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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신의 야마도 경영

백제사 조회 수 2874 추천 수 258 2004.03.24 15:59:24
▶◀조약돌 *.153.157.95
숭신(수승)은 서기 100년에 구주(九州) 섬의 북부를 점령합니다(일도안사 설). 그리고『후한서』에는 서기 107년에 “왜왕 수승”이 사신을 보냈다는 기사가 남아있죠.

숭신은 “왜인”이 사신을 보내기 8년 전에 야마도를 세웠으므로, 저는 숭신이 구주 북부를 점령하고 삼한백제의 새 식민지를 세운 다음 후한에 사신을 보냈다고 판단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이는 백제 본국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식민지의 총독이 스스로 독립을 선언하고 외국에 외교권을 행사한 셈이기 때문에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지요(가만히 내버려두면 애써 손에 넣은 식민지가 떨어져 나갈 테니까요).

그러나 이 무렵에는 아직 가야, 침미다례(:탐라), 신라가 독립 왕국으로 남아있었고 백제는 마한의 잔존세력을 정복하느라 바빴기 때문에(김성호 박사와 일도안사의 연구에 따르면, 마한의 마지막 잔존세력인 전북 내륙의 4소국小國이 항복한 해는 서기 229년임. 따라서 그 이전에는 더 많은 잔존세력이 백제와 맞서고 있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나는 잔존세력 가운데 대부분은 내륙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군사를 보내 억누르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대치한 게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야마도와 삼한백제의 관계는 숭신 말기까지 험악하기 그지없었겠죠. 그 증거는『삼국사기』「신라본기」와『일본서기』에도 나타납니다.

숭신은 서기 100년에 나라를 세웠는데, 이상하게도 11년 뒤인 서기 110년에야 ‘어조국천황(御肇國天皇 : 나라를 연 임금)’이라는 칭호를 받고, 그로부터 6년 뒤인 서기 115년에야 임나에서 온 ‘소나갈길지’라는 사신을 받거든요.

무릇 새 식민지를 세우면 본국에 곧바로 사신을 보내지 이렇게 열여섯 해 동안 미적거리지는 않으며, 숭신이 본국을 충실하게 따랐다면 굳이 후한에 사신을 보낼 리가 없다는 ‘상식’에 비추어볼 때, 이는 숭신이 자신이 점령한 식민지를 독립왕국으로 만들려다가 본국과 사이가 틀어졌으며, 그 때문에 몇 해 동안 본국과 왕래하지 않다가 서기 115년에야 화해(사실은 굴복)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봐야 합니다(소나갈길지는 서기 118년에 본국으로 돌아감).

숭신은 먼저 후한에 사신을 보내 외교권을 행사하고 그로부터  4년 후에 '어조국천황(御肇國天皇. 천황이라는 말은 서기 7세기부터 쓰이기 시작했으므로, 원래는 '어조국' 뒤에 '왕王'이나 '대왕大王'이라는 말을 갖다 붙였을 가능성이 큼)'이라는 말을 써 이미 선포한 독립의지를 더 굳혔던 것이죠.

또한 일도안사 님은 “백제는 적어도 1세기 후반에 낙동강 하류지역에 있던 의부가야(임나가야 - 옮긴이)를 점령하여 담로화(식민지화 - 옮긴이)했던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셨는데, 실제로『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왜인”이 서기 73년인 탈해이사금 17년부터 신라를 적극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해 이 가설이 신빙성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죠.

문제는 이후 마흔 아홉해(49년)동안 신라가 “왜인”과 싸우지 않는다는 사실인데요(서기 121년인 지마이사금 대부터 다시 왜인과 싸우기 시작함), 지금까지는 이들이 왜 싸움을 걸어오지 않았는지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어요(이 점은 일도안사님도 마찬가지임).

저는 서기 73년부터 서기 100년 까지는 의부가라(임나가야)를 손에 넣은 백제가 부산/동래 일대에 기반을 다지고 나서 대마도와 구주(九州)를 정복하는 일에 몰두했기 때문에 신라를 공격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서기 107년부터 서기 115년까지는 야마도와 삼한백제의 사이가 틀어져서 “왜인(임나가야인)”이 군사를 다른 곳으로 돌릴 수가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신라본기」에 이런 공백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럼 두 나라는 왜 서기 101년부터 서기 107년까지는 안 싸웠느냐고 물으실 텐데, 저는 전쟁은 한 번 일으키려면 몇 해 동안 준비해야 하니, 여덟 해 동안 아무 일도 안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추측컨대 숭신은 처음에는 독립을 선언하고 식민지를 독립왕국으로 만들려고 했지만,  자신이 데려온 적은 군사들만으로는 야요이인의 소국(小國)들을 완전히 억누를 수 없었고 본국의 지원이 없이는 정복전쟁은커녕 현상 유지도 힘든 상황에 부딪혔을 것입니다.

그래서 임나가 소나(소나갈길지)를 보내자 그를 대접하고 다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아요. 이는 소나갈길지가 임나로 되돌아갈 때 비단을 받아서 갔다는 기록에서도 확인되죠. 사신이 선물을 받고 무사히 되돌아갔다는 사실은 숭신이 사신이 전한 본국의 제의를 받아들였음을  뜻하며, 이후 야마도의 왕 자리는 수인이 이어받되 야마도가 중국에 사신을 보내지 않은 사실로 미루어볼 때 야마도가 본국에 굴복하고 담로로 되돌아갔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중국 기록에도  “왜국”의 사신이 서기 107년에만 오고 이후 비미호(신공)가 집권할 때까지는 한 번도 안 왔다고 적죠. 이후  숭신의 아들인 수인은 담로제도 안에 머무르면서 담로를 다스리는 성주(城主)  - 김성호 박사님은 이런 제후들을 '담로주主'라고 부르죠 - 로 만족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도안사님의 연구에 따르면, “야마도는 외교권이 없었다. 2세기의 중국 사서에 왜가 전혀 안 나온다. 야마도는 5왕이 70~80년 간을 다스렸지만 단독 외교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최초의 단독 외교는 중애에게서 왕권을 빼앗은 신공에 의하여” 2세기 말에 이루어진다.

물론 그랬던 비미호 - 신공 - 도 서기 230년에는 백제의 전라북도/가야/침미다례 정복을 도운 다음에는 칠지도라는 임명장을 받아 담로주主가 된다. 야마도국은 몇 번 독립하려고 - 담로에서 떨어져 나가려고 - 하다가 포기하고 다시 담로제도 안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이상이『후한서』에 나오는 “수승(숭신)”을 보는 제 견해입니다.

▶ 덧붙임 : 일도안사 님과 김성호 박사님이 되살린 『일본서기』의 초기 기년을 알고 싶으면『네티즌과 함께 풀어보는 한국고대사의 수수께끼』(『네티즌 고대사』)나『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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