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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나벌이 마한 왕자의 망명을 받아들인 까닭

신라사 조회 수 2577 추천 수 189 2004.03.22 02:46:05
▶◀조약돌 *.153.157.95
마한 왕실을 무너뜨린 백제는 마한의 수도였던 금강 유역의 도성(훗날 거발성으로 불리게 됨)을 도읍으로 삼은 뒤, 숨 돌릴 틈도 없이 서나벌과 싸우기 시작한다.

강원도에 있던 서나벌이 백제와 대립하면서 ‘제 1 전선’이 남쪽에서 동쪽으로 바뀐 것이다. 먼저 신라의 기록을 보자. 박씨족이 세운 서나벌(『삼국사기』「신라본기」시조 혁거세거서간 조에는 “나라 이름은 서나벌이었고”라는 구절이 나옴)이 서기 64년부터 한성백제와 싸우기 시작한다.

“가을 8월에 백제가 군사를 보내어 와산성(충북 보은 - 옮긴이)을 공격했다.”

―『삼국사기』「신라본기」탈해이사금 8년조 (서기 64년)

“겨울 10월에 또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하므로, 왕이 기병 2천을 보내어 쳐서 (백제군을) 쫓아버렸다.”

― 위와 같음

“백제가 와산성을 쳐 빼앗아 2백 명을 머물러 지키게 했으나 곧 다시 빼앗았다.”

― 탈해이사금 10년조 (서기 66년)

“백제가 쳐들어 왔다.”

― 탈해이사금 14년조 (서기 70년)

“백제가 변경에 쳐들어오므로, 군사를 보내어 막았다.”

― 탈해이사금 18년조 (서기 74년)

“백제가 서쪽 변경의 고을인 와산성을 쳐서 이를 무너뜨렸다.”

― 탈해이사금 19년조 (서기 75년)

“가을 9월에 군사를 보내어 백제를 쳐서, 다시 와산성을 빼앗았으며, 백제에서 와서 살던 사람 2백여 명을 모두 죽였다.”

― 탈해이사금 20년조 (서기 76년)

“백제가 변경에 쳐들어 왔다.”

― 파사이사금 6년조 (서기 85년)

이번에는 ‘가해자’인 한성백제의 기록을 보자.『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백제가 서기 64년경부터 서나벌(신라)과 싸우기 시작했다고 적혀있다.

“왕은 군사를 보내어 신라의 와산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군사를 옮겨 구양성을 공격했으나 신라가 기병 2천을 내어 맞아 쳐서 이를 패퇴시켰다.”

―『삼국사기』「백제본기」다루왕 37년조 (서기 64년)

“신라의 와산성을 쳐서 빼앗아 1백 명을 머물게 하고 이를 지키게 했으나 얼마 안 가서 신라에게 패하였다.”

― 다루왕 39년조 (서기 66년)

“군사를 보내어 신라에 쳐들어 갔다.”

― 다루왕 43년조 (서기 70년)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어 신라를 쳤다.”

― 다루왕 47년조 (서기 74년)

“겨울 10월에 다시 와산성을 쳐서 빼앗았다.”

― 다루왕 48년조 (서기 75년)

“가을 9월에 와산성을 신라에게 도로 빼앗겼다.”

― 다루왕 49년조 (서기 76년)

“봄 정월에 군사를 보내어 신라의 변경(:국경지대 - 옮긴이)을 쳤다.”

― 기루왕 9년(서기 85년)

(10월을 “겨울”로, 8월을 “가을”로 부르는 까닭은『삼국사기』가 날자를 음력으로 세었기 때문임. 음력은 양력보다 한 달이 늦다. 예를 들어 음력 4월은 양력으로는 ‘5월’이다)

보시다시피 두 나라의 기록이 모두 한성백제와 서나벌(신라)가 서로 치열하게 싸웠다고 적고 있으므로, 일단 두 나라가 초기에 만나 치열하게 싸운 것은 사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두 나라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원수가 되었을까? 그 의문을 풀려면 우선『삼국사기』「신라본기」의 기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신라본기」탈해이사금 조(條)를 펼쳐보자.

“가을 8월에 마한(馬韓) 장수 맹소(孟召)가 복암성(覆巖城)을 들어 항복해 왔다.”

― 탈해이사금 5년조 (서기 61년)

서나벌이 한성백제와 싸우기 네 해 전에, 백제에게 망한 마한의 장수가 자신이 지키던 복암성을 바치고 항복한다. 당연히 마한인 망명자들을 받아들인 서나벌은 백제와는 사이가 틀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후 서나벌의 왕이 백제 왕의 초청을 거절한 까닭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겨울 10월에 백제의 왕이 땅의 경계를 넓히려고 낭자곡성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어 만나기를 청했으나 왕이 가지 않았다.”

― 탈해이사금 7년조 (서기 63년)

“겨울 10월에 왕은 <토지를 개척>하여 낭자곡성(지금의 충북 청주 - 옮긴이)까지 이르렀으며 사신을 신라로 보내어 회합하기를 청했으나 (신라가 - 옮긴이) 따르지 않았다.”

― 다루왕 36년조 (서기 63년. < >는 옮긴이)

서기 63년경 백제를 다스렸던 왕이 “토지를 개척”했다는 말은 백제가 충청도에 남아있던 마한의 잔존 세력들을 정복했다는 뜻이며, 이런 정복전쟁은 그 이전에도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었을 것이므로 서기 61년에 서나벌에 항복한 맹소도 백제를 피해 서나벌에 항복했다고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기 63년경 백제가 서나벌에 보낸 사신은 맹소와 그를 따르는 마한 유민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을 가능성이 크며, 나는 이 때문에 그 이전에는 싸우지 않던 두 나라가 싸우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서나벌은 이미 경기도와 황해도 남부, 충청도를 차지한 백제와는 달리 차지한 땅이 적고 인구도 적었기 때문에 자신들에게로 망명한 마한 사람들을 내 주지 않았을 것이다(이는 서나벌 왕이 백제 왕을 만나지 않은 뒤 두 나라가 무려 스물 세 해 동안 치열하게 싸운 사실로도 증명된다. 만약 서나벌이 백제의 요구에 응했다면 싸울 리가 없기 때문이다).

맹소보다 쉰 세해 전에 망명한 마한 왕자도 마한 사람들을 백제에 내어줄 수 없다고 선언했을 것이다(청주 한씨 족보에는 신新 나라의 왕망王莽 원년 - 서기 9년 - 에 나라가 망했고, 마한의 마지막 왕인 계왕稽王의 왕자 가운데 한 사람이 “신라 탈해왕”에게 투항해 “본관을 청주로 삼은 한韓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구절이 나옴).

따라서 나는 서기 1세기 초에 일어난 한성백제와 서나벌의 싸움은 마한의 땅과 백성을 놓고 벌인 전쟁이며, 전자는 군사력으로, 후자는 ‘마한 왕자를 모시고 있다’는 명분으로 유리한 위치에 올라서려고 했다는 결론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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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설명 1 : 마한과 서나벌의 관계

비록 서나벌이 서기전 20년(혁거세거서간 38년)에 마한과 대립한 적이 있었으나(『삼국사기』「신라본기」혁거세거서간 38년조에 마한 왕이 신라의 사신에게 “진한과 변한은 우리의 속국인데 해마다 바치던 공물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어찌 이와 같으랴?”라고 따지자, 사신이 “우리 나라는 … 진한 유민들로부터 변한, 낙랑, 왜인倭人들까지 두려워하지 않는 나라가 없습니다. …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크게 노하셔서 우리를 군사로 위협하시니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러시는 것입니까?”라고 대답하여 왕이 사신을 죽이려고 한 사실이 적혀있음. 마한 왕의 말로 미루어볼 때 서나벌은 마한에 공물을 바치는 마한의 속국이었던 듯하다),

직접 마한을 무너뜨리지는 않았으므로(서기전 19년인 혁거세거서간 39년조에는 마한 왕이 죽은 뒤 혁거세왕이 신하에게 “서한西韓[:마한]왕이 전에 우리 사신을 모욕했으니, 이제 임금이 죽은 그곳을 치면 평정할 수 있겠습니다.”라는 건의를 들었으나, 왕이 그 건의를 물리치고 “사신을 (마한에) 보내어 조문하고 위로”한 사실이 나온다) 마한의 영향력에서 쉽게 벗어나지는 못했을 것이며,        

그래서 마한 왕자가 망명했을 때 그를 순순히 받아들였을 것이다. 마한은 서기 9년에 망했으므로 마한 왕자가 망명한 해도 그 해일 것이며, 설령 왕자가 “마한의 옛 장수”인 주근이 죽은 해(서기 16년)에 망명했다 하더라도 맹소보다 훨씬 일찍 투항한 사실 자체가 바뀌지는 않는다. 어쩌면 맹소도 먼저 망명한 이 왕자의 설득을 듣고 나서 투항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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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설명 2 : 서나벌이 마한 왕자의 망명을 받아들인 까닭(추정)

서나벌이 마한 사람들을 백제에 내주고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 더 낫지 않았겠느냐고 물어보실 수도 있는데,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백제가 서나벌을 안 친다는 보장은 없었으며 만약 서나벌이 한성백제에 마한 왕자와 맹소를 내주었을 경우 “마한 왕실의 원수를 갚는다”는 구실을 내걸면서 백제와 싸울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서나벌은 마한의 옛 왕족과 지배층을 데리고 마한을 무너뜨린 백제와 싸우는 이상 설사 옛 마한 땅을 손에 넣는다 하더라도 “저자들(백제 왕실)은 자기를 받아준 나라(:마한)를 배반하고 그 나라를 무너뜨리지 않았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는 달리 마한의 원수를 갚고 그 땅과 자리를 옛 주인(마한 왕족)에게 되돌려 주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라고 주장해 마한 사람들의 반발을 잠재울 수 있는데(중국의 삼국시대에 활약했던 조조가 자신이 실권을 손에 넣었으면서도 실제로는 ‘한漢 황제를 위해 일한다.’고 떠들며 헌제를 허수아비 황제로 내세운 사실을 떠올려보라), 백제의 요구에 응해 마한 사람들을 넘겨주는 짓은 그런 잇점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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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이렇다. 마한 왕실을 무너뜨린 백제는 정복전쟁을 펼쳐 마한의 옛 땅을 조금씩 조금씩 먹어치웠다. 그 여파로 서기 9년에는 마한 왕자가 서나벌에 항복했고, 서기 61년에는 마한의 옛 장수인 맹소와 그가 이끌던 마한 사람들이 서나벌(:신라)에 투항했다.

한성백제의 왕은 서나벌에 사신을 보내 그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으나, 서나벌은 마한과의 관계 때문에 이를 거절했고, 이에 한성백제는 후환을 뿌리뽑기 위해 서나벌을 치기 시작했다.

서나벌은 마한 왕족과 지배층을 보호할 경우 그들을 앞에 내세워 마한 땅에서 이권을 챙길 수 있었기 때문에 백제의 요구를 거부했을 가능성이 크며, 백제는 서나벌의 행동을 보고 마한 땅을 차지하려던 자신의 계획이 흔들릴 수도 있다고 여겨 서나벌을 줄기차게 공격했을 것이다.

“서기 1세기에는 백제와 신라가 만난 적이 없다.”고 설명하는 기존 학설은 바뀌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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