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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님이 한국고대사를 새롭게 조망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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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약돌의 말 : 이 글은「▷◁서기 3세기 중반 부여(夫餘)의 인구 수에 대한 간단한 고찰」의 후속편입니다.

 

<새한국고대사>의 게시판에서「▷◁서기 3세기 중반 부여(夫餘)의 인구 수에 대한 간단한 고찰」을 읽은 사람은 ‘부여 인구가 64만 명 정도라고? 얼마 안 되네!’라고 생각할 것이다(자세한 것을 알고 싶은 사람은 그 글을 직접 읽어보라). 그리고 만약 그 사람이 중국에 대해 열등감이나 선입견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역시 우린 안 돼. 중국 한족은 16억 명이 넘잖아? 그런데 우린 남북을 다 합쳐봐야 7500만 명 정도고 해외동포를 다 합쳐도 8000만 명밖에 안 되는데!’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서기 3세기 중반의 부여 인구는 같은 시기, 그러니까 서기 260년대의 중국 인구와 견주어야지 오늘날(서기 2015년)의 인구와 견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때도 중국 인구가 더 많았지만 그래도 오늘날처럼 중국 인구가 16억 명인 것은 아니었다.

 

내가 11년 전(서기 2004년), 한림대학교에서 김병준 교수님의 강의를 들었는데, 김 교수님은 후한(동한) 말의 인구는 5900만 명인데, 삼국시대가 끝난 다음 서진 초기에 인구를 조사해 봤더니 1500만 명에 불과했다는 연구결과를 소개하셨다.

 

교수님은 “물론 (동한 말기와 삼국시대의 전쟁 때문에) 많이 죽었겠지만, 서진시대의 인구가 적게 나온 까닭은 후한과는 달리 정부가 인구조사를 제대로 할 만한 행정조직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지 ‘4400만 명’이 죽어서는 아님을 알아야 한다. 정부를 피해 달아나서 인구조사에 포함되지 않은 인구가 많았다.”고 설명하셨지만, 그래도 서진이 동한보다 인구가 적었다는 사실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기록을 따를 경우 서진(서기 265년에 사마의의 손자인 사마염이 세웠다)의 인구는 1500만 명이고, 이는 부여의 64만 명과 견주면

 

64 : 1500(단위 만) → 1 : 24(반올림)

 

가 되어 서진이 부여보다 인구가 스물 네 곱절 많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정도면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만약 오늘날의 중국 한족 인구인 16억 명으로 계산할 경우 중국 인구는 부여 인구보다 2500 곱절[‘배倍’를 일컫는 순우리말] 많다는 계산이 나오니까!).

 

(참고로 중국 인구는 서기 17세기, 그러니까 명나라 말기에 1억이었으며, 그 인구가 4억 명으로 늘어난 시기는 서기 19세기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지 1년이 되는 서기 1950년에야 6억 5천만 명이 되었으며, 서기 1990년에 12억 명이 되었다)

 

그러니 어떤 나라가 지금 인구가 많다고 해서 옛날부터 그랬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품지 말고, 오늘날의 상황을 바탕으로 열등감을 품거나 고대의 상황을 섣불리 재단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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