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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광개토태왕비문의 영락 17년조 이해

백제사 조회 수 122 추천 수 0 2016.11.25 10:17:04
5. 광개토태왕비문의 영락 17년조 이해 

영락 10년조의 임나가라 침공
영락 14년조의 대방계 침공 
영락 17년조의 후연계 침공

전쟁대상 

서기 404년의 전투를 기록한 광개토왕비문의 영락 14년조를 보면 다음과 같다. 
비문은 사건의 해만 기록하고 있어서 사건이 발생한 달은 비문만으로는 알 수 없다. 

十四年 甲辰 而倭不軌侵入帶方界□□□□□石城□連船□□□□□□□□... 

영락 14년 갑진년 왜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지역을 침입해왔다는 것이다. 
이 대방의 위치는, 전쟁지역 부근으로 바로 뒤에 평양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 따라서 비문의 대방계는 당시 고구려군의 남부 군사기지가 몰려있었던 황해북부로 추정된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왜의 침입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었다고 하나 후방을 공략당해 굉장히 놀랬을 것이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를 보면 왜가 법도를 어겼다는 것이 무엇인지 나온다. 
대방계 전투 4년 전인 영락 10년, 왜가 신라 국경지역에 가득 차 성과 못을 파괴하고 있다는 신라의 요청을 받고 고구려 광개토왕은 대군을 출동시키게 된다. 그 결과 고구려 보병과 기병 5만은 왜의 임나가라 종발성까지 가서 왜를 박살낸다. 


그 결과 402년(응신 14년)과 404년(응신 16년)에 궁월군의 대규모 피난민이 도해를 하게 된다. 
이것이 일본사의 본격적인 시작(초대형 고분의 출현으로 인한 중기고분시대)이요, 왜국의 인종교체를 불러오는 시발점이다. 

그런데 이 직후에 대방계를 침공당했으니 고구려가 화를 아니 낼 수 없다. 
후방을 침공당한 영락 14년인 응신 28년조를 보면 고구려가 얼마나 화를 냈는지를 알 수 있다. 

응신 28년 秋九月, 高麗王遺使朝貢 因以上表 高麗王敎日本國也 
(고구려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그리고 표를 올렸는데 '고구려왕이 일본국에 교지를 내린다'고 하였다) 

- 원문 생략 - 
(토도태자가 그 표를 읽고 화를 내며, 그 표의 무례함에 대해 고구려 사신을 질책하고 표를 찢어버렸다) 

이로부터 왜의 대방계 침입이 404년 가을 9월 전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내용상으로는 고구려사신이 왜국을 위협하기 위해서 온 것이나 일본서기는 조공하러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서기는 편집원칙상 외국에서 사신만 오면 무조건 다 조공이라고 기록하는 것일 뿐, 기본적으로 사건 자체의 기술은 정확함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사신이 가져온 그 표의 원문은 日本國이 아니고 여휘가 다스리던 倭國이었을 것이다. 

이런 중요한 국사를 왜 응신이 보지 않고 태자가 나와 사신을 맞는지를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 답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있다. 그 직전인 서기 403년에 해당하는 아신왕 12년의 백제본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아신왕 12년, 봄 2월 倭國使者至 王迎勞之特厚 
(왜국의 사신이 도착하자 왕이 깊이 위로하였다.) 

응신이 403년(402) 2월에 죽은 것이다. 그래서 태자가 대방계 침공을 항의하러 온 고구려 사신을 맞는 것이다. 
백제본기는 응신의 퇴위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와 광개토왕비문이 하나로 일치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응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403년에 죽었다고 한 고사기의 기록이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는 응신 말년으로 기록한 41년(408년)조에 봄 2월에 죽었다고 하여 사건의 달만은 정확히 쓰고 있다. 
이것으로도 일본서기의 기록은 해보다 달이 훨씬 신뢰도가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영락 14년의 대방계 침공이 가을 9월 또는 그 전후였다는 일본서기의 증언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400년 영락 10년 고구려는 신라를 침입한 왜의 본거지인 한반도 남부의 임나가라 종발성을 직접 치게 된다. 
이것이 영락 10년조의 고구려 보기 5만 대군이 출동하게 된 배경이다. 

400년 이후 왜의 일부는 대가야인 고령으로 가기도 하고, 일부는 영산강 유역으로 가기도 하고, 일부는 일본열도로 건너간다. 




 
신묘년조의 [도해]는 마술같은 단어입니다. 일본은 [바다를 건너와서]라고 해석하고.. 정인보선생은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다>라고 비문에 있지도 않는  고구려를 주어라고 가정해서 반박합니다. 모두 [바다를 건너다]라고 해석하기 때문에 일본이나 정인보선생의 해석은 내용적으로나 문법적으로나 모두 틀린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十七年 丁未 敎遣步騎五萬 ▨▨▨▨▨▨▨▨ : 십칠년 정미 교견보기오만 ▨▨▨▨▨▨▨▨
17년(407년) 정미(丁未)에 왕의 명령으로 보군과 마군 도합 5만 명을 파견하여 (…훼손...)
 
王師 四方 合戰 斬煞蕩盡 : 왕사 사방 합전 참살탕진
왕의 군사가 사방에서 합전(合戰)하여 모조리 참살하고 탕진하였다.
* 王師 : 왕의 군사
 
所獲鎧鉀 一萬餘領 軍資器械 不可稱數 : 소획개갑 일만여령 군자지계 불가칭수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만여 벌이며, 그 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 軍資器械(군자기계) : 군수물자
 
還 破 沙溝城 婁城 ▨住城 ▨城 ▨▨▨ ▨▨▨城 : 환 파 사구성 루성 ▨주성 ▨성 ▨▨성 ▨▨▨성
돌아오면서 사구성 루성 ▨주성 ▨城 ▨▨(성) ▨▨▨城을 격파하였다.
 
여기서 공격대상이 후연입니다.

광개토왕의 비문에는 후연과 관련된 기록은 이 내용이 전부입니다.
고구려는 이 결과로 후연의 후신인 북연 성립이후 서기408년에 북연과 종족의 연을 맺는 관계설정하기도 하였습니다.
 
왜는 지금의 가야지역인 임나에 거주하면서 가야인들로 부터 철을 공급받아 갑옷이 풍부했습니다.
왜는 부여출신인 기마민족으로 기마에 능하고 해상술이 발달하여 어디든지 갈수 있었습니다.
간혹 가야인을 기마민족이라고 보는 일본인도 있으나 부여왜가 기마민족입니다.
따라서 임나의 풍부한 철의 생산으로 갑옷이 많았고, 기마에 능하였으므로 전투력도 있었습니다.
거기다 해상력이 강하여 바다건너 일본왜까지 가기도 하였습니다.
 
그 내용이 신묘년조에 나와있습니다.
 
百殘新羅 舊是 屬民 由來朝貢 而 倭 以辛卯年來 渡每 破 百殘 [][][]羅 以爲臣民
백잔과 신라 옛날에 이들은  속민(屬民)으로 조공(朝貢)을 해왔었다.
그러나 왜가 신묘년(辛卯年)(391년) 그 이전부터 [바다를 건너], 백잔 [임나 신]라를 [쳐부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백제와 신라는 옛날에 고구려의 속민이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비문에 쓰여있으니 아닐 가능성보다 그럴 가능성이 더 높아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가 신묘년 그 이전부터 바다를 건너가서 왜를 점령하기도 하고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백제(249)와 가야(212) 신라(249) 까지 점령하여 한반도 남부의 3국을 신민으로 삼았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이 왜를 관망만 할수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왜는 동북아의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던 것이죠. 
 
 
영락 6년조는 고구려가 왜를 치기위한 사전정지작업이고.
영락8년조는 고구려가 신라로 가기위해 신라로 가는 길목인 동예를 일부 부대만 파견하여 길을 닦은 것이고
영락 10년에 왜를 치기 위해 신라를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임나가라까지 쳐들어 간 것이죠.

그 이전에 영락 9년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지만 만일 요청하지 않았다면 백제처럼 쳐들어가서 왜를 공격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고구려는 5만의 대군을 보내 왜의 임나가라를 정벌하려고 하였지만 생각대로 뜻이 이루어진거 같지는 않습니다.     
왜가 404년 해상력을 이용하여 배를 타고 대방고지를 치러 갔기 때문입니다.
이때 404년 고구려는 왜를 참살이란 표현으로 보아 고구려로 부터 심한 타격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왜에 대한 공격의 마침표는 바로 이 "참살무수" 란 단어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즉 영락14년조에 나타납니다.

영락 17년 인 407년 새로이 "참살탕진"이란 단어가 보입니다
갑옷 1만여벌을 소획하고 참살 탕진 하였으니 이는 왜가 이나라 후연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404년 대방계 공격을 마지막으로... 일본으로 이주한 왜는 후에도 자신들의 한때 고향이였던 임나를 그리워하고 고토를 반듯이 회복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일본서기 흠명천황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댓글 '2'

방카이

2016.12.01 17:40:41
*.105.5.253

以辛卯年來 --> 來라는 단어의 의미는 '~부터(from)'의 의미인 것인가요?

조이

2016.12.02 09:48:47
*.106.206.114

以辛卯年來 에서
辛卯年 以來로 해석됩니다.
以來가 ~그 이전에(from)의 의미이고
以後가 ~그 이후에(to) 의 의미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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