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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루왕과 논

백제사 조회 수 3288 추천 수 239 2004.04.01 22:03:12
▶◀조약돌 *.153.157.95
※ 군량미를 구하려고 새 논을 만든 백제 왕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백제 다루왕이 한성백제의 남쪽 땅에 벼를 심으라고 명령하는 기사(記事)가 나온다.

“2월에 나라 남쪽의 주(州)/군(郡)에 영을 내려 처음으로 벼를 심는 논을 만들게 하였다.”

―『삼국사기』「백제본기」다루왕 6년 조(條) : 서기 33년

그러나 이 기사를 근거로 벼농사가 서기 33년 이후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서기 2001년 충남 부여군 구룡면 구봉리 도로 확장공사 구간에서 나온 논농사 유적은 서기전 15세기(서기전 1400년경)의 것임이 확인되었고

(충남대 백제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밭은 수로水路(물길 - 옮긴이)에 의해 둘러싸여 있으며” 이 “수로는 중층 삼국시대추정 수전(水田 : 논 - 옮긴이)의 수로에서 계속되어 사용된 것이 토층상 확인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유적 중 일부에서는 “둑 시설”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는 물을 가두어두고 벼를 심는 오늘날의 논에서 물을 가두기 위해 논 테두리에 둑을 쌓는 것과 비슷해 이때부터 논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유적지의 “수로 내에서는 2개의 웅덩이가 확인되었는데, 이는 물을 일정 정도 저장하는 동시에 유속을 감소시켜 수온상승의 효과를 위한 시설로 판단된다.” 연구소의 발굴단은 “웅덩이의 상부에서 경작면(: 곡식이나 푸성귀를 기르는 곳 - 옮긴이)에 물을 직접적으로 공급했던 입수(入水)시설의 흔적을 미약하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록 서기전 15세기의 논이 벼를 “늪지에 심는 이른바 ‘저습지(低濕地. 땅이 낮고 습기가 많은 땅 - 옮긴이) 경작’(손제하의 책인『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 준 고대 하이테크 100가지』에서)”을 한 시설이지 “관개 용수(灌漑用水. 물길로 논밭에 끌어들인 물 - 옮긴이에 의한 ‘수전 경작’”은 아니라 할지라도, “경작지 확대과정에서 보다 수량이 풍부하고 안정된 계곡 상부(上部)의 수원을 개발하고, 그것을 끌어들이기 위한 긴 관개수로(물을 끌어들이는 물길 - 옮긴이)를 개착(開鑿. 도로나 운하를 내기 위해 땅을 파는 일 - 옮긴이)”(백제연구소의 발굴 보고서인「구룡―부여간 도로확장 및 포장구간내 문화유적 발굴조사 약보고서」에서)한 시기가 “청동기시대 후기”인 “송국리유형 단계(서기전 4 ~ 5세기)”였음은 분명하므로,

오늘날과 같은 논 농사 방식이 적어도 위만에게 밀려난 기자(箕子)족이 마한을 차지하기 온 일곱 해(107 년)전에 뿌리내린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고 하겠다(『후한서』와 청주 한씨의 족보에는 기자족이 서기전(:기원전) 194년경에 위만에게 밀려 본거지를 떠났다는 기록이 나옴).

게다가 서기 1997년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에서 발굴된 서기전 1세기의 철기시대 유적에서는 2천1백여년 전의 농기구들과 볍씨가 나왔고, 논 자리도 확인되었으니, 다루왕이 논을 만들라고 명령한 사실을 벼를 “자연적인 늪지에 심는 이른바 ‘저습전 경작’(『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 준 고대 하이테크 100가지』에서)”을 ‘“관개 용수에 의한 ’수전 경작‘으로 발전시킨(『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 준 고대 하이테크 100가지』에서)” 일이라고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청동기시대 후기(송국리유형단계)에 이미 확립된 관개를 이용한 논농사 기술은 이후 큰 변화 없이 백제시대에 까지 지속되고 있는 점에서 청동기시대 논농사 기술의 발달된 수준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구룡―부여간 도로확장 및 포장구간내 문화유적 발굴조사 약보고서」에서).”는 연구결과를 존중한다면 더욱 그렇다.
  
따라서 「백제본기」다루왕 조에 실린 백제 왕실의 논 농사는 어디까지나 ‘지배층이 된 백제 왕실이 “처음으로” 벼를 심는 논을 “직접”만든 일’일 뿐 ‘맨 처음 논농사를 시작한 사실을 적은 기록’은 아니며, 오히려 한성백제가 이미 마한 사람들이 만든 논에서 벼를 거두다가 벼가 자신들이 바라는 만큼 나오지 않자 직접 논을 만들어 수확량을 늘리려고 한 사실을 적었다고 봐야 한다.  

농경국가에서 논밭을 늘리는 일은 공업국가에서 공장을 새로 만드는 것과 같은 ‘경제개발계획’인데 (곡식은 돈과, 곡식의 수확량이 늘어나는 일은 공장이나 회사의 수익이 늘어나는 사실과 견주어볼 수 있음), 그럼 한성백제는 왜 이 시기에 논을 늘리려고 했을까? 그리고 왜 하필이면 조나 피나 수수, 밀, 보리가 아닌 벼를 기르려고 했을까? 자신들이 정복한 땅에서 마한인들에게 조세를 거두어도 되지 않았을까? 곡식이 모자라서 그랬다면 굳이 ― 물길을 파서 먼 곳에서 많은 물을 끌어오고 논 주변에 둑을 쌓아 물을 가두어야 하는 ― 논을 만드는 대신, 그냥 ― 불을 질러 숲이나 풀밭을 없애고, 흙에 고랑과 이랑만 파서 씨를 뿌리는 ― 밭을 만드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삼국사기』와 농경을 다룬 책을 읽어보면 그 질문에 답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먼저『삼국사기』「백제본기」(이하「백제본기」)에서 서기 33년 이전의 상황을 다룬 기사를 찾아보자.

“겨울 10월, 왕은 군사를 내어 사냥을 한다고 둘러대고 몰래 마한을 쳐서 드디어 그 국읍(國邑)을 병합했는데, 오직 원산(圓山)과 금현(錦峴) 두 성만은 굳게 지키며 항복하지 않았다.”

―「백제본기」시조 온조왕 26년 조 (서기 8년)

“여름 4월, 원산과 금현 두 성이 항복하므로 그 백성을 한산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은 드디어 멸망하였다.”

― 온조왕 27년 조 (서기 9년)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 온조왕 28년 조 (서기 10년)

“여름 4월에 우박이 내렸다. 5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6월에 또 지진이 일어났다.”

― 온조왕 31년 조 (서기 13년)

“봄/여름에 크게 가물어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었다. 도적들이 크게 일어나므로 왕은 이들을 안무(백성들을 잘 보살피어 나라의 시책에 기꺼이 따르게 함 - 옮긴이)하였다.”

― 온조왕 33년 조 (서기 15년)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 웅거하여 배반하므로 왕은 몸소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그를 치니 주근이 스스로 목 매어 죽으므로, 시체의 허리를 베고 그의 처자식도 베어 죽였다.”

― 온조왕 34년조 (서기 16년)

“봄 3월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달걀만하여 이에 맞은 새들이 죽었다. 여름 4월에 가물었는데 6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내렸다. 한수의 동북쪽에 있는 마을들에 기근이 들어 고구려로 달아나는 사람이 1천여 호(1 호(戶)를 5~6 명으로 보았을 경우 5~6천 명이 달아난 셈임 - 옮긴이)나 되었으며 패수(浿水)와 대방 사이가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 온조왕 37년 조 (서기 19년)

“왕은 지방을 순행하여 백성을 무마하려고 동으로 주양까지 이르고 북으로 패하까지 이르렀다가 50일만에 돌아왔다. 3월에 사자를 보내어 농사와 잠업(누에치기 - 옮긴이)을 권장케 하고 급하지 않은 일로 백성들을 소란하게 하는 일은 모두 금지했다.”

― 온조왕 38년 조 (서기 20년)

“가을 9월에 말갈이 술천성(述川城)을 쳐들어왔다. 겨울 11월에 또 부현성(釜峴城)을 습격하여 1백여 명을 죽이고 노략질하므로, 왕은 강한 기병 2백명에게 명하여 이를 막고 되받아 쳤다.”

― 온조왕 40년 조 (서기 22년)

“겨울 10월에 남옥저(南沃沮)의 구파해(仇頗解) 등 20여 집(원문에는 ‘가家’로 나옴 - 옮긴이)이 부양(斧壤)에 이르러 귀순하기를 청하므로 왕은 이를 받아들여 한산의 서쪽에 편히 살게 했다.”

― 온조왕 43년 조 (서기 25년)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 풀과 나무들이 타거나 말랐다. 겨울 10월에 지진이 일어나 인가(人家. 사람이 사는 집 - 옮긴이)가 넘어졌다.”

― 온조왕 45년 조 (서기 27년)
“겨울 10월에 동부의 흘우(屹于)가 말갈과 마수산(馬首山) 서쪽에서 싸워 그들에게 이겨 죽이고 사로잡은 숫자가 매우 많았다. 왕은 기뻐하며 흘우에게 말 한 필과 벼 50섬을 상으로 내렸다.”

― 다루왕 3년 조 (서기 30년)

“가을 8월에 고목성(高木城)의 곤우(昆優)가 말갈과 싸워 크게 이겨 목 2백여 급(‘급’은 사람의 머릿수를 세는 단위임 - 옮긴이)을 베었다.”

― 다루왕 4년 조 (서기 31년)

보시다시피 온조왕이 마한 왕실을 무너뜨린 뒤부터 다루왕이 새 논을 만들기 전까지 - 그러니까 서기 8년부터 서기 31년까지 - 스물 네 해(24 년)동안 전쟁과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고 있다.

온조왕은 마한 왕궁을 점령할 때에도, 마산성과 금현성의 마한 저항군을 칠 때에도, 도적떼와 싸울 때에도, 우곡성에서 주근의 군사들과 싸울 때에도, 술현성/부현성에서 말갈군(고구려군)과 싸울 때에도 많은 군사비를 들여야 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전쟁이 끝난 뒤에 - 또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 서리, 우박, 지진, 가뭄이 자주 일어났으며 이는 “단기적으로 볼 때 전쟁으로 인한 식량 공급의 변동은 재난을 불렀다(클라이브 폰팅의 책인『녹색세계사』에서)”는 상식에 비추어볼 때, 마한을 무너뜨린 지 얼마 안 되는 한성백제의 안정을 뒤흔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논이나 밭을 일구고 있다가도 재빨리 성 안으로 달아나서 적과 싸워야 한다. 이 때 적군이 들판에서 곡식을 빼앗아갈 수도 있고, 외양간에서 소나 돼지를 끌고 갈 수도 있지 않은가? 설령 농작물을 빼앗기지 않고 성 안에 잘 숨겨둔다 해도 전투가 한 달 이상을 끌면 김 매고 풀 뽑을 시기를 놓쳐 그 해 여름지이(:농사를 일컫는 순우리말)를 망칠 수도 있다. 또 생산력은 농업인[:농부]이 죽거나 달아나거나 성 안에 갇혀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떨어지지만, - 벼는 대여섯 달이 지나야 거둘 수 있으므로 - 설령 그들이 죽지 않고 돌아와서 다시 땅을 일군다 해도 농지가 옛 생산력을 되찾는 데는 두 세 해 이상은 걸린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천재지변까지 겹친다면 생산량은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한성백제의 왕실은 - 다루왕 3년조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 자신들이 논을 직접 만들기 전부터 전쟁에서 공을 세운 사람에게 “벼 50섬”을 상으로 내렸다. 온조왕도 고구려군을 무찌른 군사들에게 이런 포상을 내렸을 것이며 전쟁이 자주 일어나는 만큼 포상하는 횟수와 상의 양도 많아졌을 것이다. 이런 포상도 백제 왕실에게는 부담을 안겨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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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충 설명 : 논을 ‘처음으로’ 만든 해가 서기 33년인데 그보다 일곱 해 전에 고구려군을 무찌른 사람한테 “벼”를 상으로 주다니? 이는 앞서 말한 대로 백제인이 마한을 무너뜨리기 이전부터 마한에 논이 있었고, 그 논에서 나오는 벼를 포상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쌀이 쌓여 있었을 때에만 가능한 이야기다. 결국 이 구절도 백제가 마한을 정복한 뒤 마한 왕실이 쌓아둔 쌀을 재정에 보탰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셈이다. 백제는 고대국가를 정복하고 세워진 또다른 고대국가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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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백제에서도 “엘리트들의 주요 임무는 자신들과 군사를 부양할 식량을 충분히 징발하는 것이었다(『녹색세계사』에서).”는 논리가 적용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식량”을 만들 수 있는 터전인 논밭을 늘리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우리는 다루왕이 ‘왜 논을 만들었는가?’를 따지지 말고 ‘하필이면 왜 이 때 새 논을 만들었는가?’와 ‘왜 하필이면 밭이 아닌 논을 만들었으며, 밀이나 보리 대신 벼를 심었는가?’를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의문점을 밝히기 위해『삼국사기』를 다시 한번 펼쳐보자.

지난번에도 말했다시피 백제가 마한 땅에 온 해는 서기전 9년이고, 마한을 친 해는 서기 8년이다. 그리고 백제는 그 동안에도 낙랑이나 고구려(말갈)와 싸우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가을 9월에 왕은 사냥을 나가서 신록(神鹿)을 잡아 마한으로 보냈다.”

―『삼국사기』「백제본기」시조 온조왕 10년 조 (서기전 9년)

그리고 그로부터 한 달 후에 말갈(:고구려군)이 쳐들어온다.

“겨울 10월에 말갈이 북쪽 변경을 쳐들어와서 노략질을 하므로 … 왕은 친히 날랜 기병 1백명을 거느리고 봉현(峰峴)으로 나가서 구원하니 적들은 이를 보고 곧 물러갔다.”

― 온조왕 10년조 (서기전 9년)

“11년, 여름 4월에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을 습격하여 부수고 1백여 명을 죽이고 노략질해갔다. 가을 7월에 독산(禿山)과 구천(拘川) 두 성책을 쌓아서 낙랑에서 (백제로 - 옮긴이) 오는 길을 막았다.”

― 온조왕 11년조 (서기전 8년)

“13년 봄 2월에 서울에 한 노파가 남자로 변했다. 범 다섯 마리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모(王母)가 세상을 떠나니 나이 예순한 살이었다.”

― 온조왕 13년조 (서기전 6년)

: 온조왕이 어머니인 소서노(: “왕모王母”)와 그녀를 따라온 다섯 장수를 죽인 사건이 일어남. “노파가 남자로 변했다.”는 말로 미루어볼 때 소서노는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무장한 채 다섯 장수(:“범 다섯 마리”)와 함께 온조왕의 도성 안으로 들어온 듯하며, 온조왕은 이 때 어머니가 끼여 있는 줄을 모르고 공격했다가 나중에야 자신이 어머니를 죽인 사실을 안 듯하다. 소서노는 비류의 편을 들어 비류와 대립한 온조를 설득하러 갔다가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음).

“여름 5월에, 왕은 신하들에게 ‘우리 나라가 동쪽에는 낙랑이 있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서 우리 국경을 침범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었소. 게다가 요즘은 요망한 징조가 여러 번 나타나고 국모(:소서노 - 옮긴이)가 세상을 떠나셔서 형세가 편안하지 못하니, 반드시 장차 서울을 옮겨야 하겠소. 내가 지난 날 한수(漢水)의 남쪽을 돌아다녀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해서 영원히 편안할 계책을 도모하여야 하겠소.’라고 말했다. 가을 7월에 한산(漢山) 밑으로 가서 성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들을 옮겼다.”

― 온조왕 13년 조 (서기전 6년)

: 비류계의 분노를 사 공격당할 위기에 놓인 온조왕이 비류의 칼을 피해 멀리 떨어진 새 도읍지로 달아나려고 한다. 만약 왕의 어머니인 소서노가 병에 걸려서 세상을 떠났다면 굳이 도읍지를 옮길 필요가 없다. 이는 소서노가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뜻이며, 소서노를 죽인 사람이 온조왕임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그가 도읍을 한산으로 옮긴 다음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김을 알리고 마침내 (새로운 - 옮긴이) 국경을 그어서 정했다(「백제본기」)”는 기록도 그가 아직은 힘이 있던 마한 왕실에 기대어 비류계의 공격을 막아보려고 했음을 알려준다.

“봄에 낙랑이 쳐들어와서 위례성을 불태워버렸다.”

― 온조왕 17년 조 (서기전 2년)

“겨울 10월에 말갈이 엄습해오므로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칠중하(七重河)에서 맞아 싸워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으로 보내고 남은 도둑 무리들은 다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 온조왕 18년 조 (서기전 1년)

“9월에 왕은 기병 1천명을 거느리고 부현(斧峴)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의 도둑 무리를 만나 한 번 싸워 이를 부수고 그들을 사로잡아 장사(將士 : 장수 - 옮긴이)들에게 (노비로 - 옮긴이) 나누어 주었다.”

― 온조왕 22년 조 (서기 4년)

이 무렵 백제는 낙랑, 말갈과 자주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흉년이 들었다거나, 백성들이 굶주렸다거나, 나라 살림에 특별히 신경을 쓴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직 마한 왕실이 ‘적’이 아닌 ‘우방’이었고 온조왕이 마한 왕(청주 한씨의 족보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이 때 마한을 다스리던 왕은 ‘성제成帝 계왕稽王’이라는 시호를 얻은 ‘한정韓貞’이었다)에게 사로잡은 말갈인 추장 소모를 보낼 정도로 마한에 충성해서, 곡창지대를 차지한 마한의 원조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온조왕으로부터 고구려인 포로를 받은 계왕은 백제를 ‘믿을 수 있는 제후국’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백제는 재정이 소모되는 것을 염려하지 않고 마음껏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한을 정복한 다음에는 마한의 지배층과 마한의 지배층을 받아들인 서나벌이 적으로 돌아서 버렸을 것이며, 고구려(:말갈)나 낙랑과의 관계가 나쁜 판국에 마한의 잔존세력과 서나벌까지 적으로 돌아서 버렸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원조를 받을 수 없게 된(그러나 공격은 사방팔방에서 받았을) 한성백제는 모든 것을 제 힘으로 해야 했을 것이다.

어떤 나라가 한 나라의 속국이 되어 원조를 받으면서 적과 싸우다가, 적과 사이가 개선되거나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자신이 상국(上國)으로 섬기던 나라를 정복하고 그 나라의 지배세력과 적으로 돌아서 버렸다고 치자. 그럼 과연 무사할 수 있겠는가?

나라의 힘이 엄청나서 모든 적을 한꺼번에 누를 수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못하다면 사방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쳐들어오는 적과 싸우랴, 적에게 입은 피해를 스스로 복구하랴, 자연재해로 얻은 손해를 메꾸랴, 상대를 적극적으로 공격하기는커녕 제 본거지를 지키기에도 힘겨워 비틀거릴 것이 뻔하다.  

한성백제가 바로 그런 경우였고 그 때문에 서기 9년 이전에는 좀처럼 보이지 않던 굶주림이나 자연재해, 백성들의 이탈(“고구려로 달아나는 사람이 1천여 호나 되었으며 패수와 대방 사이가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이 서기 9년 이후에는 눈에 띄게 늘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다루왕은 마한 잔존세력의 저항이나 이미 정복한 땅 안에서의 저항을 군사력으로 억누르면서 한성백제를 지탱하려고 했지만, 이미 마한과 서나벌이라는 새로운 적을 만들어버린 상황에서 기존의 적하고도 맞서 싸워야 했던 백제의 재정은 마한 사람들이 만들어둔 경제 기반만으로는 메꿀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는 결국 모자라는 군사력을 보충하기 위해 맏아들 기루(己婁)를 태자로 세울 때 이를 구실삼아 “죄수들을 대사(「백제본기」다루왕 6년조)”하고 군대가 유지될 수 있는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 보다 따뜻한 남쪽 땅에 “벼를 심을 논”을 만들라고 명령해야 했을 것이다. 이상이 다루왕이 논을 새로 만들게 된 배경이다.

그렇다면 백제인들은 왜 하필이면 밭이 아닌 논을 만들고, 밀이나 보리가 아닌 벼를 심었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이 의문은『삼국사기』대신 환경사(史)를 다루는 사람들의 설명을 들어야 풀릴 수 있을 것이다. 클라이브 폰팅의 설명을 들어보자. 폰팅은 논이 ‘거친’ 열대강우림 지대의 흙에서 많은 벼가 자랄 수 있게 해준 터전이라고 말한다.    

“물을 댄 특수한 밭(논 - 옮긴이)에서 막대한 양의 물을 천천히 흐르게 하는 복잡한 물 관리 방법으로 벼를 기르게 되자 원래 척박하던 열대 토양이 완화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두 가지 방법으로 양분을 보충해 준다. 물 속에 조류가 자라게 하여 공기 중의 질소(질소는 화학비료의 원료로 쓰임 - 옮긴이)를 포착(붙들어 맮 - 옮긴이)하고, 식물 찌꺼기와 인간과 동물의 분뇨를 물 속에서 썩게 해준다. 또한 작업 과정에서 토양을 밟아 줌으로써 토양이 단단해져서 양분을 함유할 수 있게 해준다. 이 방법은 작물 수확량을 크게 늘려 주기는 했지만 작물을 재배하고 논을 만들고 유지하고 물을 대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했다.(『녹색세계사』에서)”

따라서 새로 생긴 논은 ‘따뜻한 남쪽 나라’의 기후에서 보다 많은 벼를 한꺼번에 기를 수 있는 터전이 되었을 것이며, 비록 논이 “엄청난 노동력”을 요구하긴 했지만, 백제인이 손에 넣은 마한이 많은 인구를 먹여살리는 농경국가였기 때문에 마한 사람들을 강제로 동원할 수 있는 백제는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벼는 다른 곡식에 비해 생산량이 많으며 비료 없이도 잘 자란다는 장점이 있다.

김용운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벼의 수확량은 “파종량(논밭에 뿌린 씨앗의 양 - 옮긴이)의 약 3 ~ 40배 정도(김용운 교수의 책인『한국인과 일본인 3』에서)”고 벼는 “비료도 없이 물속에서 상당한 비료성분을 스스로 흡수(『한국인과 일본인 3』에서)”해 설사 비료를 전혀 안 주고 기른다 해도 비료를 뿌려서 얻을 수 있는 “수확량의 74.7 퍼센트(『한국인과 일본인 3』에서)”를 얻을 수 있다.  

(“밀의 경우 평균 수확량은 파종량의 3~4배 정도밖에 안 된다(김용운 교수).” 또 보리는 비료를 전혀 안 주고 기르면 비료를 뿌려서 얻을 수 있는 “수확량의 36 퍼센트(김용운 교수)”밖에 얻지 못한다)

백제 왕실은 벼의 이런 특성 때문에 다른 곡식보다 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며, 벼를 기르는 일을 ‘짧은 시간 안에 - 군량미로 쓸 수 있는 - 보다 많은 곡식을 거두어 낼 수 있는 사업’으로 여겨 주(州)/군(郡)을 다스리는 관리들에게 벼를 기르라는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물론 이 사업이 곧장 큰 혜택을 가져다주지는 않아서 논을 만든 지 여섯 해가 지난 서기 38년에는 다루왕이 “백성들이 사사로이 술을 빚는 일을 금지(「백제본기」다루왕 11 년조)”해야 할 정도였지만(술은 곡식으로 빚었기 때문에, 술을 자주 빚을 경우 밥이나 떡으로 만들 수 있는 곡식이 줄어든다), 이후「백제본기」에는 71년 동안 백성들이 굶주렸다거나 달아났다는 기록이 나오지 않아 재정이 보다 탄탄해지고 나라의 힘이 커졌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서기 63년경부터는 “말갈”의 공격을 막는 수세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서나벌을 적극적으로 공격하고 마한의 잔존세력을 치게 되니(「백제본기」에 다루왕이 서나벌을 만나기 전 낭자곡성 근처까지 “토지를 개척”했다는 말이 나오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백제는 마한의 잔존세력을 꾸준히 공격했음을 알 수 있다), 다루왕의 경지 확장사업은 흔들리는 한성백제를 바로잡고 나라의 힘을 키운 조치였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서기전 9년 수도를 요서지방에서 경기도 일대로 옮긴 한성백제는 마한의 원조를 받아 자신을 치는 낙랑과 고구려를 막아냈고 마한의 원조를 받는 동안에는 온 힘을 전쟁에만 쏟아부을 수 있어서 재정(財政)에 큰 무리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백제가 마한을 무너뜨린 다음부터는 ‘어제의 동지’였던 마한의 잔존세력과, 마한을 편드는 서나벌까지 적이 되어 백제와 대립했기 때문에 백제는 자연재해, 늘어난 적국을 (늘어나지 않은) 경제적 기반(:마한의 논밭)에 기대어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이런 상황은 백제에게 ‘무너질 것이냐, 새롭게 다시 태어날 것이냐?’를 강요했고 결국 다루왕은 무너지는 대신 자신들의 손으로 새로운 논을 만들고(경제개발사업), 민간인의 양조사업을 금지하고(소비 억제), 선왕 때 가벼운 죄를 지은 죄수들(온조왕 말기에 흉년과 굶주림과 관련된 기사가 많이 나오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대부분 생계형 범죄를 저지른 경제사범이었을 것이다)을 풀어주어 양민으로 만듦으로써(사면으로 국민의 단합을 이끌어냄) 이 위기를 극복했다.

새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된 사람들은 논에서 나오는 수입(:쌀)을 얻어 농업인과 군인으로서 충성을 다했을 것이고, 그들은 사방팔방이 적국으로 둘러싸여진 한성백제의 현실을 보고 백제를 위해 자발적으로 나서 나라를 지켰을 것이다.

그 결과 백제는 고구려의 침입을 막아 내고 나중에는 서나벌과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으며 이후 서나벌을 몰아내 호남 평야와 금강 유역을 차지할 수 있게 된 백제는 서나벌(:신라)이나 가야보다 더 강한 나라로 우뚝 서게 된다.

다루왕 6년 조의 기록은 한성백제가 국가의 위기를 남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였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기록으로 재평가 받아야 할 것이다.  
          
※참고 자료

-「구룡―부여간 도로확장 및 포장구간내 문화유적 발굴조사 약보고서」

―『녹섹세계사』(클라이브 폰팅 지음, 이진아 옮김, 심지 펴냄)

―『삼국사기』(김부식 엮음, 이재호 옮김, 솔 펴냄)

―『한국인과 일본인 3』(김용운 지음, 한길사 펴냄)

―「광주 신창동 유물서 철기시대 수레 부속품 확인」(<연합뉴스> 서기 2003년 1월 10일자 기사)

―『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 준 고대 하이테크 100가지』(손제하 지음, 이면우 옮김, 일빛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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