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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에 대한 오해들

백제사 조회 수 3346 추천 수 0 2013.08.16 13:46:41
一道安士 *.232.249.89

4세기 후반 백제의 근초고왕은 수천명 동원하던 군사를 수만명 수준으로 동원하고, 고구려를 격파하였으며, 중원왕조에 최초로 사신을 보내는 등 백제사의 일대 중흥을 가져온 왕임에는 확실하다. 하지만 삼국사기를 펴보면 근초고왕이 누구인지 잘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사이트에는 이상한 말들이 돌아다닌다. 근초고왕에 대한 대표적 오해 몇가지를 정리하고자 한다.

 

1. 요서에서 왔다 또는 요서에 나갔다.

- 근초고왕은 요서에 가 본 일이 없다. 만일 근초고왕이 요서에 갔으면 삼국사기에 나와야 한다. 삼국사기 읽는 법을 몰라서 발생한 초보적인 오해다. 요서는 2세기에 마한이 나가는 등 금강유역 진왕의 백제가 나갔다. 근초고왕과 무관하다. 369년부터 고국원왕의 고구려와 전쟁이 시작되는데 그 이유도 삼국사기가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또 광개토왕이 백제를 공격한 이유가 요서백제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비문을 보면 신묘년에 전쟁원인이 적혀있다. 책과 비문에 다 쓰여 있다. 기록을 보면 고국원왕이 백제를 공격한 이유나 광개토왕이 백제를 공격한 이유가 같다.

  

2. 부여씨다 또는 이름이 여구다.

- 근초고왕은 해씨다. 백제사에 부여씨가 최초로 출현하는 것은 영락 17년(전지왕 3년, 407년)에 출현하는 여신이다. 영락 17년 1월, 수만대군을 동원하여 남해안에서 고구려군과 대결한 여신(훗날의 상좌평), 여비(훗날의 비유왕) 등 왜군의 지휘부가 상경하여 한성백제를 접수한 것이다. 이것이 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의 부여씨왕조 출현이다. 어떤 사람은 당시 금강유역에 있던 진왕 여구를 근초고왕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동시에 백제왕이 두 명이니 당연히 둘은 서로 사이가 안 좋았다. 재위 26년째 고구려에 승리하여 북쪽으로의 안전이 확보되자 서둘러 북쪽인 한산으로 천도한 가장 큰 이유다.

 

근초고왕 2년조에 나오는 진씨 왕후가 여구의 왕후다. 진왕 여구는 진씨가문과 손잡고 자립위왕 한 것이다. 다음 진왕 여휘는 자립위왕을 못하자 중원왕조의 책봉으로 이를 대신하고자 하였다. 금강유역의 부여씨 진왕이 한강유역 진씨와 최초로 혼인하는 것은 비류왕 30년(333년)이다. 고고학적으로도 부여씨의 근거지인 영산강유역의 옹관묘가 이 시기에 대형화되므로 옳다.

  

3. 동진에서 책봉을 받았다.

- 4세기에는 진왕이 존재하여 한성백제왕이 백제왕의 책봉을 받을 수 없다. 삼국사기를 보면 부여씨가 한성백제의 정권을 잡은 후 동진에 사신을 보내 전지왕으로 하여금 백제왕의 책봉을 받는데(전지왕 12년) 이것이 처음이고 옳다. 근초고왕은 신라와 혼인하고 자립위왕하는 368년 이후에만 백제왕을 칭할 수 있다. 따라서 372년에 동진에 백제왕을 칭하고 사신을 보낸 기록은 맞다. 책봉은 받지 못했다. 책봉은 진왕 여구가 받았다.

  

4. 마한을 정벌하였다, 가야를 정벌하였다. 또는 칠지도를 보내는 등 왜국과 통교하였다.

- 마한은 1세기에 온조왕 때 망한다. 이후 마한은 비류가 시조로 된 백제다. 부여씨는 영산강유역에서 옹관묘 쓰던 마한인들의 성씨다. 4세기에 진왕권을 부여씨가 장악한다. 즉 마한의 왕성이 부여씨로 '백제진조인'이 이들이다. 이들이 5세기 초에 한강유역의 백제를 장악하고 새 왕통을 여니 '비유왕-개로왕- ... -의자왕'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칠지도는 230년에 진왕이 가야를 정복한 후 왜왕 비미호에게 보낸 것이다. 가야가 언제 멸망하였는가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언제 가야기록이 사라지는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백제가 왜국과 최초로 통교한 것은 광개토왕에 의해 잔국이 멸망한 다음 해인 397년(아신왕 6년)이다. 광개토왕기록과 일치하는 이 삼국사기 기록이 맞다. 근초고왕때는 일본열도에 국가가 없었다. 왜 5왕으로 시작되는 왜국의 건국은 397년 1월이다.

  

5. 비류왕의 아들이다.

- 백제본기에서 둘째 아들은 중자다. 제2자란 부자관계가 아니란 뜻이다. 근초고왕은 비류왕의 아들이 아니다. 진씨들이 계왕을 몰아내고 대신 구 해씨왕족들 중에서 선택하여 앉힌 왕이다. 자립위왕은 즉위 후 2년 내에 해야 하므로 근초고왕이 2년째에 자립위왕을 못하여 진정이 왕 대신 국정을 운영하였다는 기록은 옳다.

 

6. 진씨와 손잡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 짐작컨데 왕후가 진씨이니 진씨와 손잡고 ... 이런 주장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근초고왕이 왕권을 강화한 것은 맞으나 방법이 틀렸다. 삼국사기에 다 나온다. 진씨왕후가 출현한 기록에는 오히려 왕권이 약화되고 진정이라는 각료가 실권을 행사하고 있다. 근초고왕이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게 된 것은 재위 20년 이후인데 신라와 손잡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그렇게 써있다. 그리고 이렇게 되어야 삼국지 동이전과도 일치하고 일본서기와도 일치한다. 반면에 고이왕은 신라와 손잡는데 실패하여 근초고왕이 될 수 없었다.

 

7. 한강변 고구려식 대형 적석총의 주인이다.

- 석촌동에 있는 고구려 초기식 대형 적석총에는 근초고왕의 능이 아닌가 하는 해설이 붙어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한강변 고구려식 적석총 성립은 3세기 고이왕에서 4세기 근초고왕까지인데, 이 고분군은 근초고왕때 사라지고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이 시작된다. 고구려식 적석총은 말갈족의 묘제로서 근초고왕의 능이 될 수 없다.

 

8. 30년 재위기간 중 처음 20년이 기록이 없는 이유는 김부식이 삭제하였기 때문이다.

- 김부식은 삭제한 적이 없다. 그 전에 구삼국사 집필진이 받아보았을 때도 근초고왕 전기 20년동안의 기록은 없었다. 그러면 누가 지웠을까? 바로 삼국사기에 나온다. 근초고왕조는 재위 2년째에 자림위왕을 못하여 권력을 상실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이후 신라왕실과 혼인하여 자립위왕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즉 백제왕이 되는 것부터 섰으므로 이는 자신이 스스로 삭제한 것이다. 따라서 자립위왕 이전의 자기 기록을 삭제하기 위해 노력하였을 것이므로 그 시기에 고흥이 서기를 썼다는 기록은 타당하다. 그러면 3루왕 시대는 어떤가? 자립위왕하기 전이라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자신들이 역사서를 쓴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

근초고왕(近肖古王)은 비류왕(比流王)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체격이 크고 용모가 기이하였으며, 식견이 넓었다. 계왕이 돌아가시자 그가 왕위를 이었다.

近肖古王 比流王第二子也 體貌奇偉 有遠識 契王薨 繼位

  

2년(서기 347) 봄 정월,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 진정(眞淨)을 조정좌평으로 삼았다. 진정은 왕후의 친척으로서 성질이 사납고 어질지 못하였으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까다롭고, 권세를 믿고 제멋대로 일을 처리하여 백성들이 그를 미워하였다.

二年 春正月 祭天地神祇 拜眞淨爲朝廷佐平 淨王后親戚 性狠戾不仁 臨事苛細 恃勢自用 國人疾之

  

21년(서기 366) 봄 3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二十一年 春三月 遣使聘新羅

  

23년(서기 368) 봄 3월, 초하루 정사일에 일식이 있었다. 신라에 사신을 보내 좋은 말 두 필을 주었다.

二十三年 春三月丁巳朔 日有食之 遣使新羅 送良馬二匹

  

24년(서기 369) 가을 9월, 고구려왕 사유(斯由, 고국원왕)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와서 주둔하며 병사를 풀어 민가를 노략질하였다. 임금이 태자에게 병사를 주어,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불시에 공격하여 그들을 격파하고 5천여 명을 사로잡았는데, 노획한 물품은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겨울 11월, 한수 남쪽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였다. 모두 황색의 깃발을 사용하였다.

二十四年 秋九月 高句麗王斯由帥步騎二萬 來屯雉壤 分兵侵奪民戶 王遣太子 以兵徑至雉壤 急擊破之 獲五千餘級 其虜獲分賜將士 冬十一月 大閱於漢水南 旗幟皆用黃

  

26년(서기 371), 고구려가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임금이 이를 듣고 패하(浿河, 예성강) 강가에 복병을 배치하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불시에 공격하니, 고구려 병사가 패배하였다.

겨울, 임금이 태자와 함께 정예군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범하여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왕 사유가 필사적으로 항전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임금이 병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

二十六年 高句麗擧兵來 王聞之 伏兵於浿河上 俟其至 急擊之 高句麗兵敗北 冬 王與太子帥精兵三萬 侵高句麗 攻平壤城 高麗王斯由 力戰拒之 中流矢死 王引軍退移都漢山

  

27년(서기 372) 봄 정월, 진(晉)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지진이 났다.

二十七年 春正月 遣使入晉朝貢 秋七月 地震

  

28년(서기 373) 봄 2월,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청목령(靑木嶺)에 성을 쌓았다. 독산성(禿山城) 성주가 주민 3백 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도망갔다.

二十八年 春二月 遣使入晉朝貢 秋七月 築城於靑木嶺 禿山城主率三百人 奔新羅

  

30년(서기 375) 가을 7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임금이 장수를 보내 방어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임금이 다시 병사를 크게 동원하여 보복하려 했으나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다.

겨울 11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三十年 秋七月 高句麗來攻北鄙水谷城 陷之 王遣將拒之 不克 王又將大擧兵報之 以年荒不果 冬十一月 王薨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백제는 개국 이래 문자로 사실을 기록한 적이 없다가, 이때에 이르러 박사(博士) 고흥(高興)이 처음으로 『서기(書記)』를 썼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흥이라는 이름이 다른 서적에 나타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古記云 百濟開國已來 未有以文字記事 至是 得博士高興 始有 書記 然高興未嘗顯於他書 不知其何許人也

   

[네이버 지식백과] 근초고왕 [近肖古王]

 


댓글 '12'

비몽사몽

2013.08.21 17:22:08
*.201.252.236

영산강유역에서 옹관묘,주구묘를 사용하던 마한인들이 고구려의 잔국토벌이후 일부는 일본열도로, 또 일부는 삼한백제를 접수하였다면
삼한백제에도 일본열도의 전방후원분같은 옹관묘나 주구묘가 나타나야 하는것 아닌가요?
한강유역에서 그러한 묘제의 변화가 있었나요?

一道安士

2013.08.21 18:31:59
*.232.249.89

다음은 오타로 보입니다.; "일부는 삼한백제를 접수하였다면" -> '일부는 한성백제를 접수하였다면' 으로 고쳐야지요.

"영산강유역에서 옹관묘,주구묘를 사용하던 마한인들이" => 이들이 부여씨입니다. 부여씨는 영산강유역 마한세력의 성씨입니다. 이들이 3세기에 금강유역 삼한백제의 중앙무대에 진출하고 4세기에 진왕권을 장악합니다. 여구, 여휘 등이 이들입니다. (삼한사의 재조명2, 제45장 백제 부여씨의 흥기)
마한세력이 5세기초 한성백제를 접수하고 단 2명의 왕만 배출하였습니다. 비유왕과 개로왕입니다. 그리고 본래 자신들의 영역인 공주로 남하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한강유역에 자신들의 고분군을 남길 시간이 없었다고 봅니다. 한강유역은 말갈고분군(석촌동 고구려식 적석총)이 대표합니다.

3세기에 말갈이 세운 나라가 고이왕의 한성백제 외에 황해도에 나갈의 대방국도 있는데 왜 말갈고분군이 한강유역에만 나오고 황해도에는 안 나오느냐도 백제본기에 설명이 있습니다. 3세기에 세운 대방국이 3세기에 고구려에게 망해버렸기 때문에 황해도에 말갈고분군이 축조될 충분한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는 고고학적으로도 정확한 것이 4세기 초에 이미 황해도에 고구려의 남평양이 건설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고구려가 미천왕 15년에 침공한 남쪽의 대방군은 요동반도입니다.

옹관묘는 엄밀히 말하면 일반적인 묘제라기 보다는 고대 납골당같은 집단묘제입니다. 분구 하나에 옹관이 10개씩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왕릉으로 쓰기에는 부적합합니다. 이들이 타지역에 가서 왕이 되면 옹관묘를 왕릉으로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지역묘제를 크게 만들어 쓰거나 무령왕릉처럼 당시 유행하던 외국 묘제를 쓰거나,... 등등 이었을 것입니다.

2013.08.23 12:39:23
*.181.191.73

기성역사계에선 백제(한성백제)와 진왕의 관계가 없읍니다.
진왕도 백제를 칭했고 백제가 금강,한강,영산강을 포함하는 전지역이 백제.. 느슨한 백제연방이라고 해야 맞나...그런 개념이 없읍니다.

그러니 2,3,4,5,6 세기에 오직 서울에서 태동된 백제만이 있을뿐이고 백제왕이라고 삼국사기나 중국에 칭해진것은 다
서울에서태동된 백제인줄 알고 있지요.

푸른등선

2013.08.25 13:09:51
*.64.31.69

기존 한국 학계에서는 여기서 언급되는 '한성백제' '삼한백제'와 같은 개념의 이론이나 가설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지 궁금하네요. 상당히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이론이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아무래도 도제식 문화가 강한 역사학계의 특성상 선배나 스승의 이론을 깨는 새로운 이론이 매우 터부시될거라는 생각은 듭니다만...혹시 일본 학계에서는 어떤가요? 삼한백제가 실제 현대 일본으로 이어졌다고 봐야 될지도 모르는데 이런 관점에서의 역사 연구가 진행된게 없는지도 궁금하네요. 물론 이게 아전인수식으로 (현대의 관점에서 과거를 재구성하려는 방식으로) 임나일본부설처럼 고대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관점으로 왜곡될 가능성도 있기는 하겠지만요....아무튼 백제는 참 미스테리한 존재네요...

아흐

2013.08.31 09:01:04
*.181.191.73

삼한백제니 한성백제니 하는게 따로 있는게 아니고 편의상 그렇게 정한거지요. 백제가 초기에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아니고 현대말로 하자면 느슨한 백제연방이다보니까 전 백제 영역내의 지방정부들중에서 강력하게 부상해서 백제왕이라고 자칭타칭하고 역사책에는 특별히 어디의 지방정부에서 칭하는 백제라는 표식이 없으니 모르면 나중에 중앙집권적이 된 백제가 처음서부터 백제인줄 착각하는데 기존역사학계라는데가 다 그렇게 착각하고 있읍니다. 그러니 백제초기역사 해석하는데 이해못할 역사적사건들이 많게 되지요.

비몽사몽

2013.08.27 17:27:32
*.201.252.236

고구려 태조왕은 재사의 아들인데..태조왕이 해씨에서 고씨로의 왕통교체라고 주장하셨는데 장성한 아버지가 있음에도 어린 자식이 왕위에 오르는게
왕통교체의 가능성을 떨어트리는게 아닌가요? 왕좌를 찬탈하는데 어린아이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태조왕이 남해순수를 행한후 마한군이 요서에 나타났다는 점은 인과관계가 있어 보이긴 하지만.. 당시가 태조왕 62년이고 7세에 왕위에 올랐다고하더라도 70이 다되어가는 노인인데 장기간의 여행이 가능했을지..또한 요서에 마한군이 나타난건 태조왕 69년인데 너무 시간차가 많이 나는것 아닐까요??

一道安士

2013.08.27 19:28:47
*.232.249.88

태조왕에서 해씨에서 고씨로의 정권이 교체되는 것은 왕성이 바뀌는 삼국사기로도 확실하다고 봅니다. 태조왕이란 시호도 새왕통이라는 뜻으로 봅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정권이 교체될때마다 앞에 혈통으로 연결시켜 정통성을 부여합니다. 그만큼 혈통을 통한 정통성의 강조가 효과적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재사가 과연 유리왕의 아들이었는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재사가 일찍 죽었을 수도 있고, 오래 살았다면 재사와 태조왕의 관계가 대원군과 고종의 관계나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태조왕이 어린 나이에 왕이 되니 태후가 섭정한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모본왕 이후 태후가 고씨가문의 힘으로 아들을 왕위에 앉혔다는 뜻입니다.

태조왕은 재위 69년 75세에 죽었다고 봅니다(삼한사의 재조명 1, 167쪽). 그러면 태조 62년의 남해순수시 나이는 대략 68세입니다. 그런데 훗날 475년에 장수왕이 남해 순수가 아니라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대 백제 전쟁에 나갈때도 나이가 83세였습니다. 따라서 68세 남해순수는 가능하다고 봅니다.

말씀하신대로 7년이라는 시간차는 조금 긴 느낌입니다. 태조 62년과 67년 사이에는 후한과의 전쟁이 없고, 68년에는 고구려가 먼저 공격합니다. 그리고 반격을 당하는 것이 69년이니 이때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여구

2013.09.17 13:19:38
*.11.71.253

삼국사기에 근초고왕은 여구로 나오는데 이상하군요.

여구

2013.09.17 13:22:53
*.11.71.253

당시 금강유역에 있던 진왕 여구가 사서에 나오는지 궁금합니다.

그냥

2013.09.19 03:33:02
*.181.191.73

삼국사기에 근초고왕이 여구라고 나오지 않지요. 기성학계에서 어설푸게 비슷한연대니까 근초고왕이 진서에 나오는 여구라구 추론한거지요. 진서에 백제여구로부터 372년(?) 1월과 6월에 백제로부터 동진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고 했는데 삼국사기의 근초고왕조에 동진에 사신을 보낸 1월에는 백제에서 보냈다고하며 백제왕의 이름이 안나오고 삼국사기 근초고왕조의 정월에 동진에 보냈다고 하니까 근초고왕이 보낸거고 6월에는 백제왕 여구가 보냈다고 하고 삼국사기에는 보낸사실이 나오지 않으므로 여기서는 여러정황상 금강유역에서 한성백제의 유력가문인 진씨계의 왕비를 들이고 자립위왕한 여구가 보냈다고 추정하는겁니다. 일도안사님 맞지요?

一道安士

2013.09.20 16:21:46
*.95.2.152

맞습니다.
372년 1월에 근초고왕이 백제왕의 자격으로 사신을 보낸 것이 다음 기록입니다: 二年 春正月 辛丑, 百濟林邑王 各遣使貢方物
하지만 근초고왕은 책봉은 받지 못하였고 책봉은 한반도에서 가장 큰 나라의 왕이던 진왕 여구가 받았습니다.

이 다음의 백제왕 책봉은 마찬가지로 진왕 여휘가 받습니다. 하지만 여휘는 자립위왕을 못해 왕세자를 칭해야 했고 책봉으로 이를 보완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다음 진왕이 응신인데 응신은 고구려와 전쟁 중이라 중국왕조에 사신을 보내지 못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 중국왕조에 사신을 보낸 진왕은 인덕(찬)인데 본인이 자립위왕을 하여서 6국도독이네 하는 따위의 책봉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불필요합니다. 대신 이제부터는 왜왕입니다.
이 다음 책봉을 요구하는 것은 반정(진)인데 그는 왕이 되었으나 왕후의 신분이 "황후"가 아니라 "황부인"으로 낮아 자립위왕이 불완전하여 중원왕조 책봉으로 보완하고자 하였습니다.
등등... 이 다음도 제 책 [삼한사의 재조명 2]에서 설명한 대로입니다.

5세기 왜5왕의 외교는 사실은 혼란한 왜국 내부에서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비류왕-계왕-근초고왕조에는 여구라는 이름만 안 나올뿐 여구에 관련된 기록들이 여러개 나옵니다.

옙..

2013.10.01 10:01:19
*.181.191.73

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가지 백제를 취급하는 역사드라마는 다 삼국사기등의 역사적사실의 해석에 부적합한 오직 한강유역의 십제로부터 자라난 백제만 있었고 백제라고 표현된것은 다 "한성백제"라는 인식으로 '근초고왕'이라는 드라마도 있었읍니다만 다 마찬가지...

그런데 이것을 금강/공주에 초기에 한성보다 더 강하면서 스스로 백제라고 칭하는 세력이 있었고 한성백제와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면서 광개토왕의 남진때까지 그런관계였다는 사실로 그리며 드라마를 만들면 더 역사적사건에 부합되고 재미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근초고왕---전지왕까지...그러면 이야기가 다양해지며 흥미진진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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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7-04
  • 조회 수 2249

국립중앙박물관은 3일 “1921년 금관총에서 출토된 환두대도(고리자루큰칼)에서 전형적인 신라 초기식 표기의 ‘이斯智王(이사지왕)’ ‘이(이)’ ‘十(십)’ 명문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중앙박물관은 “환두대도 보존처리 과정에서 명문을 확인하고 판독했다”며 “경...

백제사 [고침]▩백제의 차(茶)문화를 설명하는 글에 대한 이의제기 [2]

  • 2013-06-03
  • 조회 수 1400

올림픽 공원 안에 있는 한성백제박물관은 지난해 12월 22일부터 올해 2월 24일까지 <백제의 맛 - 음식이야기>라는 특별 전시회를 열었다. 나는 올해 2월 12일 그 박물관에 가서 전시회를 보았는데, 특히 나무도마나 절구나 나무로 만든 밥상이나 굽다리 접시...

Q&A ▩[답변]한국어/조선어와 일본어가 달라진 까닭 2 - 방카이 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 [2]

  • 2013-06-03
  • 조회 수 2033

방카이 님의 질문을 읽고 제 가설을 다시 검토했습니다. 백제 말을 다룬 책을 읽어보니, 그 책에 님이 던지신 첫 번째 질문과 비슷한 가설이 나오더군요. 도수희 충남대학교 명예교수(서기 1999년 현재. 이하 도 전 교수로 부름)님이 “백제어와 신라어는 계통...

고조선 ▩첫 번째 단군의 구체적인 나이에 대한 단재의 고찰

  • 2013-04-20
  • 조회 수 2248

※[단독]‘대동역사’ 필사본 발견… 신채호 초기 역사학 ‘베일’ 벗다 -『세계일보』서기 2013년 4월 18일자 기사 - 김종복/박준형 박사 분석 논문 - 1907년 집필/7년 후 필사 - “단군 32세에 고조선 건국” - 흥미로운 주장 등 실려 눈길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인 ...

가야사 대성동 91호분 로만글라스 보충기사

  • 2013-03-10
  • 조회 수 1966

[뉴스웨이 경남 강우권 기자] 김해시 대성동고분군에서 금관가야에서는 처음이면서, 한반도내에서 출토된 로만글라스(로마양식 유리용기)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 대성동91호분에서 출토되었다. 대성동 91호분은 김해시 대성동고분박물관이 문화재청의 허가...

가야사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로만글라스 발견 file

  • 2013-03-10
  • 조회 수 1925

4세기 전반에 조성된 김해 대성동 91호 고분에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로만글라스 조각이 출토되었다는 뉴스가 떴다. 유리병의 손잡이 끝 부분이 출토된 것이다. [이하 기사 인용] 김해시는 4세기 전반(서기 340년 전후)에 조성된 대성동91호분에서 약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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