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님이 한국고대사를 새롭게 조망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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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 중에 나주 오씨가 있다. 나주 오씨가 유명해진 것은 후삼국시대이다. 본래 나주에 도읍하였던 후백제 견훤이 수도를 북쪽인 전주로 옮기게 되자 궁예가 왕건을 시켜 후백제의 후방인 나주를 공격하게 한다. 그 결과 왕건이 나주를 차지하여 이후 후고구려의 식량기지가 된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영산강유역은 군량을 공급하게 된다. 후삼국 통일의 양대 공신이 통일비용을 댄 영산강유역세력과 병사들을 공급한 중원경 세력이다.
왕건이 수군을 이끌고 나주에 왔을 때 나주 대 토호세력인 나주 吳씨의 딸과 결혼하는데 그 여인이 장화황후이고 뒤에 낳은 아들이 고려 2대 왕인 혜종이다. 왕건은 주변의 모든 반대를 뿌리치고 장자인 혜종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하지만 혜종은 2년만에 죽고 왕비들 사이에 후계를 놓고 싸움이 벌어진다. 그 결과 왕건의 후삼국 통일에 군사를 공급하였던 충북 충주지방 토호 세력의 딸인 유씨왕후의 아들이 왕이 되니 고려 3대 왕인 정종이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는 나주 吳씨의 출신이다. 이들이 吳씨 성을 갖게 된 것은 통일신라시대였다. 그런데 나주의 대 토호세력이 그 전에 성이 없었을 리 없다.
백제 부여씨는 본래 영산강유역의 옹관묘 집단들이었다(삼한사의 재조명 2). 부여씨 외에 사서에 영산강유역 통치자들로 나타나는 백제 목씨(목라근자. 목협만치, 목간나 등),와 백제 사씨도 영산강유역 왕관묘 집단으로 생각된다. 영산강유역 세력순서는 1.부여씨, 2,목씨, 3.사씨였을 것이다. 참고로 한강유역은 부여계인 해씨가 왕족이고 말갈계인 진씨가 왕비족이었다. 고이왕계는 말갈계인 우씨였다. 부여계/고구려계/말갈계는 동일계통이다.
나주에서 가야유물이 출토되는 것으로부터 가야권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나오지만 전혀 아니다. 당시 가야는 진왕이 칠지도를 왜국에 보내는 3세기 초부터 신라에게 통합되는 6세기 중반까지 진왕백제의 지배하여 있었기 때문일 뿐이다. 4~6세기에는 영산강유역에서 진왕백제(삼한백제)의 왕권을 차지했기 때문에 그 시기의 가야유물이 영산강유역에 나오는 것이다. 일본서기가 그 증언이다. 그리고 가야는 왕성이 부여씨가 아니며 유물도 부여계가 아니다.
이들 영산강유역 옹관묘 집단들이 3세기에 금강유역 목지국 삼한백제 왕실과 혼인을 맺고 왕비를 공급하게 된다. 그러다 이들의 세력이 점점 커져 4세기에는 아에 정권을 장악하고 진왕을 배출하게 된다. 이들이 4세기에 중앙부대에서 세력이 커지자 성씨가 필요해졌고, 본래 부여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부여로서 성씨를 삼은 것이다. 즉 마한의 중심세력이 부여계였다. 최치원이 고구려가 마한이라고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표현이다. 변한이 백제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다. 삼한사의 재조명1 에서 설명한대로 변한은 항상 백제였지 가야인 적이 없었다.
마한이 부여족이라는 근거는 또 있다. 항상 본류보다 본류에서 떨어져나간 지류가 더 오래된 문화를 보존한다. 마한지역 내에 본류에서 떨어져 나간 곳이 어디가 있을까? 바로 제주도다.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제주 3성인 고, 양, 부씨는 부여/고구려 계통 성씨다. 만일 그곳이 섬이 아니라 뭍이었으면 이 3성도 백제 멸망 후 다른 성씨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목지국을 장악한 영산강유역 부여씨는 한강유역과 손을 잡게 되고 한강유역에서 왕비를 공급하게 된다. 드디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그들이 모습을 들어낸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비류왕조에서 우리는 최초로 영산강유역 대 고분군 성립 기록을 본다. 근초고왕조의 왕후가 진씨 가문이 금강유역으로 시집보낸 진왕의 왕후로 진왕 여구의 왕후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자신들의 왕비에게 왕후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한강유역과 혼인한 여구는 자립위왕 하였으므로 백제왕을 칭할 수 있다. 근초고왕조의 왕후는 비류왕 시절 내신좌평 진의의 딸이자 근초고왕 초기 실권자였던 조정좌평 진정의 누이로 추정된다. 그녀가 최초의 진씨 출신 진왕의 왕후인데 이후 진씨와 해씨가 진왕의 왕후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된다. 진왕이 왜국으로 도망쳐 왜왕이 된 이후에도 이 전통이 이어져 5세기 중반까지 백제가 왜국의 왕후를 공급하게 된다.
목지국이란 공주-대전-천안 사이에 있던 나라로 진왕이 삼한을 통치하던 곳이다. 만일 이들이 신라 김씨처럼 스스로 건국하였으면 신라가 경주에 도읍하였듯이 이들은 영산강유역에 도읍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점차 세력을 키워 중앙무대에 진출하였기 때문에 정권을을 잡아도 수도는 그대로 금강유역이 되는 것이다. 현대사에서 예를 들면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대구/경북 세력이 대를 이어 대한민국의 정권을 이어왔지만 수도는 계속 서울이었던 것이나 유사하다.
근초고왕이 신라왕실의 여인을 왕후로 세우고 368년에 근 2백년만에 자립위왕하게 되자 황해도 지역이 일제히 복속하게 된다. 마치 부여와 똑 같다. 이것이 369년에 고국원왕이 백제를 공격하게 되는 직접적인 이유다. 진왕 응신이 한성백제 진사왕의 딸을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 하여 한반도의 지배자가 된 것이 391년이다. 바로 신묘년조의 기록이다. 고국원왕이 근초고왕을 공격하는 것이나 이유가 동일하다. 삼국사기는 광개토왕비문의 신묘년조를 고국원왕-근초고왕조를 통하여 기록하고 있는 셈이다.
6세기 중반 부여 천도 후 영산강유역의 부여씨들은 대거 수도권인 금강유역으로 이주한다. 하지만 고향에도 부여씨들은 많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들 부여씨들은 백제 멸망 후 다 어디로 갔을까?
나는 백제 멸망 후 많은 숫자는 영산강유역을 떠났겠지만 상당수는 그대로 남아 신라의 탄압을 피하여 성을 바꾸었다고 생각한다. 통상 글자가 비슷한 (예를 들면 徐씨) 성으로 바꾸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나는 전혀 다른 글자의 성으로도 바꾸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중의 하나가 나주 吳씨가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