 왜국이 혼란에 빠집니다. 왕이 즉위해도 대외적으로 왕을 칭하지 못하고 왕세자를 칭해야 합니다. 왕후를(백제 왕실의 여인으로) 세워야 왕을 칭하는 것입니다. 삼한백제(5세기 왜국)가 한성백제와 혼인한 것은 4세기 초 비류왕 때부터입니다.
 
시변황자가 왕권을 강화하고 왜왕이 되는 방법이 또 있습니다. 여휘왕처럼 중원국가로부터 왜왕의 책봉을 받아오는 것입니다. 웅략 5년에 시변황자가 죽었다는 것은 이때 중원 국가에 사신을 보내 왜왕의 책봉을 받으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자 이에 위협을 느낀 대박뢰황자(웅략)가 시변황자를 비롯한 여러 경쟁자들을 죽인 것입니다. 대박뢰황자가 이들을 죽일 수 있으려면 진왕제에 따라 왕권의 정통성을 담보하는 백제 왕실의 여인이 필요합니다.
 
웅략이 윤공천황의 5번째 아들로 기록된 것은 그가 왕력에 입적된 순서가 5번째였기 때문입니다. 인덕은 응신과 동년배임에도 불구하고(나이가 더 많다는 것이 통설) 응신의 4번째 아들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4번째로 왕력에 입적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서기를 보면 첫 번째 아들은 대부분 생물학적 부자관계이고, 3번째 이후는 대부분 혈연과 무관한 왕력상의 부자관계입니다. 따라서 웅략은 윤공의 양자가 되는 것이지 생물학적 부자관계는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일본서기가 이야기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왜국을 통치하던 시변황자는 5년이나 왕후를 세우지 못하고 웅략 5년(461) 10월에 죽었다. 그 결과 천황의 시호와 대수를 못 받고 그의 재위기간 5년은 웅략의 재위기간에 통합되었다. 
(2) 웅략은 웅략 5년(461) 7월에 왜국 수도에 들어와, 8월부터 10월 사이에 지배층을 척결한 후, 11월에 왕위에 즉위했다.  
(3) 웅략 5년(461) 11월에 왕이 되자, 웅략 6년(462) 4월에 양자강하류에서 축하사절단이 왔으며 그때부터 왕권을 행사한다. 
(4) 윤공은 웅략의 왕력상의 아버지이며 생물학적 아버지는 따로 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위의 일본서기 기록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확인하느냐 하면 일본서기와 독립적인 다른 권위있는 기록으로 확인합니다. 
 
1. 461년 무령왕릉지석
백제에 온 곤지가 개로왕에게 젊은 후궁을 달라고 합니다. 곤지를 따라가던 후궁이 461년에 각라도라는 섬에서 아들을 낳으니 이분이 무령왕입니다. 461년에 곤지가 백제왕실의의 여인을 데리고 왜국으로 들어갔습니다. 진왕의 자립위왕 준비가 된 것입니다.
 
2. 일본서기 자체 기록
일본서기를 보면 곤지 일행이 백제왕실의 여인을 앞세우고 왜국의 수도에 들어오는 것이 461년 7월입니다. 웅략의 숙청이 시작되는 8월 직전입니다. 웅략 즉위 전사 기록이 본래는 바로 이 다음에 있었던 것입니다. 사건의 달이 정확함을 알 수 있습니다.
雄略天皇 五年(辛丑 461년)秋七月。軍君入京。旣而有五子。〈百濟新撰云。辛丑年 盖鹵王 遣王遣弟 昆攴君 向大倭侍天皇 以脩先王之好也〉

3. 462년 송서
중국의 송서를 보면 462년에 왜국의 통치자가 왜왕세자 興에서 왜왕 武로 바뀝니다. 462년에 송나라에 왜국 사신이 도착했는데 과거에는 왕이라고 하고 왜왕 책봉을 받아 가는데, 이번에는 왕세자라고 하고 왜왕 책봉을 받아갑니다. 그러자마자 왜국에서 武라는 왕으로부터 다시 사신이 오는데 이번에는 책봉을 요구하지도 않고 스스로 왜왕이라고 하고 통고할 뿐입니다. 즉 462년에 왜국 왕이 흥에서 武로 바뀐 것인데 송서의 기록 연도가 정확함을 알 수 있습니다. 흥과 무는 흥이 형으로 기록된 것을 볼 때 본래 흥의 서열이 더 높았습니다. 

시변황자(흥)의 사신은 시변황자가 죽기 직전인 461년 9~10월경에 송으로 출발했고, 송의 수도인 남경부근까지 편도에 3개월 정도 걸린다고 보면, 461년 1~2월에 송에 도착하여 왜왕 책봉을 받았고, 다시 4~5월에 왜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시변황자는 죽고 웅략(무)이 왕이 되었을 것입니다. 시변황자의 왜왕 책봉을 본 웅략은 이를 바로 잡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송에 사신을 보내니 아마 8~9월에 송에 도착하였을 것입니다.

*대명 6년(462) 3월, 왜왕세자 興에게 안동장군을 내림(송서 효문제). 興이 죽고 아우 武가 서자 스스로 사지절 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칠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칭함(송서 왜국전)
世祖 大明六年(462), 詔曰:「倭王世子興, 奕世載忠, 作藩外海, 稟化寧境, 恭修貢職. 新嗣邊業, 宜授爵號, 可安東將軍、倭國王.」 興死, 弟武立, 自稱使持節、都督 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 倭國王.

4) 삼국사기
곤지(부여 곤)는 개로왕과 더불어 비유왕 계열의 부여씨 왕족입니다.
 
삼국 사료의 교차 비교로 볼 때, 흥이 시변황자고 무가 웅략천황(곤지)입니다. 일본학계는 안강천황을 흥이라고 했는데 연도가 안 맞을 뿐 아니라 왜 흥이 왜왕이 아니라 왜왕세자를 칭했는지를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칠지도의 원인이 신공 49년에 발생했는데, 왜 3년 후인 신공 52년에 전달되었는지도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왜 백제왕이 아니라 백제왕세자가 외교권을 행사하는지도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무가 웅략(곤지)인 이유는 첫 번째가 웅략의 즉위로 판단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웅략의 죽음으로 판단하는 것인데, 결론은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죽음으로 판단하는 것이 더 확실합니다.

일본서기를 쓸 때 왜5왕의 기록이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5세기 연도를 조작하느라 모두 뺏습니다. 하지만 일본서기를 잘 보면 어디서 뺐는가도 알 수 있고, 그 지점이 중국사료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 502년에 새로 양나라를 건국한 무제가 주변국 왕들을 일제히 책봉합니다. 누가 요구하지도 않았지만 새 국가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과거 기록을 보고 찾아서 책봉한 것입니다. 502년 왜왕 무의 책봉기록은 그 한 예입니다. 당시 왜국은 양나라에 사신을 보낸 적도 없고, 양나라 사신이 왜국에 온 적도 없습니다. 마치 오늘날 “조지 워싱턴을 미국 왕으로 책봉하노라.” 뭐 이런 것입니다. 그렇다고 조지 워싱턴이 살아오는 것인 아니지요.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과거 모 대학 정치학과의 모 교수님이 502년에 왜왕 무를 책봉한 기록이 있으므로 당시 무가 살아있었다고 했다가 역사학자들에게 핀잔을 들은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
공지 Q&A 새한국고대사 포럼 안내 주성지 2006-08-08 63862

가야사 10대 숭신천황 연도 확인

  • 2017-05-01
  • 조회 수 168

일본서기에서 10대로 주어진, 고왕조 창업자인 숭신천황에 대한 연도를 점검하겠습니다. 얼마나 제 연도가 정확한가를 확인하면 됩니다. 어떤 방식으로 연도를 점검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올리는 글들은 이미 제 책 3권에 다 활자화되어 나오는 내...

백제사 신무천황의 前史 7년

  • 2017-05-01
  • 조회 수 196

일본서기는 연도별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서기 450년을 기준으로 그 앞과 뒤의 날자 역산법이 다릅니다. 이것은제 책 <네티즌과 함께 풀어보는 한국 고대사의 수수께끼>를 보시기 바랍니다. 450년 전은 연도가 엉망이라 이 기록이 서기 몇년인지를 알기 어...

고구려사 고구려 고국원왕이 369년에 근초고왕의 백제를 공격한 이유 [10]

  • 2017-04-13
  • 조회 수 319

왜 고국원왕의 고구려가 369년에 근초고왕의 백제를 공격하였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왜 그것을 제게 물어보십니까? 고국원왕이나 근초고왕에게 물어보세요?” 가 답변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 맞는 답이란 것이다. 369년에 고구려의 공격으로 전쟁이...

백제사 왜왕무의 책봉관계 [1]

  • 2016-12-13
  • 조회 수 319

왜왕무의 상표문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장수왕 63년(475) 9월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략하여 백제왕이 도읍한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그 왕 여경(餘慶) (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사로잡아서 돌아왔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문주왕 3년...

백제사 개로왕의 국서

  • 2016-12-13
  • 조회 수 227

개로왕 455~475 468 十四年冬十月癸酉朔(십사년동십월계유삭) : 14년 겨울 10월 초하루 계유일에 日有食之(일유식지) : 일식이 있었다. 469 十五年秋八月(십오년추팔월) : 15년 가을 8월, 遣將侵高句麗南鄙(견장침고구려남비) : 왕이 장수를 파견하여 고구려의...

백제사 462년 왜왕 무의 使持節 都督, 七國諸軍事 安東大將軍 倭國王 자칭

  • 2016-12-13
  • 조회 수 307

중국 사서인 송서를 보면 왜왕 무가 2번 사신을 보냅니다. 462년과 478년입니다.   무가 왕이 된 것은 다음 기록에 의해 462년입니다. 이 해에 왜 왕세자 흥을 안동대장군 왜국왕으로 책봉하였는데 흥이 죽고 그 동생 무가 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송 世祖...

백제사 웅략의 죽음과 武의 국서

  • 2016-12-09
  • 조회 수 192

아래는 일본서기 웅략천황조 후반부입니다. *웅략 20년(475); 겨울에 고구려가 백제를 쳐 없앰. *웅략 21년(476); 3월 문주왕에게 웅진을 주어 백제를 다시 일으키도록 함. *웅략 22년(477); 1월 백발황자를 황태자로 세움. *웅략 23년(478): (기록공백) *웅략...

백제사 왜왕무(倭王武)가 백제 무령왕이라는 논거

  • 2016-12-08
  • 조회 수 334

과연 백제를 구하기 위한 일념으로 흔쾌히 송나라 순제에게 올릴 상표를 몇날 며칠 밤을 새워가며 정성들여 수정보완을 거듭하여 완성하니, 마침내 역사에 길이 남을 상표문이 완성됐다.  옛 적의 상표문(472년 개로왕이 위나라에 보낸 것)그대로 황제의 가슴...

백제사 왜의 5왕 [2]

  • 2016-12-08
  • 조회 수 252

왜의 5왕 (The Five Kings of Wa)                        3세기이후 147년간 기록이 없다가 서기 413년 중국사서에 일본기록이 나타난다.  조공을 바치고  작위를 받고자 하는 5명의 왕의 이름이 5세기에 나온다.  400년 경자년 광개토왕의 남정이후 규슈에 ...

백제사 웅략의 즉위와 興에서 武로의 교체

  • 2016-12-08
  • 조회 수 212

남당유고를 읽다보면 이분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특히 백제본기 초기 기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1. 온조왕 46년 재위 2. 다루왕 28년 재위 3. 기루왕 52년 재위 4. 개루왕 39년 재위...



LOGIN

SEARCH

MENU NAVIG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