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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총의 주인

신라사 조회 수 2249 추천 수 0 2013.07.04 13:55:52
一道安士 *.147.254.79

국립중앙박물관은 3일 “1921년 금관총에서 출토된 환두대도(고리자루큰칼)에서 전형적인 신라 초기식 표기의 ‘이斯智王(이사지왕)’ ‘이(이)’ ‘十(십)’ 명문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중앙박물관은 “환두대도 보존처리 과정에서 명문을 확인하고 판독했다”며 “경주박물관에 소장된 금관총 출토 환두대도에서도 ‘十(십)’ ‘이(이)’ ‘八(팔)’ 명문이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이제 금관총의 주인을 추정해보기로 하자. 어디까지나 재미로 해보는 추정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는 너무 내 말에 의존하지 말기를 바란다.


금관총은 1921년 9월 가옥공사 중 우연히 발견되어 발굴되었는데 출토된 금관은 현재 국보 제87호, 금으로 만든 허리띠와 거기에 달려 있는 장식품은 국보 제88호, 금제 교구(금으로 만든 허리띠고리)는 국보 제89호로 지정되었다. 그 외에 금귀걸이, 금제 뒤꽂이, 금제 관식 등이 장신구·무구(武具)·용기 등이다. 특히 구슬 종류만 총 3만 개가 넘게 나왔다. 금관총의 외관은 지름이 50m, 높이 13m 정도의 원형인데 당시 신라고분들 중에서도 대형급이다. 신라의 5-6세기 고분을 보면 가장 먼저 축조된 황남대총이 가장 크고 가장 나중에 축조된 천마총이 가장 작은데 이는 외부에서 들어온 정복국가가 현지에 적응하며 토착화되는 과정이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전방후원분이 5세기에 가장 크고 조금씩 작아지다가 7세기에 사라진다.


금관총 금관은 순금관이다. 그 외에 금령총, 서봉총, 천마총 금관이 순금관이고, 가장 큰 황남대총 금관은 금동관이다. 순금관은 왕과 왕비만 착용하였다고 생각되는데, 거대고분을 축조한 마립간시대에 다음처럼 왕이 6명이다. 발음이 비슷하다고 하여 소지왕, 사부지갈문왕, 이사부 등을 뽑기도 하나 발음은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어도 전체를 판단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왕들의 시호(삼국사기의 왕명)는 법흥왕때 결정되어졌다고 추정된다. 예를 들어 신라에는 파사이사금과 파사매금이 있는데, 서역에서 온 신라왕이란 의미로 둘 다 경주에 백성을 이끌고 내려온 왕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파사매금에게는 훗날 내물이사금이란 시호를 준다. 파사매금과 내물이사금은 발음상으로는 별 관련이 없다.


1. 내물왕: 중기신라 건국자

2. 실성왕: 비내물왕계

3. 눌지왕: 458년 죽음

4. 자비왕: 479년 죽음

5. 소지왕: 500년 죽음

6. 지증왕: 514년 죽음


금관총에서 3자루의 환두대도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유물과 구슬 같은 장신구가 나왔다고 주인을 여성으로 보는 것은 오늘날의 눈으로 판단하는 것으로서 잘못이다. 여성이 주인일 가능성은 제외한다. 황남대총 북분이 남분보다 나중에 축조되었는데 이것이 왕비능이다.


2세기 고구려 태조왕, 3세기 백제 고이왕, 4세기 신라 내물왕이 삼국의 중간 건국자들인데 이들이 정복자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란이 있었던 것을 보았다. 나는 이들이 정복자였다고 본다. 태조왕이 정복한 나라는 고구려고, 고이왕이 정복한 나라는 한성백제고, 내물왕이 정복한 나라는 신라다. 고구려만 국가 내에서 다른 계열이 정권을 장악한 것이고, 백제와 신라는 외부인들이 들어와 무력으로 정복한 것이다. 고이왕의 실체는 백제본기의 백제를 공격하던 말갈군이고, 내물왕의 실체는 고구려를 공격한 연나라(전연) 군대다. 정복자의 특징 중 하나가 대형고분 축조인데 대표적인 곳이 5세기의 일본이다.


금관은 본래 지증해와 흑해 부근에서 시작한 서양문명의 흔적이다. 신라와 가야를 제외하고 고대 동아사이에서 통치자가 금관을 쓴 나라는 없다.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금제양식은 관이 아니라 머리에 꽃는 장식이다.


금관이 출토된 고분 중 고분 중 가장 먼저 축조된 것이 가장 큰 5세기의 황남대총이고, 가장 늦게 축조된 것이 가장 작은 6세기의 천마총인데 이는 당연하다. 정복자의 정권이 공고해지고 피지배민족과 동화되면 고분은 점차 작아지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6세기, 일본열도는 7세기에 대형고분이 사라진다. 한성백제 고이왕계열은 4세기에 구왕족인 해씨들에게 정권을 뺏겨서 근초고왕 이후 한강변 적석총이 사라지며, 신라는 정권이 공고해져서 적석목곽분이 사라진다. 4세기 후반 백제와 고구려려의 전쟁이 시작되는 시점이 말갈족 묘제인 한강변 고구려식 적석총의 소멸시기와 같다.


그럼 백제의 부여씨는 무엇인가? 이들은 원래 영산강유역에서 옹관묘 쌓고 살던 집단으로 3세기에 금강유역 삼한백제 진왕의 왕비족으로 중앙무대에 진출하다가, 4세기에 진왕권을 장악한다. 그러다 4말5초에 고구려와 전쟁하다 패해서 왕족이 왜국으로 피신하고 남은 일부가 다시 한성백제의 왕권을 장악하여 백제가 망할 때까지 왕족이었다. 따라서 왜국의 왕족도 부여씨다 (상세한 설명은 삼한사의 재조명 2). 


영산강유역의 3대 성씨가 부여씨, 목씨, 사씨다. 일본서기 신공 49년조에 나와 영산강유역으로부터 항복을 받는 목라근자는 이때 자신의 근거지를 공격한 백제장군이 아니다. 그는 응신이 죽은 403년, 즉 백제 아신왕 12년에 왜국을 구하기 위하여 신라를 공격한 백제 장군이다. 목협만치는 그의 아들로 404년생이다. 일본서기 신공이전의 기록은 무내숙녜를 비롯하여 후대의 인물을 대거 끌어다 만들었다.


가장 투박하고 전쟁무구가 대규모로 출토된 황남대총은 전쟁 중에 사망한 내물이사금의 능으로 본다. 그는 중앙아시아 시절에 왕족이 아니었는데 한반도로 들어와 새로운 국가를 건국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워, 왕족의 부인을 왕비로 맞고 새 왕통을 열었다고 본다. 반면에 봉분은 가장 작으나 가장 세련된 유물들을 쏟아낸 6세기의 천마총은 지증왕의 능으로 본다. 나머지는 그 가운데다.


금령총금관은 이상하게도 곡옥이 전혀 달려있지 않은데, 곡옥이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에서 다산을 의미한다는 김병모 선생의 말을 따르기로 하면, 위의 6명 왕 중에 자식이 없었던 왕은 소지왕뿐이다. 즉 금령총은 소지왕의 능으로 보는 것이다.


실성왕은 유일한 비내물계인데 내물계인 눌지왕에게 실각했다. 따라서 크고 화려한 고분을 축조하기는 어렵다. 고구려에 실성을 인질로 보낸 것은 그만큼 실성이 지체높은 신분이었기 때문이지 고구려가 멍청해서가 아니다.  이들이 신라에 들어오기 전에 실성계의 신분이 내물계보다 더 높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내물계가 중기신라를 건국하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여기서 '계'란 씨족집단을 뜻한다. 눌지왕이 내물계란 말은 반드시 내물왕의 아들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양자여도 되고, 피를 나눈 가까운 친척이어도 된다는 뜻이다. 비슷한 예로 내물이사금이 미추이사금의 딸을 왕비로 맞은 것이 아니다. 혈통으로부터 권력의 정당성을 찾는 입장에서 내물왕을 선대에 연결시키기 위한 조치로 그 외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내물왕비는 아마 미추계열의 여인이었을 것이다.


이제 이사지왕의 후보로 2명이 남았다. 5세기 중반의 눌지왕과 5세기 후반의 자비왕이다. 그런데 칼을 보면 손잡이에 우리가 흔히 아는 용무늬나 봉황무늬가 없다. 가야무덤에서 발굴되는 5세기 후반의 환두대도들도 다 손잡이에 용무늬나 봉황무늬가 새겨져 있다. 황남대총의 환두대도들도 용무늬나 봉황부늬가 없다. 이는 백제를 제외하고 다른 지역에서 용무늬나 봉황무늬가 아직 일반화되기 전이라는 뜻이다. 환두대도는 4세기 후반에 금강유역에서 시작한다. 칠지도는 상감대도인데 상감대도는 2세기에 후한에서 유행하던 형식이다. 금과 음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환두대도에 비하면 아주 고형의 원시적 칼이다.


또 이사지왕이라고 쓴 한자 글씨가 투박하다. 이들이 4세기 중반에 신라에 들어올 때는 한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신라에 들어와 피지배민족을 통치하고 적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자를 배우게 되었다. 4세기 후반에 근초고왕이 내물이사금에게 국서를 보냈을 때 내물이사금은 이를 직접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사지왕이란 글자의 세련됨이 황남대총 북분에서 나온 부인대라는 명문의 글자와 비슷한 정도다. 이들이 세련된 한자를 쓰기 시작하는 것은 6세기부터다. 5세기 초중반에는 아직 투박한 글자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이를 요약하면 이사지왕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환두대도가 출토된 금관총은 5세기 중반에 축조된 눌지왕릉 아니면 5세기 후반에 축조된 자비왕릉이라고 본다. 만일 둘 중에 꼭 하나만 택하라면 앞의 눌지왕릉일 가능성이 조금 더 크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사지왕.jpg


금관총금관.jpg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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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8 12:29:08
*.6.1.61

8.27신문에 이사지왕을 소지왕으로 추정하더군요..이는 대명사..사지는 소지의 다른 표기라고... 나름 멋진 추리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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