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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례성의 우물」이 증언하는 비류의 생존

백제사 조회 수 3065 추천 수 236 2004.04.05 00:58:25
▶◀조약돌 *.117.116.54

- 충청도의 전설이 뒷받침하는 삼한백제설의 정확성

어느 나라건 그 나라를 세운 사람 - 그러니까 건국 시조 - 은 한 명이다. 예를 들어 고구려를 세운 사람은 추모왕(동명성왕)이고 서나벌을 세운 박씨족의 시조는 박혁거세이며 석씨족의 시조는 석탈해이고 가야의 시조는 김수로왕(뇌실청예왕)이다.

설령 - 고구려의 첫 번째 고(高)씨 임금인 - 태조대왕이나 탈해이사금/내물이사금(김씨 세습체제를 굳힌 인물) 같은 사람들이 나온다 하더라도 그들이 활약한 시기가 ‘시조’로 다뤄진 인물이 활약한 시기와는 전혀 겹치지 않으므로,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들이 ‘또다른 왕조의 건국자’임을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태조대왕 이전에는 왕들이 ‘해解’ 씨였지만, 태조대왕 이후에는 왕들의 성씨가 ‘고高’씨로 나오고 탈해이사금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건국시조의 이야기이므로 신라인이 후대에 역사를 정리할 때 석씨족의 전승을 박씨족과 김씨족 사이에 끼워 넣어 한 왕조의 것처럼 꾸몄음을 알 수 있음. 또한 추모왕은 서기전 37년에 활약했지만 태조대왕은 서기 2세기에 활약하여 두 사람이 다른 시기에 활약한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백제본기」첫머리에는 이 같은 ‘상식’으로도 풀 수 없는 ‘이상한’ 기록이 나온다. 시조가 두 사람이며, 그것도 각각 다른 시기에 활약한 사람이 아니라 같은 시기에 활약한 사람으로 나오는 것이다.

‘정설’에는 온조가 ‘시조’로 나오고「백제본기」도 그를 시조로 내세우는데, ‘이설’에는 “시조는 비류(沸流)왕”이라고 말하며 정설에서는 죽었다는 그가 시조로 나온다. ‘정설’도 ‘이설’도 비류와 온조는 같은 시대(서기전 18년)를 산 ‘형제’였다고 증언하는 바, 이대로라면 두 설 가운데 하나는 틀렸다고 해야 할 텐데,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는 ‘정설’이 옳고 ‘이설’은 틀렸다고 보아 ‘이설’을 철저히 무시해 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이설’을 진지하게 연구한 학자는 김상 교수, 김성호 박사, 한순근 선생 뿐이다. 비록 최태영 박사가『한국상고사』에서 ‘이설’에 바탕을 둔 ‘비류백제설’을 소개하긴 했으나, 그는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지 않고 말 그대로 단지 ‘소개’만을 했을 뿐이라 그의 이름은 ‘이설’을 연구한 학자의 명단에 포함하지 않기로 한다)  

왜냐하면 제 3자인 중국 북조(北朝) 왕조의 기록(:『북사北史』「백제전」)에는 구태(仇台)가 대방(帶方)의 옛 땅에서 처음 나라를 세웠다고 설명해 백제가 요서지방에서 세워져 서기전 9년에 마한으로 달아났다는「백제본기」의 기록과 일치하고,

만약 비류가 서기전 18년에 죽었다면 온조가 그로부터 열세 해(13년)가 흐른 뒤인 서기전 6년에 어머니를 실수로 죽이고 나서 - 마치 누군가를 피하듯이 - 허겁지겁 도읍을 옮기고 마한에 기댔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충청남도에 전해지는 ‘위례성의 우물’이라는 백제 설화에 따르면 온조왕은 “온조가 북쪽 한강변에서 미르(:용龍)가 되어 물살을 헤치고 있을 때, 때마침 그의 어머니인 소서노가 큰 아들 비류가 고생을 하는 것을 보고 작은 아들 온조와 합작을 권하기 위해서 위례성에 왔”는데

“온조가 있는 움막에 안내를 받았으나 온조는 없었고 아무도 그의 거처를 몰”라 “소서노는 즉각적으로 반란군이 자기 아들을 죽였다고 생각하고는 데리고 온 비류의 부하로 하여금 그들(:온조의 부하들 - 옮긴이)을 쳐부수게 하였다.”고 한다.

“온조의 부하들은 비류가 이 나라(:온조가 세운 한성백제 - 옮긴이)를 쳐부수러 온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힘껏 싸워 온조의 어머니 소서노까지 죽이고 말았”으며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온조는 “부하들로 하여금 돌을 날라오게 하고 위례성 우물에 돌을 던져서 아래쪽에 있는 북쪽과 남쪽으로 통하는 물줄기를 막아버렸다 한다.”

“온조는 그 후 사람으로서 임금이 되어 한강변 광주땅에서 다시 위례성을 세웠다하는데 위례산의 위례성 우물은 그 후부터는 흙탕물만 고인다고 한다.”

(이상은 다음 카페인 ‘麗輝 백제점’의 ’군사/경제방‘에 실린「설화로 본 백제 초기사...」에서 인용한 내용임. 카페의 운영자인 “여휘”씨는 이 이야기를 서기 1986년 충청남도 향토 문화 연구소가 펴낸『충남 전설집』하(下) 권에서 읽었음을 밝혔다. 온조왕이 자신의 어머니와 그녀가 데려온 부하들이 죽임을 당한 뒤 도읍을 옮겼다는 내용이『삼국사기』「백제본기」시조 온조왕 13년조의 기록과 너무나도 비슷하여 전설이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백제본기」가 ’위례성의 우물‘과 같은 사실을 전하면서도 “비류”와 “소서노”라는 이름을 내세우지 않은 까닭은 ― 백제본기 첫머리에 시조를 온조왕으로 내세운 점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 역사를 온조 중심으로 쓰면서 “비류가 죽어서 온조가 왕이 되었다.”고 둘러대었는데 여기서 다시 “비류와 소서노 때문에 도읍을 옮겼다.”고 쓰면 모순이 되어서였을 것이다.

반면 “위례성의 우물”은 민간인들 사이에서 내려오던 이야기이므로 역사서와는 달리 정치논리에 따라 사실을 감추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비류왕과 소서노의 이름이 고스란히 내려올 수 있었을 것이다)

「백제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온조가 왕으로 있을 때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야 할 “비류”가 버젓이 나와 온조를 위협하고, 소서노가 비류 편에 서서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하다가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그리고 온조가 소서노가 죽은 뒤 “북쪽과 남쪽으로 통하는 물줄기를 막아” 버린 다음 도읍을 옮긴 점으로 미루어볼 때),

이 이야기는 비류가 -「백제본기」의 ‘정설’과는 달리 - 죽지 않고 살아 있었으며, 비류가 온조와 헤어진 뒤 세운 ‘또 다른 나라’가 온조의 한성백제와 같은 시기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온조왕이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는 데에서 그쳤다면 ‘통로’가 될 수 있는 “물줄기”를 막아 버릴 리가 없었을 것이며, 무덤을 세우면 되지 굳이 먼 곳으로 천도할 필요도 없다. 그는 소서노가 죽은 뒤 ‘누군가’가 물줄기로 건너오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그 ‘누군가’는 - 온조의 부하들이 비류를 두려워했고 소서노가 비류와 온조를 화해시키려고 하다가 죽은 사실로 미루어볼 때 - 소서노의 아들인 비류였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조에 실린 '이설'은 ‘또 다른 건국시조의 기록’으로서 존중받아야 하며, 그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거나 후대에 꾸며진 것이라고 본 학자들의 견해는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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