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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긴메이릉(우메야마고분)을 둘러싸고


“다시 이야기를 소가노 우마코로 되돌리자. 여전히 그가 대왕이었다는 데 의문을 품은 사람이 있지 않을까 생각되기 때문이다.


앞서 부계 출자계보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소가노 우마코가 대왕인지 아닌지를 생각할 경우, 이 점이 중요하다. 부계원리를 전제로 하면 긴메이나 비다쓰 이후 우마코에게 대왕의 자리는 전해지지 않지만, 부계를 절대시하지 않으면 달리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나메에서 우마코까지 4대는 부계일 뿐 아니라, 이미 5세기의 왜 5왕의 계보에도 남계적 요소가 농후하다. 그러므로 왕권에 대해 고찰할 경우, 부계 요소는 무시할 수 없다. 요컨대 부계를 중시하면서 그것을 뛰어넘은 원리의 존재를 제시할 수 있을지의 문제다.


그것을 푸는 열쇠는 긴메이의 묘에 있다. 긴메이는 소가씨가 아닌데도 이례적으로 아스카 주변에 묻혀 있다. 긴메이에 대한 소가씨의 특별한 배려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경우 문제는 긴메이가 생존 중일 때가 아니다. 사후의 취급이다.


우선 그의 능묘라고 하는 히노쿠마노사카아이가 미세마루야마 고분의 남쪽에 있는 우메야마고분인 점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나 축조연대는 미세마루야마고분보다 늦다. 이나메의 죽음은 570년, 긴메이는 571년으로 거의 같다. 또 긴메이의 궁은 아스카와는 무관한 시키시마노 가나사시[磯城島 金刺. 기성도 금자]다. 이는 긴메이가 일단 다른 장소에 매장되었다가 뒤에 히노쿠마에 이장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히노쿠마노사카아이 릉(우메야마 고분)은 누가, 언제 축조했을까? 미세마루야마고분은 길이 약 310m로 거대하지만, 이는 자연지형을 이용했기 때문에 거대하게 보이는 것이다. 반면 우메야마고분은 길이가 140m에 불과하지만, 자연구릉을 대규모로 깎아서 만든 것으로, 축조에 들어간 노동력 측면에서는 마루야마고분을 상회한다. 더욱이 세키가와 히사요시[關川 尙功. 관천 상공]에 따르면, 우메아먀고분에는 남쪽에 히라타키타가와[平田キタガワ. 평전키타가와] 유적이 존재하며, 그곳에는 고분의 바깥 제방 외측(바깥쪽 - 인용자)에 원지(苑池. 동산[苑]의 연못[池]. 흙이나 돌로 축대를 쌓고, 그 안에 물을 가두어 둔다 - 인용자)/부석(敷石. 널리 흩어진/퍼진[敷] 돌[石]. → 길이나 뜰에 [골고루] 깐 납작한 돌. 순우리말로는 ‘깐돌’ - 인용자) 유구와 원석(猿石. 원숭이[猿]를 새긴 돌[石] - 인용자) 등의 향연시설이 마련되어 있는데, 그것은 기로(紀路)에서 아스카로 들어오는 입구로서 정비된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우메야마고분, 즉 긴메이릉은 미세마루야마고분을 능가하는 기술과 노동력을 동원하여 한반도에서 오는 외교사절을 맞이하기 위해 정비된 것이었다. 미세마루야마고분이 나라분지를 곧장 북상하는 하도의 기점이었다면, 우메야마고분은 기로(紀路)를 거쳐 멀리 바다 저편으로 통하는 기점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히노쿠마사카아이 릉(우메야마 고분)은 결코 긴메이만을 위해서 축조된 것이 아니다. 아스카에 군림하는 소가노 우마코의 권력구상의 일환으로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시기는 언제였을까?


이 고분의 존재가 처음 확인되는 것은 스이코 20년(서기 612년)에 기타시히메를 이곳으로 이장했을 때이므로, 그 이전에 축조된 것이다. 그러나 살펴보았듯이 우메야마 고분의 축조가 아스카를 기점으로 하는 공간구조를 의식한 것이라면, 하도와 나니와로 통하는 대도의 완성과 가까운 시기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니와로 통하는 대도가 완성된 것이 스이코 21년(서기 613년) 이므로, 그것과 거의 비슷한 시기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스이코 20년 기타시히메와의 합장도 고분의 완성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시기가 된다.”


- 144쪽 ~ 146쪽


6) 기타시히메의 이장은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7세기 초 아스카의 입구를 장식하는 기념물로 주도면밀하게 축조된 우메야마 고분이 완성되었다. 북측의 미세마루야마 고분에서는 하도가 똑바로 부상했으며, 근처에는 아스카사의 탑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흡사 이곳이 일본의 중심이었던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런 우메야마 고분에 긴메이가 매장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운 사건이 시작되었다.


최초의 사건은 스이코 20년(서기 611년) 기타시히메의 이장이다. 오자와의 견해에 따르면, 기타시히메는 처음에는 아버지 이나메의 미세마루야마고분에 묻혔다고 한다. 미세마루야마고분에는 두 개의 석실이 있는데, 앞의 관이 6세기 후반, 안쪽 관이 7세기 초 무렵의 것으로 앞이 이나메, 안쪽이 기타시히메의 관이라고 한다. 그런 기타시히메가 바로 근처에 남편인 긴메이릉이 완성되자 이장하게 된 것이다.


이장된 2월 경오일에 가루[輕. 경] 거리에서는 뇌사(誄辭)가 바쳐졌다. 뇌사란 고인을 기리며 공적을 칭송하는 행사다. 가루는 현재 가시와라[橿原. 강원] 시 오가루초 부근으로, 야마토 분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하도와, 동쪽으로 아스카를 거쳐 이와레 방면으로 통하는 야마다[山田. 산전] 도의 교차점에 해당하는데, 고대에는 시장도 열리던 교통요지였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의 눈앞에서 기타시히메의 장례식이 거행된 것이다.『일본서기』의 기사가 어느 정도 사실을 전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우나, 네 번째로 사카이베노 마리세[境部 摩理勢. 경부 마리세]가 ‘씨성지본(氏姓之本)’을 읊었다는 기술은 무시하기 힘들다. ‘씨성지본’이란 물론『일본서기』편자의 표현이지만, 기타시히메가 태어난 소가씨의 유래와 계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사카이베노 마리세는 소가씨 일족이다. 한 세대 앞에 죽은 긴메이를 위해 능을 만들어 그곳에 기타시히메를 이장하고, 이때의 뇌사에 ‘씨성지본’이 강조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현재의 상식으로 생각하면 이나메의 묘에서 긴메이의 묘로 시신이 옮겨졌다는 것은 아버지 슬하에서 남편에게 시집간 것으로 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것이다. 원래 이곳은 소가씨 권력의 중추다. 이곳에 출자가 그다지 명확하지 않은 긴메이의 능묘가 조성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긴메이를 소가씨의 세력권으로 받아들이는, 더 나아가 말하자면 긴메이를 소가씨 일족으로 포섭하는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기타시히메의 이장은 이를 긴메이의 묘와 합체시킨다는 시각적인 행위를 통해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하면 기타시히메와 일체가 된 긴메이를 이나메의 아들로 인지시킴으로써, 긴메이의 영(靈)을 소가씨의 선조에 합류시키려고 한 것이다. 앞의 ‘씨성지본’이란 긴메이의 왕권을 소가씨가, 구체적으로는 우마코가 계승했음을 선언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뇌사는 주도면밀하게 대왕으로서 우마코의 지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다음 사건은 스이코 28년(서기 620년) 10월로, 모래와 자갈을 히노쿠마 릉(긴메이 릉)에 덮고 주위에 흙을 쌓아 산을 만들고, 각 씨(氏. 여기서는 집안 - 인용자)에게 명하여 그 위에 큰 기둥을 세우게 했다고 한다. 야마토노아야노 사카노우에노아타[倭漢 坂上直. 왜한 판상직]가 세운 기둥이 특히 높아서, 그 때문에 오하시라노아타이[大柱直. 대주직. 직[판상직]이 [세운] 큰[大] 기둥[柱]? - 인용자]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원시사회에서 나무에 방울이나 북을 달아 하늘(중국적인 하늘로서 天이 아니라 영혼이 떠도는 하늘)과 귀신에 기원하는 것은 일반적인 풍습이었으며, 일본이나 한반도의 여러 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위지』(魏志. 진수의 역사책인『삼국지』의 일부분인「위지」를 일컫는 말이다 - 인용자) 한전(韓傳) 등에 그런 기사가 있다. 여기서 야마토노아야[倭漢. 왜한] 씨가 활약하고 있는 것을 보면 직접적으로는 한반도의 영향이었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긴메이릉을 무대로 하여 하늘 높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종교행사가 열렸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 146쪽 ~ 148쪽


7) 소가 일족으로서의 긴메이


“그렇다면 여기서 상기해야 할 것은 긴메이 시호의 일부라고 하는 ‘아메쿠니오시하라키’라는 말이다. 필자는 6세기 단계에 시호는 성립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정확한 성조(聲調)를 가진 고한음(古韓音)이라면 표기 자체의 성립은 이 시기로 소급하여 생각해야 한다.


아마 하늘에 제사지내는 종교행사와 ‘아메쿠니오시하라키’라는 말은 관계가 없지 않을 것이다. 앞서 이 말이 천지개벽을 떠올리게 하는 신화적 표현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긴메이가 ‘아메쿠니[天國 = 天地]’를 개벽시킨 영웅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아스카에 묻힌 것은 긴메이가 소가씨 일족의 일원으로 간주되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 긴메이가 천지개벽의 영웅으로 간주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소가 왕조의 시조로서 자리매김한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소가 왕조가 탄생하고 우마코가 정식으로 대왕이 된 것이다.


‘아메쿠니오시하라키’가 오늘날 전해진 이유가 있다. 기둥을 세운 행사가 열린『일본서기』스이코 28년의 시세조(是歲條)에 황태자와 시마[島. 도] 대신이『천황기(天皇記)』/『국기(國記. ‘나라에 대한 기록’/‘나라의 역사를 적은 책’이라는 뜻 - 인용자)』를 편찬했다는 유명한 기사가 있다. 종래에는 이것을 스이코천황 때의 수사(修史. 역사[史]를 엮고 가다듬음[修] - 인용자) 사업이라고 해석했지만, 소가노 우마코의 수사사업으로 다시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원래 역사 편찬은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는 왕권 고유의 행위다. 이 해에 소가노 우마코가 대왕으로서 그것을 실현한 것이다.


후에 고교쿠[皇極. 황극] 4년 6월 을사의 변 때, 죽기 직전의 소가노 에미시가『천황기』와『국기』를 태우려고 했다. 이때 후네노후히토 에사카[船史 惠尺. 선사 혜척]가 재빨리『국기』를 꺼내어 나카노오에(중대형 - 인용자)에게 바쳤다는 기사가『일본서기』에 실려 있다.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어쨌든『국기』가 남았다면 거기에 긴메이에 대해 ‘아메쿠니오시하라키’라는 말이 기록되었을 것임에 틀림없으며,『일본서기』편자가 그것을 채용했던 것이다. 여기에『천황기』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소가 왕조의『천황기』가 있었다고 기록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진상은 여전히 불명한 점이 많지만, 그 시대에 도래인 계통으로 구성된 사관 집단이 활약하고 있었음은 가토 겐키치[加藤 謙吉. 가등 겸길]에 의해 점차 밝혀지고 있다. 그들의 역할을 생각하면 소가 왕조 시대에 수사사업이 이루어진 것은 당연하다. 현재 허구 덩어리 같은『일본서기』가 그래도 일정한 사료적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은, 아마 그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천황기』/『국기』가 전해져서『일본서기』편자가 그것을 이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소가노 우마코를 대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다지 적지 않은 것 같지만, (일본의 - 인용자) 학계에서는 이것을 금기시해온 감이 있다. 그런 와중에 주목할 만한 것은 오타 쇼지로[太田 晶二郞. 태전 정이랑]가『셋쓰국풍토기(攝津國 風土記. 섭진국 풍토기)』유문에 ‘토인운(土人云) 부지시세지호명(不知時世之號名) 단지도대신시이(但知嶋大臣時耳)’라고 되어 있는 것에 대해 ‘황실을 축으로 한 역사체계에 대해 소가씨를 축으로 하는 체계도 있었다.’고 한 점이다.


필자 자신도 소가노 우마코가 사실상 대왕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면 소가씨를 축으로 하여 어떤 역사상을 묘사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다다르면 여전히 불안한 마음이 든다.”  


- 148쪽 ~ 150쪽


(인용 끝)


* 출처 :『일본서기와 ‘천황제’의 창출 -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구상』(오야마 세이이치 지음, 연민수/서각수 옮김, 동북아역사재단 펴냄, 서기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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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야마 교수(아래부터 존칭 생략)는 서기 2009년에 이 책을 썼고, 이 책이 한국어로 옮겨져서 나온 해가 서기 2012년이다.


오야마의 학설이 일도안사님의 학설과 다른 점은, 전자가 소아하이가 “조묘(祖廟. 선조의 사당 - 인용자)를 세우고 팔일무(八佾儛)를 추었으며, 이마키[今來. 금래]에 쌍묘를 만들고 에미시의 묘를 대릉(大陵), 이루카의 묘를 소릉이라고 칭했다.”는『일본서기』의 기록을 “진실성은 없다.”고 평가하고 사료로 채택하지 않는다는 점이고, 일본인의 역사가 조몽시대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런 오야마도 소아씨가 왜국의 지배자였으며, 그들이 왜국의 대왕이었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만세일계라는 관념은 이제 일본 역사 교과서에서 사라져야 한다. 설령 ‘한 집안이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왔다.’는 관념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 관념은 서기 8세기 이후의 일본사회에만 적용될 수 있으며, 그 이전, 그러니까 서기 1세기부터 서기 7세기까지 일본열도에서 펼쳐진 역사에서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일본열도의 고대사를 제대로 알 수 있다.   


댓글 '2'

一道安士

2016.01.05 18:32:03
*.202.72.51

잘 읽었습니다. 언제 방 주인장님을 모시고 조약돌님과 함께 식사라도 한 번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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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에서 진왕과 마한왕이 분리되듯이 당시 왜국은 진왕(천황)과 왜왕으로 분리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진왕은 정신적인 지도자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고 왜왕이 실제 정치를 한 것입니다. 흠명천황의 지시는 사실은 소아도목의 지시입니다. 마치 천황의 명을 받들어 통치를 하는 형식을 갖춘 것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식은 아베 총리가 천황의 지시를 대신 실행하는 것입니다.

삼한에서 3세기 후반에 진왕 대신에 마한과 진한 지역 맹주가 서진을 상대로 외교를 하는 것도 같습니다. 이런 풍습이 진왕이 왜국으로 건너간 후에도 그대로 이행 된 것입니다.

일본사에서 천황으로 기록된 사람이 실권을 가지고, 즉 천황과 왜왕이 동일인물로 통치하던 시대는 왜5왕이 등장하는 5세기뿐입니다. 천황은 어차피 앞에 나타나지 않으니 실제로 있건, 귀신이 되어 없건 상관이 없습니다.

중세 서양사도 보면 교황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권위를 빌려 통치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예수님의 형상이 있으면 되는 것이지 반드시 사람들 앞에 나오셔서 말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소아도목과 흠명천황은 거의 동시에 죽는데, 흠명천황이라고 기록된 인물이 실제로 있었어도 소아도목의 그림자일 뿐이니 본체가 사라지면 그림자도 사라지듯이, 흠명천황은 소아도목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왜국의 부여씨 왕권이 웅략의 한반도 천도 후 약해집니다. 이후 백제- 북위 전쟁 때 백ㅈ군 지휘부가 동성왕에게 작위를 요구하다 왜국으로 모두 쫓겨납니다. 백제-북위 전쟁시 백제군 총 사령관은 무열천황(여고)입니다. 그런데 이들 백제군 지휘부가 왜국을 점령하고 새 왕조를 연 것이 계체 이후의 소아씨 왕조로 봅니다. 백제-북위 전쟁은 일본서기 없이는 연구할 수 없습니다.

일본서기를 쓸 때 부여씨는 6세기에 자신들을 명목상의 통치자로 냈다고 7세기에 타도된 소아씨 왜왕들에게 천황위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정신적인 지도자로 겨우 명맥을 이어가던 계체 이후 왜왕 왕통에 천황위를 부여했습니다.

실은 곤지가 백제로 돌아가며 응신 때 나갔던 삼한백제가 다시 한반도로 천도한 것입니다. 따라서 비류가 세운 미추홀에 세운 목지국 백제의 왕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1기] 백제시대 4백년
1.비류 ------------------------------------ 12.여구 - 13.여수 - 14.여휘

[2기] 왜국시대 80년(396-477)
15.응신 - 16.인덕(찬) - 17.이중(미) - 18.반정(진) - 19.윤공(제) - 20.안강 - 21.웅략(무, 여곤)

[3기] 백제시대 2백년
22.동성(여대) - 23.무령(여융) - 24.성명(여명) - 25.위덕(여창) - 26.혜 - 27.법 - 28.무 - 29.의자 – 30.풍


응신 때 왜국으로 나갔다가 웅략 때 다시 들어왔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언젠가 우리 역사책에 부록으로라도 이 왕력이 들어갈 날이 올 것이라고 봅니다. 빈 칸을 채워야 하는데 저도 고민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서명천황이란 무왕이 왜국으로 와서 활동한 기록이라고 봅니다. 이후 무왕이 죽고 시신이 왜국으로 이송됩니다. 의자왕이 조문을 하고. 그리고 무왕의 아들인 천지가 왕이 됩니다. 이후 백제가 멸망하고 천무가 일본서기를 쓰며 일본사가 한국사에서 분리된다고 봅니다.

동산

2016.01.09 09:20:11
*.39.31.86

乗っ取られた飛鳥王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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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古代・飛鳥時代の朝廷が、朝鮮半島にあた百済族に転覆され、乗っ取られた事実が判明しました。征服王朝の正統性を強調し、自らの治世に活かすために書かれたのが記紀だったのです。

 推古天皇の摂政として敏腕を振るったのが厩戸皇子(聖徳太子)だったと書紀は書いている。しかしその死について、「推古天皇二九年、春二月の己丑の朔(621年2月5日)の夜半に厩戸豊聡耳皇子命、斑鳩宮に薨りましぬ」と、僅か一行で済ましている。諸王、諸臣、天下の百姓、ことに長老等は、愛児を失った如しとして嘆いたともあるが、死因には何も触れていない。

 上宮聖徳法王帝説37)によると、「上宮聖德法王、・・・甲午(574)年に産れまして、壬午(622)年の二月廿二日に薨逝したまう。生れまして四十九年」とあり、また、右は法隆寺金堂に坐す薬師像の光後の銘文なり。即ち寺を造りし始めの縁の由也として、「・・・二月廿一日癸酉、王后即世したまうは、これ即ち聖王が妻の膳大刀自也。二月廿一日は、壬午(622)年の二月也。翌日、法王登遐したまうは、即ち上宮聖王也。即世・登遐は、これ即ち死の異名也」とある。

 偶然かも知れないが、太子夫妻の死は僅か一日違いであり、その死因が疑われる。国際陰謀の回し者による毒殺ではなかったかとみられる。ただし、これは書紀や上宮聖徳法王帝説を真に受けてのこと、実は聖徳太子は日本書紀の創作だったことが判明し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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乗っ取られた飛鳥朝廷 - syamashita.net

www.syamashita.net/history/kodaishi/nottri.html 古代・飛鳥時代の朝廷が、朝鮮半島にあた百済族に転覆され、乗っ取られた事実が ...
の弟王子の児翹岐(ぎょうぎ)33),68)(書紀名中大兄皇子21))や百済の大佐平智積(ち ...


山下重良著「古代日本原記」発刊 発行 平成25年10月2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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