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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기 후반 왜국 대란의 원인에 대한 일본 학계의 공식적인 견해를 찾아보고 싶은데 알 수가 없다. 또 우리나라 학계는 이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1) 왜국대란의 시기
후한서: 환제(146~167), 영제(167~189)
삼국지: 환제(146~167), 영제(167~189)
양서, 북사, 위지: 영제 광화중(178~183) 

2) 왜국대란이 끝난 시기 
일본 中平刀 명문: 중평(184~189) 이전

삼국사기에 의하면 왜국대란은 영제 시기인 173~179년 사이이며, 비미호는 173년에 왕이 되었으나 즉위하지 못하고 179년에 즉위한다. 모든 사료들 중에 173~179년이라고 한 삼국사기가 가장 정확하다. 그 이유는 왜국 대란의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왜국 대란의 시기는 환제와 영제 중에 영제가 맞다. 또 비미호가 173년에 왕이 되었어도 내란 기간에 즉위하지 못한 것을 볼때 이 시기에 왕이 없었다는 후한서의 기록은 믿을만 하다.

그러면 왜 이때 큰 내란이 발생하였느냐는 것인데, 내란은 사회의 모순이 누적되어 해결방법을 찾지 못할 때 발생한다. 그러면 일본에 왜 이때 하필 무슨 문제가 발생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일본서기에 왜국 대란에 관한 기록이 없으니 대란은 없었다." 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다. 일본서기는 중애 말년을 173년에, 신공원년을 179년에 배당하여, 내란기간 6년을 삭제하여 그렇다. 하지만 내란의 흔적은 있다. 5명의 고왕조 왕들(숭신-수인-경행-성무-중애) 중에 앞의 3명은 정상적으로 재위하였는데, 뒤의 2명인 성무(163~169)와 중애(170~173)가 비정상적으로 단명하다. 따라서 이는 2세기 중반 이후 왜국에 혼란이 발생하여 내란의 징조가 보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숭신-중애의 고왕조 기록에 웅습과의 전쟁 기록이 나오는 것은 4세기말~5세기초 응신 기록이다. 일본서기를 쓰려니 4세기 이전 기록이 부족하여 15대 응신의 기록을 떼어다 그 앞에 적절히 배치하였기 때문이다. 응신기록을 이동시킨다는 것은 응신의 왕후인 중희, 아들이 토도태자, 최대 가신이었던 무내숙녜의 기록까지 함께 이동한다는 뜻이다. 신공 앞부분도 마찬가지로 5세기 초 중희의 기록이다. 

일본서기에는 후대의 인물을 전대로 옮겨놓는 경우는 있으나 전대의 인물을 후대로 옮겨놓는 경우는 없다. 후대 기록을 옮겨 놓았다는 것은 8세기에 일본서기를 쓸 때 일본열도를 다 뒤져 고 기록을 찾았으나 응신 앞을 채울만한 기록들의 양이 매우 부족했다는 뜻이다. 역사를 기록할 정도가 되려면 사관이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체계를 가진 국가가 필요하다.

고대사를 공부하려면 당시의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나 현대를 사는 우리는 이미 현대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서 당시의 시각으로 판단하기가 어렵다.

흔히 3세기 이전을 삼국시대 초기, 4~5세기를 삼국시대 전기, 6세기 이후를 삼국시대 후기라 한다. 왜국 대란은 초기에 벌어진 사건인데, 이때만 해도 대륙에서 한반도로, 또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사람들이 대거 이동하던 시기였다. 일본열도는 마치 근대의 호주처럼 안구빌도가 낮아 상대적으로 비어있었다. 또 문명이 대륙에서 한반도로, 다시 일본열도로 흐르다보니 한반도에서 최근에 간 사람들의 문명수준이 오래전에 한반도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의 후손들보다 월등히 높았다.

2세기 후반 왜국대란 이후 약 백년 후에 발생한 전기고분시대의 시작도 3세기 중반에 발생한 고구려와 위나라의 전쟁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위군이 옥저땅에서 고구려군에게 대패하고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후퇴하였으나 낙동강유역을 잠령하는 통에 그 지역에 살던 많은 변진한인들이 일본 구주로 이민해간 것이다. 이것이 일본열도를 대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2세기 후반 일본의 왜국대란도 결정적 원인은 한반도에서의 대규모 이민이다. 2세기 초에 낙동강 상류에 들어온 오환/선비계 중심의 북방 유목민족 국가가 2세기 중반에 낙동강 중상류지역을 모두 점령하고 강국이 되는 과정에 발생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변진한인들이 이들을 피해 남쪽의 임나로, 그리고 다시 일본의 구주로 이민을 하게 된다. 박씨 신라의 이야기다.

2세기 초에 경주로 남하하여 경주에 도읍한 박씨 신라가 지마이사금 때 한강유역의 한성백제 및 낙동강하류의 임나가야와 화친을 맺어 내부정비의 시간을 갖는다. 멀리 있는 한성백제로는 공주를 보내 왕실과 혼인을 하는 것이었고, 가까이 있어 계속 싸우던 임나와는 그 배후인 구주의 야마대국으로 왕자(천일창)를 보내 화친을 하는 것이었다. 

일본서기 고왕조 기록은 숭신-수인-경행-성무-중애의 5명인데 이들 중에 숭신과 수인조에 임나 및 신라와의 대외접촉기록이 나온다. 경행부터는 대외 교섭기록이 안 나오고 중애 말년에 나오는 신라정벌 기록은 5세기 초 사건을 옮겨온 것으므로 제외한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가야, 신라 기록을 한반도의 가야, 신라가 아니라 일본열도에 있는 가야, 신라계 정착촌 기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본 일이 있는데, 이들 기록이 삼국사기에 다 나오므로 잘못된 판단이다. 5세기 왜 5왕의 기록도 일본서기를 남긴 기내정부가 아니라 임나에 살던 통치자들 기록이라고 주장한 사람도 보았는데 왜 5왕 기록들이 일본서기에 다 나오므로 잘못된 판단이다. 

심지어 광개토왕비문의 기록들도 고구려정부가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도 보았는데 삼국사기에 다 나오므로 거짓이 아니다.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중국사서로 검증되지 않으므로 믿을 수 없다고 한 사람도 보았는데 한결같이 중국사서를 읽는 능력이 없었다. 예를 들면, 삼국사기에 마한이 1세기에 백제에게 멸망했다고 하였는데 중국사서에 그런 기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보니 1세기에 마한이 백제에게 멸망한 기록이 후한서와 삼국지에 모두 있었다. 같은 미술작품을 감상하고 있어도 이해정도는 다 다른 것이나 같다.

신라는 일성이사금과 아달라이사금 때 정복전쟁을 벌이는데 그 절정은 2세기 중반인 아달라이사금 때였다. 아달라는 북방민족의 아버지 혹은 지도자를 뜻하는데 훈족의 아틸라도 같은 뜻이다.

아달라 3년(156), 여름 4월, 서리가 내렸다. 계립령에 길이 개통되었다.
=> 계립령 부근을 정복하였다.

아달라 4년(157), 봄 2월, 감물현과 마산현 두 현을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3월, 왕이 장령진에 행차하여 주둔하는 병사들을 위로하고 각각의 군사들에게 군복을 하사하였다.
 => 감물현과 마산현 일대를 정복하였다. 장령진 부근을 정복하였다.

아달라 5년(158), 봄 3월, 죽령이 개통되었다. 왜인이 예방해왔다.
=> 죽령 부근을 정복하였다.

아달라 9년(161), 왕이 사도성에 행차하여 주둔하는 병사를 위로하였다.
=> 사도성 부근을 정복하였다.

아달라 12년(165), 겨울 10월, 아찬 길선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자 ... 왕이 노하여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자, 백제는 성을 닫고 수비하며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는 식량이 떨어져 돌아왔다.
=> 낙동강유역을 넘어 한강유역을 공격하였다.

아달라 14년(167), 8월, 일길찬 흥선으로 하여금 군사 2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게 하고, 또한 왕은 기병 8천을 거느리고 한수로부터 그 곳에 도착하였다. 백제는 크게 두려워하여 잡아갔던 남녀를 돌려주고 화친을 요구하였다.
=> 3만에 가까운 대군으로 한강유역을 공격하였다.

아달라이사금 시기의 신라는 인구가 백만에 이르는 대국이 되어 한반도 전체를 흔들고 있다. 6세기 이전에 신라가 백제를 포위 공격한 것은 이때가 유일하다. 이 신라의 대규모 정복전에 얼마나 많은 이민이 발생하였는가는 삼국유사가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포항 영일만 부근에 살던 젊은 남여가 왜국으로 도망갔다는 것이었다. 연오랑-세오녀 이야기와 영일만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된 연유다.(영일제천)

신라에 의한 변진한 지역의 정치적 혼란으로 150년대와 160년대에 많은 사람들이 구주로 이주하였는데 구주에 가보니 여러 소국들이 있었다. 이들은 비록 한반도에서 밀려왔지만 구주인들에 비하여 월등한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 상황을 맞이한 것이 163년에 즉위한 성무천황이다. 성무천황은 약 70~80년 전인 1세기 후반에 가야지역에서 온 이민자들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강력한 이민집단을 맞아 새 질서를 구축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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