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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님이 한국고대사를 새롭게 조망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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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조선(기씨조선)과 위만조선(위씨조선)과 낙랑국의 역사도 크게 보면 고조선 역사의 일부분이므로, 글의 카테고리를 [고조선]으로 정했다 : 조약돌

 

3년 전(서기 2011년 12월 24일), 서울에서 열린 <스키타이 황금 문명전>에서 우연히 읽은 설명문을 소개한다. 그 글의 내용은 이렇다.

 

“당시 고조선(위만조선 - 조약돌)의 북쪽에는 흉노가 있었는데, 중국은 고조선을 ‘흉노의 왼쪽 어깨’라고 했으니, 아마도 고조선과 흉노는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러한 영향인지 이 시기에 초원 계통의 동물 장식과 동검이 만주와 한국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내가 그 전시회에서 본 사진과 설명문에 따르면, 낙랑 출토 은제행엽과 몽골 흉노고분 출토 골모드 은장식이 비슷하다.

 

낙랑(전시회의 설명대로라면 오늘날의 평양에 있던 낙랑 왕국)은 요령성에 있다가 위만조선을 무너뜨린 서한(전한)의 압력에 밀려 평안도로 달아났는데, 그렇다면 그 문화(은제행엽을 만들어 쓰는 문화)는 위만조선이 무너지기 전이나 위만조선이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낙랑이 요령성이나 그 부근에 있었다는 학설이 사실이라면 바로 곁에 있는 흉노와 교류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낙랑국(단군조선의 제후국)은 그 때 흉노로부터 금과 은으로 치레거리(장신구[裝身具]를 일컫는 순우리말)를 만들어 쓰는 문화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유라시아의 유목민족은 스키타이족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녀야 하기 때문에 땅이나 숲 대신, 가지고 다닐 수 있고 쉽게 상하거나 망가지지 않는 금/은/보석/소/말/양/낙타/염소를 재산으로 삼는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신시[神市]와 단군조선의 유적임이 분명한 요령성/남[南]몽골의 홍산문화/하가점하층문화의 유적에서는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나오지 않고 대신 돼지뼈나 옥[玉]이나 청동으로 만든 물건이 나온다. 이는 신시와 단군조선이 유목민족의 나라가 아니라 농경을 바탕으로 한 나라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단, 나는 환웅족이 말이 아니라 순록을 탄 유목민들이라는 학설을 접한 적이 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신시는 ‘지배층은 유목민족 출신인 정복자고 피지배민은 대부분 농민이나 어민인 나라’인 셈이다)

 

(단, 낙랑과 위만조선이 흉노에게서 금은 치레거리를 만들어 쓰는 법을 받아들였다는 가설을 따르자니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다름이 아니라 같은 전시회에서 “부여의 유적인 길림시 모아산에서 금제 동물장식이 나온다.”고 설명한다는 사실이다. 부여는 한[漢]나라 이전부터 있었던 나라고 흉노가 땅을 넓혀 몽골초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전에는 - 몽골초원의 중부와 동부를 차지하고 있었던 - 동호[東胡]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부여나 낙랑이 흉노가 아니라 동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이 부분이 명확하게 밝혀져야 한다)

 

아무튼 고고학 유물로 보았을 때 위만조선과 흉노는 서로 교류했음이 확실하고, 제 3자인 서한이 위만조선을 “흉노의 왼쪽 어깨”라고 불렀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 교류는 ‘서로 싸우고 부딪치지만 영향도 주고받은 관계의 부산물’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친하게 지내기도 한 증거’라고 봐야 한다(만약 서로 싸웠다면 ‘가까운 곳에 있는 원수’라고 말하지 ‘왼쪽 어깨’라고 부를 이유가 없다. 한 나라나 개인이 다른 나라나 다른 개인의 ‘몸의 일부분 같은 존재’로 불린다면 그것은 두 나라, 두 사람 사이가 아주 가깝고 서로에게 중요한 관계라는 뜻이다).

 

서한은 흉노와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흉노와 친한 나라/민족들(예컨대 위만조선이나 뵈[티베트의 정식 국호] 계통인 강羌족)을 좋게 볼 수 없었고(적과 치열하게 싸우다 보면 ‘적의 동무’는 ‘나의 적’으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흉노의 편을 들 수도 있는 위만조선을 없애려고 한 것이 아닌지(서한의 임금인 유철[시호 한 무제]이 위만조선을 침략하려고 할 때 내건 명분이 무엇이건, 그 명분 뒤에 숨은 ‘진짜 이유’들 가운데 하나로 이것을 지적할 수는 있을 것이다).

 

사족을 달자면 위만이 “조선”(기자조선. 나는 ‘기[箕] 나라’라고 부른다)으로 달아나 기자족의 왕인 준왕(準王)을 속이고 그를 동남쪽으로 몰아낸 시기는 유방(劉邦)이 서한을 세워 다스렸던 때고, 유방은 동호를 무너뜨리고 흉노제국의 땅을 넓힌 바아투르(한자로는 ‘묵특’) 선우와 같은 시대를 산 사람이기 때문에, 어쩌면 위만조선과 흉노제국은 위만조선이 세워졌을 때부터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고 그 관계가 위만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유지되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위만은 동호를 무너뜨리고 코앞까지 밀어닥친 흉노제국과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판단했을 것이고(위만조선은 위만이 기 나라를 무너뜨리고 그 왕을 내쫓은 다음에 세운 나라라, 기 나라 유민들의 반발을 누르고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었을 것이다. 이 경우 정권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길은 이웃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뿐이다. 그 이웃나라가 힘센 나라라면 관계를 개선할 이유는 더 확실해진다), 흉노제국은 몽골초원과 중앙아시아까지 지배할 정도로 힘센 나라였고, 위만조선은 작고 약한 나라인데다가 선주민을 억누르면서 정권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아쉬운 쪽은 위만조선 왕실이었을 것이다. 만약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관계를 맺자고 제안한 사자를 보냈다면, 위만조선이 흉노에게 먼저 사자를 보냈을 가능성이 크다.

 


댓글 '1'

WKIM

2015.09.22 09:57:55
*.225.223.167

소설이 달나라로 날라감니다.
한고조때 연왕 초한지의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동호에 투항하여 노왕으로 살다가 뒤짐.
이 무렵, 연나라 장수 위만도 1000여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망명 후 중국 유민들을 모아 모반을 일으켜 조선의 준왕은 측근을 데리고 남쪽으로 달아나 한의 왕이 되고 조선은 위만조선이 됨
묵특이 동호를 멸망시키고 한고조가 묵특에게 완전히 발림
위만 조선이 멸망 할 때 우거왕의 아들 장이 한무제에게 투항하고 기후국(幾侯國)에 봉분되어 연나라 지역을 다스리고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의 3군을 위만조선 영내에 설치하고 1년후 예맥(濊貊) 지방에 현도군을 설치.
고구려 대무신왕때 호동왕자가 급습한 최씨 낙랑국은 함흥지방(낙랑군 동부도위 지역)으로 간주됨
낙랑군은 400년간 존재하다가 고구려 미천왕의 공격을 받고 낙랑의 장통이 일부 민호를 이끌고 요동의 모용씨(摹容氏)에게 투항하여 그 후 모용씨 및 북위 시기에 낙랑 및 대방군은 요서 지역에서 계속 존속되거나 이름만 존재하는 군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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