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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공원 안에 있는 한성백제박물관은 지난해 12월 22일부터 올해 2월 24일까지 <백제의 맛 - 음식이야기>라는 특별 전시회를 열었다.

 

나는 올해 2월 12일 그 박물관에 가서 전시회를 보았는데, 특히 나무도마나 절구나 나무로 만든 밥상이나 굽다리 접시나 작은 식칼 같은, 백제 사람들이 쓰던 물건들이 인상적이었다.

 

“백제 영토”였던 곳에서 쌀 뿐만 아니라 “밀”이나 “녹두”가 나왔다는 설명문을 읽고 ‘이 땅의 농부들은 오래 전부터 밀을 길렀구나! 우리밀의 역사가 짧은 게 아니네.’라고 생각하며 깜짝 놀랐다.

 

또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서 “상어”뼈가 나왔다는 설명문을 읽을 때는 ‘상어가 물고기와 사람을 잡아먹지 않나? 그런 물고기를 잡아먹다니 용감하네! 백제 사람들은 상어고기를 무슨 맛으로 먹었지?’라는 의문이 들어 한동안 멍하니 있었고, 백제 땅에서 나온 “매실/박/복숭아/참외/포도” 씨앗을 보면서 ‘고려시대부터 포도를 먹었다.’는 나의 옛 지식을 버려야 했다(사실, 포도 씨앗이 가장 신기했다!). 풍납토성에서 나온 “견과류(예컨대 밤이나 잣이나 은행 )”는 내게 ‘밤과 잣을 씹어먹는 백제 사람’이라는,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나아가 서기 3~4세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700~1800년 전에 백제 사람들이 고래도(!) 잡아먹었다는 사실(그 증거로 백제의 “생활유적”에서 나온 “고래뼈”가 전시되었다)은 ‘한국의 고래사냥’ 하면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대략 3000~3500년 전)에 경상북도 바닷가에서 사람들이 하던 고래사냥만 떠올렸던 나에게 일종의 ‘충격’을 안겨주었다(1800년 전의 “물범 아래턱뼈”는 백제 사람들이 물범을 사냥해서 그 고기를 먹었다는 증거일 테니 더 이상은 백제인의 식성이 잡식성임을 의심하지 말자).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내 눈길을 끈 것은 백제의 차(茶) -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녹차(綠茶) - 문화를 설명하는 글이었는데, 그 글에 따르면 백제 사람들은 “시루에 찻잎을 쪄서 익히고, 쌀로 풀을 끓여서 혼합해 떡차(餠茶)를 만들었다.”고 한다. ‘차’ 하면 찻잎을 그냥 뜨거운 물에 우려서 아무것도 섞지 않고 마시는 것이라고 배운 내게, 백제시대의 차 마시는 법은 ‘조금’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더 재미있는 것은 “떡차를 말려놓았다가 마실 때 작은 절구에 넣고 갈아서 가루로 만든 뒤 그것을 자기 그릇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여기에 파/생강/귤 껍질 등의 양념을 넣어 마시는데, 숙취해소에 좋았다고 한다.”는 설명문이었다. 나는 홍차에 우유나 레몬즙/복숭아즙을 넣는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녹차에 쌀로 만든 풀을 섞거나 “파/생강/귤 껍질”을 넣어서 마신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고, ‘그렇게 만든 차는 어떤 맛일까? 한 번 마셔보고 싶어.’라고 생각하며 한동안 (그 설명문이 붙은) 전시물을 떠나지 못했다.

 

그러니까 아주 짧게 말하자면 이 전시회는 나를 비롯한 관람객들에게 백제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백제의 음식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백제 사람들을 보다 가깝게 여길 수 있는 길을 마련해주었다. 이 전시회를 연 한성백제박물관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와는 별도로, 이 전시회의 설명문 가운데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있었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겠다. 내가 ‘이건 잘못된 설명이야.’라고 생각했던 설명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백제 사람들의 반찬이 - 고춧가루를 넣지 않고 - “채소를 소금으로 절인 김치”라는 설명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성백제 시기에 귀족들은 중국 남조(동진)의 영향으로 차문화를 받아들였다.”는 설명문이었다. 이 가운데 내가 이 글에서 반박하고 싶은 것은 후자(後者)다(전자도 중요한 문제지만, 그것은 다른 글에서 따로 다룰 예정이므로 이 글에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백제가 동진(東晋)과 친하게 지내고 그 문화를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동진이 세워지기 268년 전, 이 땅에 차문화가 뿌리내렸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역사에서 맨 처음 차(茶)를 마시기 시작한 사람들은 대가락(大駕洛 : 훗날의 금관가야. 오늘날의 김해)의 왕족과 귀족인데, 차문화는 세월이 흐르면서 가야 연방의 다른 가야국으로 퍼졌으며, 삼한백제가 가야의 남쪽 끝을 정복하고 변한인을 옮겨 살게 한 서기 73년이나, 삼한백제가 가야 7국을 정복하여 멸망시킨 해인 서기 227년에 삼한백제의 왕궁으로 건너가 삼한백제의 왕족과 귀족들도 차를 마시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가야 사람들이 차를 마셨다고? 말도 안 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물증’을 소개한다.

 

이능화(李能和. 서기 1869년 ~ 서기 1943년) 선생의 책인『조선불교통사』에는 “김해의 백원산에는 죽로차(竹露茶)가 있다. 세상에서는 수로왕비인 허씨(許氏)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茶) 씨라고 전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 김해 허씨의 뿌리인 허(許)씨족이 이 땅에 건너온 해가 서기 48년이므로 - 가야의 차 문화는 서기 48년 이후에 김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우리 차를 연구한 ‘여연’ 스님의 말에 따르면, “경남 김해 등지에서 확인된 ‘장군차’라 불리는 가야 차 재배지”가 있으며(가야 연방이 차나무를 길렀다는 증거다), “가야 차는 아직 정확하게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몇몇 문헌을 통해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가야인의 후손이 남긴 기록인『가락국기』에도 차인 듯한 음료가 나온다. 인용문을 읽어보자.

 

(『가락국기』는 - 옮긴이) 허황후가 가져온 ‘난액(蘭液)’이란 독특한 음료에 대해서 “왕후는 배를 매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며 입던 비단 바지를 벗어 선물로 삼아, 신령에게 주었다. 왕후가 점점 행재소에 가까이 오니 왕이 나아가 맞아 함께 만전으로 들어왔다. 잉신 이하 여러 사람은 뜰 아래서 뵙고 물러가니 왕이 유사에게 명하여 잉신 부처(夫妻. 남편[夫]과 아내[妻] -> 부부 : 옮긴이)를 인도케 하기를, 이들을 각방에 두고 그 이하 노비는 한방에 5~6명씩 두어 난액과 혜서를 주고, 이에 왕과 후(后)가 함께 침전에 계실 때 후가 왕께 조용히 말하기를 나는 본래 아유타국의 공주인데 ….”하고 적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로 ‘난액’이다. 난액을 그대로 풀이한다면 아주 향기로운 음료라는 뜻이다. 차인(茶人. 차를 다루고 마시는 사람들 - 옮긴이)들은 바로 ‘난액’이 차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차』, 70쪽

 

여연 스님과 그가 인용한 다인(茶人)들은 ‘난액’을 녹차로 풀이하는데, 찻잎은 덖어서 뜨거운 물에 우리면 특유의 향기를 풍기므로 나 또한 “난액”이 차라고 생각한다.

 

“기록은 후대의 사실을 그 이전에 일어난 일처럼 꾸며서 전할 수 있다. 게다가 세상 사람들이 글이 아니라 말로 전하는 역사는 그 내용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조작될 가능성이 없는 물증, 그러니까 식물 그 자체를 보자.

 

“가야국의 영토였던 김해, 밀양, 사천 등지에서는 인도 아삼 지방에서 자라는 품종의 차나무 군락이 발견되고 있다(여연 스님. 이하 존칭 생략).” 이는 허황옥 공주가 바라트(인도의 정식 국호)인 “아유타국”에서 왔다는『가락국기』의 기록과 맞아떨어지며, 허씨들이 가야로 오면서 차 씨앗을 가져왔다는 『조선불교통사』와도 모순이 없다.

 

(물론 나는 허씨족이 아삼 지방에서 김해로 바로 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허씨족은 아삼에서 서한[西漢. 전한[前漢]의 다른 이름. 도읍이 ‘서쪽’인 장안[長安]에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으로 건너와서 오랫동안 서한에서 살았을 것이고, 신[新]나라에서는 지배층으로 살다가, 신나라가 무너지고 동한[東漢. 후한[後漢]의 다른 이름. 도읍이 ‘동쪽’인 낙양에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이 세워지자 유수[劉秀. 동한을 세운 사람]의 보복을 피해 가야로 달아났을 것이다. 허씨족의 이동과 정착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따로 다룰 것이다)

 

비록 여연이 “김해, 밀양, 사천 등지에서 드문드문 발견되는 큰 차나무 종자들은 역사적 근원을 찾기에 요원(아득히 멂. 의역하자면 문맥상 ‘힘듦’으로 풀이할 수 있다 - 옮긴이)”하다고 말하나, 이 지역들은 가야(김해/밀양)와 변한(사천)의 근거지였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차나무 종자들”이 나온다는 사실은 가야인과 변한인이 차나무를 길러 차를 마셨다는 증거로 봐야 한다.

 

이상의 증거들로 미루어볼 때, 가야의 왕족/귀족은 동진이 세워지기 전부터, 그것도 나라가 세워진 지 얼마 안 되던 해부터 차를 마셨음을 알 수 있다. 차와 관련된 기록이 대가락(금관가야)을 다룬『가락국기』에 나오고 차나무가 김해에 있으며 허황옥이 차 씨앗을 가져왔다는 전승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처음에는 김해에서 차를 마시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차나무가 밀양과 사천에서 자라는 까닭은 대가락 왕실이 다른 가야국의 왕실에 차 씨앗을 나눠주었고, 그들이 자신들의 땅에 차 씨앗을 심고 차나무를 길렀기 때문인 듯하다. 차를 마시는 문화가 다른 가야국에도 퍼진 것이다. 물론 차는 아무나 마시는 음료가 아니었고 왕이나 왕족, 귀족, 불교 승려만 마실 수 있었을 것이다.

 

(중국에서도 한[漢]나라 때 차는 음료가 아니라 ‘약’으로 쓰였고, 황제나 황족, 귀족, 호족, 부자들만 마실 수 있을 정도로 귀했다. 차가 대중적으로 널리 퍼진 것은 당[唐]나라 때의 일이다)

 

허씨족은 가야에 불교(상좌부[上座部] 불교. ‘소승불교’라는 말은 대승불교 교단이 상좌부 불교를 깎아내리려고 만든 말이다)와 차 씨앗을 함께 가져왔을 것이며, 차를 일종의 약(藥)으로 여겨 몸의 건강을 지키고 정신을 맑게 하는 데에 썼을 것이다(이는 에티오피아의 기독교 수도사들이 커피를 잠을 쫓고, 정신을 맑게 유지하는 데에 쓴 사실과 비슷하다. 또 중세시대의 “이집트와 예멘에서는 커피가 종교적 의식에 사용되기도 했다[위키백과].”).

 

가야 연방이 차를 마시기 시작한 시기가 서기 48년 이후라고 했는데, 그럼 그 구체적인 해를 추측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가락국기』에 따르면 허씨족이 대가락에 도착한 시기는 서기 48년 7월 27일(음력)이고 뇌실청예왕(수로왕)이 허왕후(許王后)와 함께 궁궐로 돌아간 시기는 서기 48년 8월 1일(음력)이기 때문이다. 음력 7월이라면 양력(오늘날 쓰는 달력)으로는 8월인데, 이 때 차 씨앗을 심었다 하더라도 차나무가 자라서 찻잎을 딸 수 있을 때까지는 아무리 짧게 잡아도 1년이 걸리므로, 대가락 왕실은 서기 49년이 되어서야 김해에서 자란 차나무의 찻잎을 맛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셈(계산)이 옳다면 가야에서 차문화가 시작된 시기는 서기 49년이다.

 

나아가 차나무는 양력 10~11월에 꽃이 피고 열매는 양력 11월에 익기 때문에, 다른 가야국의 왕과 왕족들이 차 씨앗을 받은 시기는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서기 49년 11월(양력) 이전은 아니다. 밀양과 사천의 차나무는 서기 49년 이후에 싹이 튼 것이라고 봐야 한다.

 

차나무가 싹이 튼 시기뿐만 아니라 차나무가 자라는 지역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정리하자면

 

- 김해 : 대가락(금관가야)의 근거지

 

- 밀양 : 경상남도 창녕군에 속함 -> 비화가야의 근거지

 

- 사천 : 경상남도 남부고 남해안에 접함. 원래 가야 땅이었으나 서기 61년 이후에서 서기 73년 이전 사이에 삼한백제의 일부분인 변한에게 점령당함

 

(내가 서기 61년 이후에 사천이 점령당했다고 보는 까닭은 변한이 삼한백제에 투항한 해가 그 해인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서기 73년 이전에 사천 지방이 변한에게 점령당했다고 보는 까닭은 사천보다 훨씬 동쪽에 있는 부산[의부가라의 근거지]이 서기 73년에 점령당했다는 연구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인데 이 가운데 사천이 가야 땅이었다가 변한이 되었기 때문에 가야의 차 문화가 삼한백제로 퍼진 시기에 대해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하게 되었다.

 

- 1. 서기 1세기 후반인 서기 73년에 가야 땅의 남쪽(『가락국기』에는 “나라의 끝”으로 나옴)인 사천 지방이 삼한백제의 군대에게 점령당해 변한인의 것이 된 뒤 변한인이 차 문화를 알게 되었고, 이후 변한의 지배층이 삼한백제의 진왕에게 차 문화를 소개해 삼한백제에도 차 문화가 퍼졌을 가능성

 

- 2. 서기 227년 가야 연방이 삼한백제에게 점령당했고, 그 때 차 문화가 삼한백제의 도읍으로 건너갔을 가능성

 

나는 일단 1. 을 채택하여 ‘서기 1세기 후반에 가야 연방의 차 마시는 문화가 삼한백제에 소개되었다.’는 가설을 전개하고자 한다.

 

1.을 고르건 2.를 고르건 바뀌지 않는 것은 가야 연방의 차 문화가 삼한백제 왕실에 소개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원래 중남미 원주민들이 마시던 ‘소콜라틀(Xocolatl)’이라는 쓰고 매운 음료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의해 서유럽에 소개되었고, 중남미를 침략/정복한 에스파냐 사람들에 의해 서유럽에 널리 퍼진 것과 같다(소콜라틀은 나중에 ‘초콜릿’으로 이름이 바뀐다. 초콜릿이 고체가 된 건 서기 19세기 이후의 일이며, 그 전에는 코코아나 커피처럼 액체로 만들어 마셨다. 유럽 백인들은 중남미 원주민과는 달리 초콜릿에 바닐라나 고추 대신 설탕을 넣어서 마셨다). 정복자가 정복한 땅의 관습을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든 것이다.

 

사족을 달자면 삼한백제 왕실이 변한에 요구한 공물 가운데 하나가 차(茶)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시 차는 귀중한 물건이었고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삼한백제 왕실의 입장에서 보면 먼 중국 땅보다 가까운 경상남도에서 자라는 - 따라서 보다 구하기 쉬운 - 변한의 차가 아쉬웠을 것이고, 따라서 그것을 공물로 요구한 것은 자연스럽다(물론 그 대가로 무엇인가를 주었을 테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른다. 이 부분은 더 많은 연구를 해야 한다). 아마 변한은 삼한백제가 무너지기 전까지, 그러니까 서기 396년까지 삼한백제의 왕실에 말린 찻잎을 바쳤을 것이다.

 

한성백제박물관이 백제의 차 문화가 가야로부터 건너왔을 가능성을 소개하지 않은 까닭은 ‘백제의 문화는 남중국에서 건너온 것이다.’라는 사실에만 주목해 다른 가능성을 아예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이고, 백제와 가야의 관계를 바탕으로 백제 문화를 연구하려고 하지 않은 까닭은 삼한백제가 서기 396년 이전에 이 땅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역사를 배울 때 정치적인 고증과 연대 설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이제 한국 학계는 문화의 교류를 설명할 때 그 ‘뿌리’를 중국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한국의 역사학이 발전할 수 있다.

 

※참고 자료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차』(여연 스님 지음, 현암사 펴냄, 서기 2006년)

 

―『삼국유사』

 

―『네티즌과 함께 풀어보는 한국고대사의 수수께끼』(김 상 편저, 주류성 펴냄, 서기 2001년)

 

―『삼한사의 재조명』(김 상 지음, 북스힐 펴냄, 서기 2004년)

 

―『삼한사의 재조명 2』(김 상 지음, 북스힐 펴냄, 서기 2011년)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김성호 지음, 지문사 펴냄, 서기 1982년)

 

―〈네이버 백과사전〉

 

―〈위키 백과〉

 

―『삼국사기』

 

―『中國歷史[상권]』(이근명 편역, 신서원 펴냄, 서기 1993년)

 

― KBS 역사스페셜 :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여온 귀화 성씨(歸化姓氏)>(서기 2010년 7월 17일에 방송)

 

#덧붙이는 글 1 :

 

글을 여기까지 읽었다면, 여러분은 “그렇다면 동진(東晋)의 차 문화는 백제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단 말이냐?”라고 물어볼 것이다. 내 대답은 다음과 같다. 설령 서기 317년(동진이 세워진 해) 이후에 동진에서 백제로 차 문화가 건너온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백제 땅 안에서는 가야식 차 문화와 동진식 차 문화가 공존했다고 봐야 한다. 이는 오늘날의 한국 땅 안에 ‘재래종’으로 알려진 고유의 차나무와, 서기 20세기에 일본에서 들여온 차나무가 함께 자라고 있는 것과 같다.

 

#덧붙이는 글 2 :

 

한성백제박물관은 백제의 차 문화가 동진에서 건너온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내가 볼 때 그 ‘근거’는『삼국사기』의 기록인 듯하다. 그 책에

 

“9월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진(晉)나라에서 오니 왕은 그를 대궐로 맞아들이고 예절을 갖추어 공경했다. 불법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삼국사기』「백제본기」침류왕 원년(서기 384년) 조

 

는 기사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 무렵 “진나라”라고 불릴 수 있는 나라는 동진이고, 동아시아에서 차문화는 불교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이 때 불교와 함께 차문화가 건너왔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백제 왕실이 서기 384년부터 불교를 믿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나, 이 기록은 어디까지나 백제에서 맨 처음 불교가 꽃핀 사실을 설명하는 것일 뿐이지 결코 우리 역사에서 맨 처음 불교가 꽃핀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마라난타 법사가 백제에 오기 336년 전에 가야로 건너온 허황옥 공주의 오빠 장유화상(보옥선사라고도 한다)이 상좌부 불교를 전했다는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한국방송[KBS]의 <역사스페셜> 취재진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허황옥 공주가 가져온 돌탑으로 알려진 파사석탑은 그 안에 사리를 보관할 수 있게 만들어졌고, 각 돌의 아귀를 맞추고 원래의 모습을 되살리려고 시도한 결과 당시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상좌부 불교에서 주로 만들던 절의 돌탑과 비슷한 모양이 나왔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차 문화도 한(漢)나라에서 가야로 전해진 것이 따로 있고, 동진에서 백제로 전해진 것이 따로 있는데, 후자는 주목받고 전자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덧붙이는 글 3 :

 

『삼국사기』를 읽은 사람이라면『삼국사기』「신라본기」에 나온 기사를 인용하며 내 말에 반박할 것이다. 거기에 이런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온 사신 대렴(大廉)이 차의 씨를 가져오므로, 왕은 지리산에 심게 했다.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으나 이때에 와서 퍼졌다.”

 

―『삼국사기』「신라본기」흥덕왕 3년(서기 828년) 조

 

이 기사대로라면 이 땅에 차가 널리 퍼지기 시작한 해는 서기 828년이지, 그 이전은 아니다. 그리고 “차는 (신라의) 선덕왕 때부터 있었으나”라는 구절을 따른다면 비록 차 마시는 풍습이 널리 퍼지지는 않았어도, 차 자체는 서기 632년부터 647년까지의 시기에 신라사회에 소개되었고, 왕과 왕족과 귀족들이 이를 마셨다고 봐야 한다. 어느 쪽을 고르건 신라 사람들은 서기 7세기 초에야 차를 마시기 시작했지, 그 이전에 마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사실도 다른 증거들과 모순되지 않게 설명할 수 있다.「신라본기」에 신라가 “선덕왕”때에야 차를 마시기 시작하고 그로부터 196년이 흐르고 나서야(신라가 선덕왕 원년부터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고 가정하고 셈) 차가 대중에게 널리 퍼졌다는 기사는 신라의 중기나 후기에 살았던 신라인의 입장으로 역사를 보았을 때 차가 처음 소개된 시기가 신라 중기라는 이야기지, 이 땅에서 맨 처음 차나무를 기르기 시작한 시기가 신라 중기나 후기라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삼국사기』「백제본기」에 백제 임금이 “나라 남쪽의 주/군에 영을 내려 처음으로 벼를 심을 논을 만들게 하였다.”는 시기가 다루왕 6년(서기 33년)이라고 해서 이 땅에서 벼농사가 시작된 해가 서기 33년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과 같다.「백제본기」를 읽어봐도 다루왕은 논을 만들라고 명령하기 3년 전인 서기 30년에 흘우(屹于)라는 사람에게 “벼 50섬”을 “상”으로 주고 있다. 이는 서기 33년 이전에 이미 이 땅에서 벼농사를 짓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다루왕 6년 조의 기사는 백제 왕실이 “처음으로” “논”을 만든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지 이 땅에서 맨 처음 벼농사가 시작된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그러니까 백제 사람이 백제의 입장에서 역사서를 썼기 때문에 백제 이전의 생활이 소개되지 않은 것이다). 이는 유물로도 입증되는데, 고고학자들이 캐낸 유물과 찾아낸 유적에 따르면 이 땅에서는 이미 청동기 시대부터 논에서 벼농사를 지었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다루왕이 논을 만들라고 명령하기 633년 전에 농부들이 논에서 벼를 길렀던 것이다(고고학자들이 한반도 안에서 밝힌 ‘가장 오래된 논의 연대’인 서기전 600년 + 서기 33년).

 

따라서「신라본기」의 기사는 신라 사람들이 신라 중기부터 차를 마시다가, 신라 후기에 당나라에서 새로운 품종을 들여와 차나무를 널리 퍼뜨리고 차를 대중화했다는 뜻으로 풀이해야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신라 중기부터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거나, 신라 후기에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김해에 허황옥 공주가 차 씨앗을 가져와 그때부터 차나무가 자라기 시작했다는 전승이 있는 한, 한국의 차문화는 가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 덧붙이는 글 4 :

 

글을 다 쓰고 나니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하나는 우선 ‘재래종’으로 알려진 차나무가 한국 남부지방 곳곳에 자생하는데, 서기 2013년 현재 그 나무들은 “전라북도 선운사, 전라남도, 경상남도, 제주도 일원에 한정되어 자생(<위키백과>)”한다는 사실이다.

 

“전라북도”와 “전라남도”와 “제주도”의 차나무들은 언제, 누가, 왜 심은 것일까? 서기 1세기 이후 차나무가 경상남도(가야)에만 자라지 않고 이 지역들에까지 퍼진 것일까? 내 연구에 따르면 이 세 지역은 마한(전라북도/전라남도)과 침미다례(제주도)의 땅이었고, 서기 3세기 초 삼한백제에게 정복당할 때까지 가야와 친한 관계를 유지했다(「백제인 이야기」를 참고하라). 그렇다면 가야 왕실이 마한의 잔존세력을 이끄는 지도자와 침미다례의 왕에게 차 씨앗을 선물로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차나무들은 세 지역이 독립을 잃은 뒤에도 무럭무럭 자랐고,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차나무 숲이 나타났을 것이다.

 

아니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서기 227년 이후 차를 확보하려고 한 삼한백제 왕실이 차 씨앗을 가야의 옛 땅(변한)에서 가져다가 이곳저곳에 심었다고 가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럴 경우 세 지역의 차나무들은 1785년 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셈이다.

 

세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삼국사기』「신라본기」를 존중하는 것이다. 옛 가야 지역(경상남도)을 뺀 나머지 지역에서 자라는 차나무들은 대렴이 가져온 차 씨앗에서 나온 것들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 경우 신라 후기부터 차가 “널리 퍼졌다.”는 기록과도 맞아떨어진다(신라 후기에는 탐라국이 제주도를 다스리고 있었으므로, 제주도의 차나무는 신라 조정이 탐라국 성주[星主]에게 준 선물이었을 수도 있다).

 

내가 제기할 수 있는 의문은 여기까지고, 어느 쪽이 옳은지는 앞으로의 연구결과가 밝혀줄 것이다.

 


댓글 '2'

나그네

2013.07.02 10:00:27
*.250.145.143

중간에 인용문을 보니, 삼국유사네요.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직접 인용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내용의 차이는 없더라도 출전은 가능하면 1차자료를 이용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겠지요.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sy_002r_0010_0230_0030

▩조약돌

2013.07.02 19:52:54
*.118.123.150

알겠습니다. 원문을 확인해보고 문제가 있으면 글을 고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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