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의 고대문화," 2003년, 학연문화사 발행, 최성락 엮음, 13,000원

상당히 오래전에 나온 고고학 책인데 요즘에야 다시 보고 있다. 전남지역 고대문회를 고고학자의 입장에서 총정리한 느낌이 드는 책이다.
저자가 여러명이다.(이하 존칭생략)

최미숙: 주거지
토광묘: 한옥민
이정호: 옹관고분
조근우: 석실분
고용규: 성곽
김건수: 자연유물
최성락: 종합토론

이 책은 사료적 판단을 가급적 줄이고 순수하게 고고학적인 고찰만을 하여 선입견을 배제하려 노력하였다. 따라서 일반독자가 보기에는 다소 지루한 느낌이 있을 수 있으나 학문적으로 볼 때는 가치가 높다고 생각한다.

최성락은 377쪽에서 전남지역의 고대문화 편년을 다음처럼 하고 있다. 즉 고고학적으로 전남지역에 중요한 변화가 발생한 지점이 아래와 같다.

BC 2세기                     철기문화의 시작
1세기                            옹관묘, 토광묘
3세기 말                      옹관고분 1기-옹관고분 등장
4세기 후반                  옹관고분 2기-거대고분의 축조
5세기 전반                  옹관고분 3기-외래문물 증가(원통형토기 등)
5세기 후반                  석실분 1기-횡혈식, 수혈식, 횡구식 석실, 전방후원분 등장
6세기 중분                  석실분 2기-백제계 횡혈식 등장

전남지역이 토착적인 청동기 문화에서 외래문화가 섞인 철기문화로 전환하는 것은 BC 2세기인데 최성락은 이 무렵에 철기 기술이 전남지역에 유입되었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석묘와 석관묘 문화가 옹관묘와 토광묘로 전환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왜 하필 BC  2세기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BC 2세기는 중국대륙과 만주에 대 정치적 변화가 발생하는 시점이다. 진한 교체기에 대규모 이민이 북중국에서 만주와 한반도로 들어왔고, 또 그 결과의 하나로 고조선이 무너져 대규모 이민이 만주에서 한반도로 들어왔다. 

전남지역까지 내려온 주민의 주력은 부여족이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마한의 주력도 부여족이라고 본다. 그리고 내가 '5세기 이전 영산강유역 고대사의 논점'에서 지적한대로 이때의 이민이 오늘날 전남지역 주민의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전에 살던 청동기 주민들은 이 집단에 흡수된 것으로 생각한다. 부여의 통치조직을 비롯한 정치사가 그대로 삼한 특히 마한에 옮겨왔으므로 부여를 연구하려면 삼한사를 연구해야 된다고 본다.

어느 지역에 거대고분이 등장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세력가들이 출현하였다는 뜻이다. 전남지역 토착묘제인 옹관고분이 대형화되는 것은 옹관고분 2기인 4세기 후반이다. 즉 백제 근초고왕시기다.

최성락도 지적하고 있지만 과거 한국 학계는 일본서기 신공 후반부 기록을 4세기 후반으로 비정하여 4세기 후반 근초고왕시절에 백제가 전남지역을 통합하였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는 고고학적으로 중대한 모순이다. 4세기 후반은 오히려 전남지역에 거대고분이 등장하는 등 지방세력가의 출현을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신공 후반기의 기록을 4세기 후반에 비정하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모순이라는 것은 1990년대 이후에 고고학계로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지금은 그런 연대비정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이 책을 보면 이 연대비정의 고고학적 모순을 최초로 지적한 사람이 자신{최선락}으로 되어 있다). 대신 고고학자들은 5세기말-6세기초에 어떤 정치적 변혁이 있었다고 지적하여 왔다. 그 이유는 전남지역 문화가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에 점차 변화하여 웅진백제화 하는데 그 중간에 틀림없이 어떤 계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고고학자들이 지적한 바로 그 시점인 498년에 동성왕의 영산강유역 무력시위가 있다. 이 기록이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전남지역 기록이다. 삼국사기는 이때부터 전남지역이 자신들의 통치권에 들어갔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사서와 고고학의 일치를 보여준다. 

책 소개는 이 정도로 하고 내 설명을 조금 보충하고자 한다.

그러면 일본서기 신공조 후반이 5말6초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일본서기 신공조 전반은 5세기 초 응신의 왕후 기록이고, 후반은 3세기 초 왜여왕 비미호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즉 두 사람의 기록이 신공조에 함께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5세기 초 인덕때 사건인 사지비궤의 가야토벌 기록도 신공조 후반에 들어가 있다.

백제가 가야제국을 토벌하고 전남지역으로부터도 항복을 받아낸 신공 49년조는 삼국사기에 해는 물론 달까지 다 나오는대로 227년이다. 이 백제군이 웅진의 백제 진왕의 군대였다. 일본서기 신공조에 금강유역만 나오고 한강유역이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진왕이 죽고 그 아들이 새 진왕이 되어 왜여왕 비미호에게 보낸 칼이 칠지도다. 하지만 그 새 진왕은 아직 자립위왕을 못하여 백제왕이 아니라 백제왕세자를 칭해야 했다. 

5세기 초 사지비궤의 가야토벌 사건이 신공조 후반에 기록하게 된데 대하여 다시 한 번 부연설명을 하고자 한다. 이는 일본서기 신공조의 구성과 관련하여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본서기를 보면 백제에 대해서는 모두 우호적이고, 가야에 대해서는 거의 다 우호적이며, 신라에 대해서는 거의 다 적대적이고, 고구려에 대해서는 적대적이기도 하고 우호적이기도 하다. 가야에 대해서 기술하는데 단 한군데가 적대적이다. 그곳은 신공조 후반기록들이다. 그 이유는 일본서기 집필할 때 사용한 이곳의 출전이 다른 곳의 출전과 다르기 때문이다.

일본서기를 보면 '당연히' 당시 왜국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내용들이 나오는데 비하여 신공조 후반기록들은 백제를 비롯한 한반도의 사정만 나오고 왜국 내부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전혀 알 수 없다. 왜국 내부의 일들이란 왜국에 풍년이 들었다던가, 황후가 어디로 행차를 하였다던가, 누구를 어떤 직위로 임명하였다던가, 누구에게 무엇을 만들게 하였다던가,... 등등이다. 그 이유는 이곳의 출전이 왜국의 기록이 아니라 외국, 즉 백제의 기록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삼한백제의 기록을 가지고 주객을 바꾸어 기술한 것이 신공조 후반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지비궤의 기록도 성군으로 묘사된 인덕조에 적합하지 않다고 보고, 가야에 대하여 적대적인 기록들을 모아놓은 신공조 후반에 함께 끼워 넣은 것이다.   

전남지역은 백제에 2번 복속하였다. 한 번은 227년으로 웅진에 도읍했던 삼한백제 진왕에게, 또 한번은 498년에 내려온 역시 웅진에 도읍했던 백제 동성왕에게 굴복하였다. 그러나 앞의 백제와 뒤의 백제는 동시에 건국되었으나 그 기원이 달랐다. 앞의 백제는 아산만 미추홀에서 비류로부터 시작하였다가 부근의 웅진에 도읍한 백제이고, 뒤의 백제는 한강유역에서 온조로부터 시작하였다가 475년에 웅진으로 내려온 백제이기 때문이다. 

전남지역 고대사를 이야기하려면 5세기 후반에 이 지역에 등장하는 전방후원분을 빠뜨릴 수 없다. 최성락은 전방후원반이란 용어는 완전히 일본인 학자들이 만든 용어로서 그보다 우리 고유의 용어인 장고분을 쓰자고 한다. 그리고 이 지역의 개방성을 강조한다. 백제는 왕이 백제 고유의 무덤 대신에 당시 외국이었던 양나라의 전축분을 사용할 정도로 개방적이었다는 것이다. 옹관묘를 쓰던 사람들이 어느날 석실분을 쑤기도 하고 전방후원분을 쓰기도 하던 곳이 또 이 지역이었다. 전남지역은 한.중.일 해로의 교차지점으로서 문화가 섞이는 곳이다. 장보고가 이곳에 청해진을 설치한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무덤 형태만 비슷한 것이 아니고 출토물도 비슷하다. 출토물이 비슷하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전남지역 전방후원분에서 나오는 원통형토기를 비롯한 왜식유물들이 대부분 일본이 아니라 전남지역에서 제작된 것이듯이, 일본의 응신능이라든가 인덕능 같은 초대형 전방후원분에서 나오는 유물들도 중요한 것은 대부분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역시 한국에서 만들어져 들여온 것이라는 뜻이다. 

전남지역 전방후원분은 5세기 후반 왜국에서 건너온 왜왕(곤지=웅략천황=왜왕 무)세력의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즉 이들이  거의 20년 만에 귀국하여 백제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왕이 된 동성왕의 집권기반이었다고 본다(방송에서 동성왕이 10대 중반에 왕이 즉위하였고 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는 사료 해석상의 오류로서 그는 30대 중후반에 즉위하였다). 다시 말하면 5세기 후반에 왜국에서 건너와 영산강유역 외곽에 자리잡은 전방후원분 세력의 우두머리가 백제 동성왕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