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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읽는 법 9. 신공황후조의 구성

백제사 조회 수 410 추천 수 0 2016.04.21 23:51:12
一道安士 *.147.96.19

비류에서 여휘에 이르는 백제왕 14명을 잘라내고 대신 응신 앞을 메우기 위하여 일본전역을 뒤져본 결과 과거 2~3세기에 임나가야인들이 구주에 세웠던 야마대국 기록이 나왔다. 이 외에도 또 무슨 기록이 나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본서기 편집진은 야마대국 기록을 응신 앞에 대신 붙이기로 하였다. 그런데 야마대국을 보니 남왕 5명이 통치하던 전기와 비미호라는 여왕이 통치하던 후기로 나뉘고 중간에 내란이 있었는데, 남왕들의 기록은 충분히 있었으나 여왕의 기록은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이 비미호라는 여왕은 본래 야마대국 마지막 왕의 왕비로 173년에 정변이 일어나 남편 대신 왜왕이 되었으나, 6년간의 내란이 벌어져 179년에야 즉위를 하였고, 69년을 재위한 후 247년에 죽었다. 말이 통치지 거의 장막 뒤에 존재하는 무속인 같은 상징적 존재여서 별로 기록이 없었던 것이다.

  

390년에 즉위한 응신의 즉위간지를 지키고 비미호에 연결하려면 즉위연도를 60년 올리거나 120년 올려야 한다. 따라서 당시 2가지 안이 제시되었다고 추정된다.

  

[1안] 390년에 즉위한 응신을 60년 올려 330년에 즉위한 것으로 하고, 247년에 퇴위한 비미호를 82년 내려 329년에 죽은 것으로 한다.

[2안] 390년에 즉위한 응신을 120년 올려 270년에 즉위한 것으로 하고, 247년에 퇴위한 비미호를 22년 내려 269년에 죽은 것으로 한다.

  

이 중에 [2안]이 채택되었다. 그 이유는 [1안]을 선택하면 4세기 초의 기록이 필요한데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2안]을 선택하면 비미호가 3세기 초에 자신(백제)들과 접촉한 기록들이 남아있어 이 기록들을 추려 후반부를 메우면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국 기록을 보니 3세기 중반에 위나라에 조공한 기록이 있어 이것도 왕력을 쓰는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렇게 비미호 재위기간 69년을 기반으로 왕력을 구성하였으나 비미호가 여왕이 된 179년부터의 전반기를 채울 수 없는 것이 또 문제였다.

  

173년에 야마대국 마지막 남왕이(중애천황) 죽었는데 이때 왕비가 비미호였지만 이후 그녀의 기록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일본서기 편집진은 403년에 응신이 죽은 후 그의 왕후인 중희의 기록이 남아있어서 그것으로 중애 말년부터 시작하여 신공황후조 초반기를 채우기로 하였다. 그리고도 어쩔 수 없는 14년부터 38년까지의 25년은 별다른 방법이 없어 비워둘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남왕이던 중애와 비미호 즉위년 사이의 내란에 의한 6년 공백은 삭제하고 연결하기로 하였다. 아마 무정부상태의 혼란기라 공식기록이 없없을 것이다. 그리고 공백을 없애야 중애 9년부터 나오는 응신의 왕후 기록으로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다. 따라서 신공 초반에 나오는 황후가 중희이기 때문에 황태자는 응신이 아니라 응신의 아들이 토도치랑자다.


중희의 고민은 응신의 죽음 이후 왕이 된 아들인 토도치랑자를 어떻게 공립하여 왕권을 지키느냐였다. 하지만 408년에 토도치랑자가 죽고 409년에 인덕이 즉위한다. 토도치랑자는 공립되지 못하였으므로 그의 재위기간은 그의 아버지인 응신의 재위기간에 통합되어 일본서기에 기록된 것이다. 이것이 백제 진왕제의 기록원칙이다.

  

이를 요약하면 신공황후조는 크게 5부분으로 나뉜다.

  

[1기] 원년 – 13년; 5세기 초 중희(응신의 왕후) 기록 - 자체 기록

[2기] 14년 – 38년; (25년 기록 공백기)

[3기] 39년 – 40년; 3세기 중반 삼국지의 비미호 기록 - 외국 사료를 베낀 것

[4기] 46년 – 52년; 3세기 초 백제(목지국)의 비미호 기록 - 자체 기록

[5기] 55년 - 말년; 4세기 후반 한성백제(위례국) 기록 - 외국 사료를 베낀 것

 

일본서기 연도를 찾는 방법은 이 5가지 구간 기록들 중에 왜국 자체의 기록이 아닌 [3기]와 [5기]를 빼고 찾는 것이다. 이를 연도로 자세히 쓰면 다음과 같다.

  

<재위년도><실재구성연도>

  

[5기] 신공황후조 말기: 4세기 후반 한성백제기록을 보고 베낀 것

 

신공 69; 247; 비미호 죽은 해

신공 68; 246

신공 67; 245

신공 66; 244

신공 65; 243

신공 64; 242

신공 63; 241

신공 62; 240

신공 61; 239

신공 60; 238

신공 59; 237

신공 58; 236

신공 57; 235

신공 56; 234

신공 55; 233; 한성백제 왕력 기술 시작

 

신공 54; 232

신공 53; 231

  

[4기] 신공황후 후반기: 백제기록에서 3세기 초의 비미호 기록을 발췌한 것(연도가 그대로 맞음)

  

신공 52; 230; 목지국이 칠지도 보냄

신공 51; 229

신공 50; 228

신공 49; 227; 목지국의 가야제국 통합, 변진한 체제 완성

신공 48; 226

신공 47; 225

신공 46; 224; 목지국과 왜국의 교섭 시작

 

신공 45; 223

신공 44; 222

  

[3기] 신공황후 중반기: 삼국지 보고 베낀 것

 

신공 43; 221; 비미호 사신기록

신공 42; 220

신공 41; 219

신공 40; 218 ; 비미호 사신기록

신공 39; 217 ; 비미호 사신기록

 

[2기] 신공황후 전반기: 25년 기록 공백기

 

신공 38; 216 ; 전기 기록 공백 끝

...

신공 14; 192 ; 전기 기록 공백 시작

 

[1기] 신공황후 초반기: 5세기 초의 중희(응신의 왕후) 기록

 

신공 13; 191

신공 12; 190

신공 11; 189

신공 10; 188

신공 09; 187

신공 08; 186

신공 07; 185

신공 06; 184

신공 05; 183

신공 04; 182

신공 03; 181

신공 02; 180

신공 01; 179; 비미호 즉위년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신공황후조 백제기록에서 3세기 초의 비미호 기록을 발췌한 [4기]를 [5기]인 4세기 후반이라고 하는 것을 보았다. 사서를 읽고 분석하는 역사학의 기본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이런 사람은 일본서기는 물론이고 삼국사기도 읽을 수 없다. 이 사람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신빙성이 적다고 할 가능성이 높다.


신공황후조 앞은 다음처럼 연결한다.


성무 05년: 167년; 영강 원년(후한 환제)

성무 48년: 168년; 건영 원년(후한 영제)

성무 60년: 169년; 건영 2년

중애 원년: 170년; 건영 3년

중애 02년: 171년; 건영 4년

중애 08년: 172년; 희평 원년

중애 09년: 173년; 희평 2년; 중애 죽음 후 왕이 된 비미호의 신라와의 접촉 (아달라이사금 20년조)

<내란기 6년 삭제>

신공 원년: 179년; 광화 2년

신공 02년: 180년; 광화 3년

...

  

여기서 중애 2년이 171년이고 중애 8년이 172년이면 중애 3년부터 중애 7년은 어디 갔느냐는 질문이 나와야 한다. 이것은 나중에 설명할 것이다. 중애 말년인 9년은 비미호 기록과 응신의 왕후 기록기 겹치는 곳이다. 기록을 보고 중애의 왕비였던 2~3세기 비미호의 기록인지, 아니면 응신의 왕후였던 5세기 초 중희의 기록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것도 나중에 설명할 것이다.

  

*桓·靈閒, 倭國大亂, 更相攻伐, 歷年無主. 有一女子名曰卑彌呼, 年長不嫁, 事鬼神道, 能以妖惑衆, 於是共立爲王.

환제와 영제 때에 왜국에 큰 란이 있어 서로를 공격하였는데 여러 해가 지나도록 주인(왕)이 없었다. 비미호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있었는데 ...  이에 함께 왕으로 세웠다. (후한서 왜국전)


후한서의 이 기록이 대체로 맞으나 연도가 다소 애매하다. 정확히 쓰려면 환.영제간이 아니라 "후한 영제 희평 2년부터 후한 영제 광화 2년까지 6년동안 큰 난이 있었다." 라고 써야 한다. 하지만 내란이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라 성무-중애 교체기부터 이미 왜국은 정세가 불안하였기 때문에 그것까지 따지면 환제라는 표현도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후한서는 왜국 내란의 상황을 적었는데 난의 원인을 알려면 삼국사기를 보아야 하고, 난 직전의 왜국 상황을 알려면 일본서기의 성무-중애조를 보아야 한다. 이 왜국의 정세불안의 원인은 1세기 말~2세기 초에 가야계 이민자들이 만든 나라에, 압도적인 무력을 가지고 몽골초원에서부터 남하하여 2세기에 경주지역에 자리잡은 신라의 팽창에 의하여 변진한의 새로운 그룹들이 한반도로부터 왜국으로 밀려왔기 때문이다. 비미호는 새로운 이민그룹을 대표하는 여자로 신공의 이름 기장족희는 부산의 "기장벌에서 온 여자"의 이두식 표기다.


삼국지나 후한서 같은 중국사서를 무턱대고 믿는 다면 이는 학문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다. 어느 사료든 한 줄씩 검토해보고 확인한 후에 믿어야 한다. 신공황후조를 비롯한 일본서기 초기기년을 정확히 아는 것은 다음 삼국사기 신라본기 기록 때문이다. 이 기록으로 인하여 한중일 동양 3국의 사서가 하나로 일치하게 된다. 이 기록을 남겨준 삼국사기 편집진에게 경의를 표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阿達羅尼師今 20年(173년); 夏五月, <倭>女王<卑彌乎>遣使來聘.

     

--------------------------------------------------

마지막으로 문제 하나만 내고 마친다.


[문제] *응신 22년; 春三月 甲申朔戊子, 天皇幸難波, 居於大隅宮.

  

응신 22년 3월에 천황이 난파로 가서 대우궁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이 기록이 사실이면 왜 사실인지 아니면 왜 아닌지를 논증하라.

  

(참고) 이에 대하여 <동북아역사재단>은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고 있는데 역사적 해석이 아니라 단지 기록이 그렇다는 것이다.

난파:『日本書紀』 신무천황 즉위전기 춘2월조 難波 참조.

대우궁: 현재 大阪市 東淀川區 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日本書紀』 안한천황 2년 9월조에 소를 난파와 대우도에 방목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우리에게는 삼국사기라는 해답집이 있기 때문에 이 정도 문제는 어렵지 않게 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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