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님이 한국고대사를 새롭게 조망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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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본기 實聖尼師今-14年(415년), 秋七月, 大閱於穴城原, 又御金城南門觀射. 八月, 與倭人戰於<風島> 克之.
415년 7월에 신라군이 혈성원에서 대규모 군사열병을 하고, 다음 달인 8월에는 풍도에서 왜인과 싸워 이겼다는 내용이다. 왜인이 침입해서 방어한 것이 아니라 신라군이 공격했을 가능성을 남겨둔 기록이다. 그런데 이 기록의 사실성에 대하여 다음처럼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415년에 신라군이 대규모 군사 사열을 했는지 당신이 보았느냐? 그리고 풍도에서 싸워 이겼다는 것도 이상하다. 동해안에 섬이라고 해야 포항 앞바다에 무인도가 몇 개 있을 뿐인데 어떻게 풍도라는 괴상한 섬에서 싸웠다는 말을 믿을 수 있느냐? 삼국사기가 신라 중심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고, 따라서 이 기록들이 약소국이었던 신라를 강하게 보이기 위하여 삼국사기 원저자가 슬쩍 만들어 집어넣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있느냐?>
풍도라는 섬은 김부식을 비롯한 삼국사기 편집진도 위치를 모르는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또 나온다.
*신라본기 -訖解尼師今-37年(346), 倭兵猝至<風島>, 抄掠邊戶, 又進圍<金城>急攻. 王欲出兵相戰, 伊伐湌<康世>曰: “賊遠至, 其鋒不可當, 不若緩之, 待其師老.” 王然之, 閉門不出. 賊食盡將退, 命<康世>率勁騎追擊, 走之.
4세기 흘해이사금때 강세가 신라군을 지휘하여 왜병과 싸운 곳이 풍도인데 이로부터 풍도는 왜국과의 국경에 위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사진참조)
당시 삼한 땅에 내려온 훈족의 일파(흉노계 선비족 중심의 유목민족)에게 2개의 적이 있었다. 하나는 마한세력인 백제였고, 다른 하나는 변진한세력인 임나였다. 임나는 작은 적이었으나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고, 백제는 큰 적이었으나 먼 곳에 위치하였다.
훈족은 이 어려운 상황을 외교로 타개한다. 백제 북쪽에 말갈인들이 백제의 담로국으로 살고 있었다. 그래서 368년에 이들 말갈족(삼국사기의 한성백제)과 혼인동맹을 맺고 말갈왕(근초고왕)이 백제왕을 칭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과거 고구려의 속민이었던 한강북쪽의 마한소국들이 일제히 근초고왕의 신민이 됨으로 해서 고구려가 분노하게 된다. 그러자 훈족은 고구려에 왕자를 볼모로 보내 안전을 유지한다.
그런데 대사건이 벌어졌다.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큰 전쟁이 벌어져 고구려가 백제 정부를 일본열도로 몰아낸 것이다. 큰 적이 바다 건너로 천도하였으나 여전히 삼한 땅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4세기에는 가야지역의 문화가 신라지역보다 우세하지만, 5세기에 들어서면 서로 비등해해지고, 5세기 중반에 들어서면 역전이 일어나 신라가 우세해진다. 이 실성이사금 14년의 기록은 신라로 남하한 훈족이 힘을 키워 임나와 비등해지던 시기를 그린 것이다.
풍도라는 섬은 신라(훈족)와 신라본기의 왜(임나)의 국경에서 찾아야 하는데 국경은 울산의 태화강이었다. 그러면 태화강 하류에서 섬이라고 불릴만한 곳이 있는지를 찾아보는 것이 순리다. 꼭 4면이 물로 둘러(싸)(이)지 않았더라도 3면이 물로 둘러(싸)(이)면 사람들이 섬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태화강 하류에 반도 지형이나 이와 유사한 장소가 있다는 뜻이다. 바로 지도에서 표시한 지역이다.
울산에서는 의외로 많은 삼국시대 전쟁유물이 발굴되는데 신라와 임나의 국경이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에 가장 중요한 지역 중의 하나가 울산이다.
하지만 정말로 이 무렵 신라군의 기세가 대사열을 단행하고 임나를 공격할 정도로 상승하였는지에 관해서는 의문을 거두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신라가 작은 적인 임나와는 맞서지만 큰 적인 백제(비류가 건국한 목지국을 비롯한 마한소국들)와도 맞설 수 있느냐이다. 신라와 임나의 접촉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왜로 기록되지만 백제와의 접촉은 안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이 삼국사기 편찬원칙이다. 이제 일본열도로 천도한 백제 기록인 415년(인덕 17년)의 일본서기를 편다.
*일본서기 인덕천황 17년(415); 신라가 조공하지 않았다. 적신의 선조 지전숙녜와 소박뢰조의 선조 현유신을 보내 조공하지 않은 일에 관해 묻게 하였다. 신라인이 두려워하여 공물을 바쳤다. 조로 바치는 비단 1460필 및 여러 잡물을 합하여 배 80척 분량이었다.
[주석]
조공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라가 왜에게 문책을 당하고 그 때문에 많은 공물을 바치게 되었다는 상황설정자체는 사실이라고 볼 수 없다. 단지 비단 1460필이라는 구체적 수치가 기록되어 있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 후대 신라가 .... -<동북아역사재단>
이 기록에 대하여 동북아역사재단만 안 믿는 것이 아니라 일본학계도 안 믿는다. 하지만 삼국사기로 비교할 때 415년 훈족(신라)의 일본열도로 천도한 백제로의 조공거부는 신뢰성이 높은 기록이다. 실제로 일본의 인덕능 등 5세기 왕릉급 고분에서 유리잔 등 신라유물들이 발굴된다. 이 유물들은 고구려나 백제에는 본래 없었던 것이다. 훈족들이 로마와 접촉할 때 얻은 것들로서, 344년에 신라 땅에 들어올 때 가지고 왔다가, 일본열도로 천도한 백제에게 공물로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만일 415년의 신라군 대사열을 볼 수 있다면 당시 로마군과 게르만군의 사열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나는 당시 신라군의 깃발에 무슨 글자가 써 있을지 궁금하다. 한자는 아직 배우지 못하였으므로 한자는 아닐 것이고,... 로마를 침공했던 훈족군대는 당시 무슨 깃발을 휘날리고 있었을까?
451년 프랑스 땅에서 5만 훈족을 막기 위하여 로마는 게르만족들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써야 했다. 이로부터 로마-게르만 연합군을 결성하여 훈족을 막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결국 게르만족들에게 서로마제국을 내어주고 말았다. 이 당시 훈족의 왕이었던 아틸라의 명성은, 경주에서 발굴되는 유물들 중에 그 지역 유물들이 줄비한 것을 볼 때, 신라인들에게도 전해졌을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