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gital Resources about Korean History

디지털의 옷을 입은 역사자료. 이제 史料는 공유되어야 한다.

VIEW

삼국유사 | 三國遺事

고려시대 일연에 의해 작성된 한국 고대 문화사의 최고 원천.

GO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고등학교 7차 교육과정 국사교과서

MORE

History through images & Photos, Maps

이미지와 사진, 그리고 지도로 본 역사

VIEW

오늘:
12
어제:
40
전체:
1,240,678

김상님이 한국고대사를 새롭게 조망하는 곳입니다.
※첨부파일은 hwp, zip, jpg, gif 만 가능합니다.
게시물 혹은 댓글을 남기실때는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시기 바랍니다.
비속어, 욕설, 반말 등을 사용하면, 본 사이트의 방침과 맞지 않으므로 글을 삭제하겠습니다.

▶◀절강성의 “남평양지”

신라사 조회 수 2898 추천 수 236 2004.04.08 23:59:45
▶◀조약돌 *.153.157.95
― 송기윤 프로듀서가 전하는 신라 식민지의 “평양”

“개로왕 시대에 고구려와 맞섰던 군사력과 외교 정책들은 잃어버린 백제사를 복원할 수 있는 많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개로왕 시대에 전개된(원문은 이렇지만 문맥상 ‘전개된 상황을 전하는’이라는 말로 고쳐야 할 것이다 - 옮긴이)『송서(宋書)』의 기록들은 이와 같은 의문을 더하게 한다.

‘산양왕 휴우를 진평왕으로 봉하고 진안군을 고쳐서 진평군으로 삼았다(『송서』권 8「본기本紀」제 8).’

‘(진안군이) 통괄하는 현은 원풍, <신라> 원평, 동안, 후관, 나강, 진안, 온마이고 집은 4,300 호(戶)다(『진서晉書』권 15「지志」 제 5).’

위의 사료는 주목할 만한 기사다. “원풍, 신라, 원평, 동안, 후관, 나강, 진안, 온마를 통괄하는데 4, 300 호의 진안군을 고쳐서 진평군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 가운데 신라(新羅)라는 지명이 있다. 지명으로만 본다면 우리의 고대 국가 중 하나인 신라(新羅)와 동일하다.

『삼국사기』「신라본기」의 실성이사금 조에 “평양에 큰 다리를 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실성왕(實聖王. 재위 402 ~ 417)때 고구려왕은 가장 강력했던 광개토왕(廣開土王. 375 ~ 413)이었다. 광개토왕 재위 당시에 신라가 고구려 평양에 대교를 설치했다는 것은 불가능한 사실로 우리 역사의 미스터리였다. 그런데『삼국유사』「실성왕」조에도 남평양지는 양주(楊州)라고 전하고 있다.

오늘날의 사가(역사가 - 옮긴이)들은 … 신라가 평양에 진출한 기사는 믿기 힘들다고 하면서 역사의 의문점 또는 『삼국사기』/『삼국유사』의 오류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기록들을 있는 그대로 해석해 보고자 한다.

그 당시의 남평양지인 양주는 지금의 중국 양자강(장강 - 옮긴이)인 복건성 일대를 지칭한다. 이곳은 진평군이 설치된 지역으로 이곳에도 신라라는 지명이 있다. 이곳을『삼국사기』,『삼국유사』가 전하는 평양 또는 남평양 지역으로 신라 실성왕이 대교(大橋. 큰 다리 - 옮긴이)를 쌓은 곳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추정해본다. 만약 이러한 추정이 맞다면 이곳 중국에 있었던 신라가 백제와 어떤 관련이 있었을까?

필자는 중국측 사료를 적용하여 중국 땅에 있었던 신라, 즉 진평군은 백제의 왕족들이 통치하는 담로와 유사한 형태로 보고자 한다. 즉, 신라의 왕들은 진평왕 직전까지 백제에서 대대로 왕을 임명하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신라의 영토는 백제에 속했던 것이다. 신라가 진평군 지역과 동일한 곳에 위치해 있어서 이러한 추정을 더해준다.”

―『중국에도 전주가 있다』(송기윤 지음, ‘두인’ 펴냄)에서

송 프로듀서(이하 PD)는『삼국사기』「신라본기」의 기사와『진서』「지(志)」의 기록을 바탕으로 신라가 복건성에 식민지를 두었다고 주장합니다. 신라 사람들이 복건성에 있던 “평양”에 다리를 놓은 기록이 후대에 전해진 게 아니냐는 것이지요.

송 PD는 석씨족이 해양신라를 세웠다는 사실을 모르고, 삼한백제설도 인용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한때는 계림국이 신라의 해외 식민지를 지배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습니다.

송 PD의 가설과 제 가설이 다른 점은 송 PD는 신라 왕실이 처음부터 진안군(진평군) 신라현에 식민지를 두었다고 주장하지만, 저는 “신라현이 설치된 고장을 보면, 복건성의 척량(척추. 등뼈 - 옮긴이)을 이루는(여기서는 복건성을 세로로 관통하는 - 옮긴이) 무이산맥(武夷山脈) 남단의 장정현(長汀縣) 일대로서, ‘산곡두절(山谷斗絶 : 뫼와 골짜기로 - 외부와는 - 끊어져 있음 : 옮긴이)’하고 ‘산중수신(山重水迅 : 뫼가 첩첩이 이어지고 물살의 흐름이 빠름 - 옮긴이)’한 엄청난 두메산골(김성호 박사의『중국진출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 2』”이고

“신라계 지명은 이미 지적했듯 절강성 연안에 분포되었을 뿐 그 이남인 복건성에서는 단 하나도 분포하지 않(『중국진출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 2』. 이하『해상활동 천오백년 2』로 부름)”으므로 “신라인들이 복건성에서 가장 낙후한 두메산골(이 견해는 김성호 박사의 견해이지 제 견해가 아님을 밝힙니다 - 옮긴이)로 찾아가서 살았을 턱도 없다(『해상활동 천오백년 2』에서).”고 주장한다는 것이죠.

저는 “절강성 연안에 살던 신라인들은 원래 해민(海民. ‘바다 사람들’ - 옮긴이)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토지를 분급(:나누어 줌 - 옮긴이)하려면 새로운 토지가 필요했지만, 그렇다고 인근 주민의 토지를 빼앗아서 줄 형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복건성의 내륙 오지에 신라현을 새로 설치하고 이곳으로 신라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해상활동 천오백년 2』).”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 “복건성 일대”인 양주(남평양지)가 나오는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
공지 Q&A 새한국고대사 포럼 안내 주성지 2006-08-08 64326


LOGIN

SEARCH

MENU NAVIG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