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질문인 동시에 어려운 질문입니다. 고구려사초와 필사본 화랑세기의 기본적인 차이를 한 번 보겠습니다. 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책의 내용에 관한 모든 책임을 진 저자(혹은 출판자)이고, 그 다음이 책을 집필한 의도를 밝히는 서문(혹은 발문)일 것입니다. 필사본 화랑세기는 저자가 김대문이라고 필사되어 있습니다. 또한 저자가 쓴 서문도 있습니다. 그 서문에 뛰어난 장수와 재상들이 화랑으로부터 많이 나왔다는 삼국사기와 같은 구절이 그대로 나옵니다.
이제 고구려사초를 보겠습니다. 저자가 따로 있습니까? 없습니다. 글 쓴 사람이 저자입니다. 서문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고구려사초는 저자가 필사한 사람, 즉 글 쓴 사람입니다. 제가 법 전공은 아니나 이것은 법률적으로도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사서로서 기본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백제본기와 신라본기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백제본기> 비유왕 8년, 봄 2월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좋은 말 두필을 보냈다. 가을 9월 또 (신라에) 또 흰 매를 보냈다. 겨울 10월 신라에서 답례로서 좋은 금과 구슬을 보내왔다.
<신라본기> 눌지마립간 18년, 봄 2월 백제왕이 좋은 말 두 필을 보내왔다. 가을 9월 다시 (백제왕이) 흰 매를 보내왔다. 겨울 10월 왕이 황금과 맑은 구슬로서 답례사절을 보냈다.
백제인들이 신라를 기록하는 경우에는 그것이 백제와 어떤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신라인들이 백제를 기록하는 경우에도 그것이 신라와 어떤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미국 대통령에 누가 될 것이냐를 거론하는 것은 그것이 한국정치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몽골대통령이 누가 되느냐는 별로 거론하지 않습니다. 큰 나라에서 작은 나라를 기록할 때는 더 심합니다. 작은 나라 대통령 영부인이 어떤 화장품을 좋아한다던가 어떤 춤을 좋아한다던가 하는 것은 큰 나라의 주간지나 해외토픽에 혹시 나올까 국정기록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아래는 다른 사이트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잘 보시기 바랍니다.
<고구려사초> 고구려 태조황제기
원년 10월, <신라>에서는 <파사>가 죽어, <사릉>에 장사하였다. 아들 <기미{지미/지마}>가 섰다. 모친은 <사성>이라 하고 <허루>의 딸이었으며, 처는 <애례>라 하고 <마제>의 딸이다. 애초에 <파사>가 <기미>를 데리고 <집기>를 지나갔다. <허루>가 자기 딸을 <기미>의 처가 되게 하고 싶어서 나와서 춤추게 하였더니, <마제> 또한 자기 딸을 나와서 춤추게 하고 크게 음식을 내고 맛있는 술로 그를 대접하였다. <기미>가 <마제>의 술을 많이 받아 마셨고, 그런 까닭에 마침내 <애례>를 짝지어 주게 되었다. <마제>를 <주다간(서불감우각간)>이라 부르고, 그곳 땅을 <대포>라고 불렀다고 한다. <색두>에서는 <응묵>이 죽었다. <[두]공>이 서고 <모계>를 처로 삼았다.
이게 고구려인이 기록한 고구려 태조황제기 맞습니까? 고구려 태조황제 원년기록에 나올 내용이 맞습니까? 하나 더 보겠습니다.
<고구려사초> 중천대제기
13년 (삼국사기처럼 사건의 달이 없음), 백제 <고이>가 여섯 좌평을 두었다. 1품으로; 내신좌평은 조칙을 받아 호령함을 맡고, 내두좌평은 창고와 재물관리를 맡고, 내법좌평은 예법과 의장을 맡고, 위사좌평은 숙위를 맡고, 조정좌평은 형옥의 일을 맡고, 병관좌평은 군사를 맡게 하였다. 그 밑으로는; 2품 달솔, 3품 은솔, 4품 덕솔, 5품 한솔, 6품 내솔, 7품 장덕, 8품 시덕, 9품 고덕, 10품 계덕, 11품 대덕, 12품 문독, 13품 무독, 14품 좌군, 15품 진무, 16품 극우를 두었다. 6품 이상은 자색 옷에 은화 관모를, 11품 이상은 비색 옷을, 16품 이상은 청색 옷을 입도록 하였다. 상이 이 소식을 듣고 웃으며 이르길 “성실한 놈의 풍모로구나”라고 하였다.
이게 고구려 중천대제기 맞습니까? 고구려인이 백제 16품 말단관직까지를 자신들의 국정기록에 남겨야 합니까? 상식적으로 보아도 말이 안되지요. 이것은 고구려인들이 남긴 사서가 아닙니다. 더구나 2-3세기의 고구려는 한반도 북부의 대국으로 한강유역 일부를 통치하던 백제나 영남내륙의 신라와는 비교가 안 되는 큰 나라였습니다.
한반도에는 마한만 해도 54개국이 있었고 삼국사기의 백제(한성백제)는 그 중에 한나라였습니다. 한성백제가 고구려와 접촉했다면 다른 소국들도 고구려와 접촉했을 것이지만 남당유고집에는 다른 삼한소국이 고구려와 접촉한 내용은 하나도 없습니다. 남당의 사고력이 어디까지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박창화가 자신이 공부한 내용을 쓴 것이고, 마지막 부분의 "상이 이 소식을 듣고 웃으며 이르길 '성실한 놈의 풍모로구나'라고 하였다." 부분은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첨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고구려사초란 사서는 없었다고 봅니다. 현존하는 남당의 고구려사초는 그가 본 여러 사서들을 참고로 하여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사서형식으로 정리한 것, 즉 자신이 공부한 내용입니다. 사초니 사략이니 하는 것도 남당 자신이 붙인 것입니다. 집필자에 삼국사기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삼국사기는 기존 역사서를 편찬하며 필자들의 견해는 따로 구분하여 적었습니다. 그들은 국가를 대표하는 역사가이자 대 학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사초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 박창화가 공부를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채호나 박은식 같은 역사학자의 예우를 받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물어보신 분의 관심은 이런 원론적인 것이 아니라 고구려사초 중에 얼마나 진실이 포함되었느냐일 것입니다. 이것은 저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읽다보면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미추이사금이 고구려로부터 신라왕이 될 허락을 받았다는 내용 같은 것입니다. 제가 놀라는 이유는 생략하고.
<고구려사초> 중천대제기
14년 12월 28일 <첨해>가 갑자기 죽었다. <조분>의 사위인 <미추>가 섰다. <미추>는 <옥모>의 동생이다. <미추>가 글을 올려 <신라국>황제를 세움에 대하여 청하길 “조카인 황제가 나라를 등졌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신에게 감국 하라고 하나, 신은 재주가 용렬하여 즉위하기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누님이신 후와 형황께서 될 만한 사람을 택하여 주심이 마땅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상은 이윽고 <명림어윤>을 시켜 칙명을 받들어 <신라>로 가서 <미추>를 <신라국>황제・<동해>대왕・우위대장군을 봉하고, 금・은으로 만든 인장과 면{면류관}・포{황제나 왕의 관복}를 내렸다.
고구려사초의 이 기록이 인정을 받으려면 고고학적으로 이에 해당하는 무엇인가가 나와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혹시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저 위에 든 삼국사기의 백제 비유왕과 신라 눌지마립간이 선물을 주고 받았다는 것은 고고학적으로 입증이 되어서 믿느냐고요.
그렇습니다. 저 위에 든 비유왕과 눌지마립간사이의 선물기록은 고고학적 유물로 입증된 사실입니다.(제가 이전 어딘가에 이에 관한 어떤 고고학적인 유물이 어디에서 어떻게 나왔는지에 대하여 상세히 적어놓았습니다) 그래서 믿는 것입니다. 저 고고학적으로 입증된 삼국사기의 선물기록과, 아직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지 못한 고구려사초의 선물기록은 같은 무게를 가지지 않습니다.
한번 딱 보고 저 기록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척 알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보고 또 보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한두명이 보면 안 되고 여럿이 보아야 합니다. 수많은 전공자들이 각기 자기 분야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화랑세기 필사본처럼 대중 앞으로 끌고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공개된 자리에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끊임없이 검증되어야 합니다.
이제 고구려사초를 보겠습니다. 저자가 따로 있습니까? 없습니다. 글 쓴 사람이 저자입니다. 서문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고구려사초는 저자가 필사한 사람, 즉 글 쓴 사람입니다. 제가 법 전공은 아니나 이것은 법률적으로도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사서로서 기본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백제본기와 신라본기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백제본기> 비유왕 8년, 봄 2월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좋은 말 두필을 보냈다. 가을 9월 또 (신라에) 또 흰 매를 보냈다. 겨울 10월 신라에서 답례로서 좋은 금과 구슬을 보내왔다.
<신라본기> 눌지마립간 18년, 봄 2월 백제왕이 좋은 말 두 필을 보내왔다. 가을 9월 다시 (백제왕이) 흰 매를 보내왔다. 겨울 10월 왕이 황금과 맑은 구슬로서 답례사절을 보냈다.
백제인들이 신라를 기록하는 경우에는 그것이 백제와 어떤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신라인들이 백제를 기록하는 경우에도 그것이 신라와 어떤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미국 대통령에 누가 될 것이냐를 거론하는 것은 그것이 한국정치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몽골대통령이 누가 되느냐는 별로 거론하지 않습니다. 큰 나라에서 작은 나라를 기록할 때는 더 심합니다. 작은 나라 대통령 영부인이 어떤 화장품을 좋아한다던가 어떤 춤을 좋아한다던가 하는 것은 큰 나라의 주간지나 해외토픽에 혹시 나올까 국정기록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아래는 다른 사이트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잘 보시기 바랍니다.
<고구려사초> 고구려 태조황제기
원년 10월, <신라>에서는 <파사>가 죽어, <사릉>에 장사하였다. 아들 <기미{지미/지마}>가 섰다. 모친은 <사성>이라 하고 <허루>의 딸이었으며, 처는 <애례>라 하고 <마제>의 딸이다. 애초에 <파사>가 <기미>를 데리고 <집기>를 지나갔다. <허루>가 자기 딸을 <기미>의 처가 되게 하고 싶어서 나와서 춤추게 하였더니, <마제> 또한 자기 딸을 나와서 춤추게 하고 크게 음식을 내고 맛있는 술로 그를 대접하였다. <기미>가 <마제>의 술을 많이 받아 마셨고, 그런 까닭에 마침내 <애례>를 짝지어 주게 되었다. <마제>를 <주다간(서불감우각간)>이라 부르고, 그곳 땅을 <대포>라고 불렀다고 한다. <색두>에서는 <응묵>이 죽었다. <[두]공>이 서고 <모계>를 처로 삼았다.
이게 고구려인이 기록한 고구려 태조황제기 맞습니까? 고구려 태조황제 원년기록에 나올 내용이 맞습니까? 하나 더 보겠습니다.
<고구려사초> 중천대제기
13년 (삼국사기처럼 사건의 달이 없음), 백제 <고이>가 여섯 좌평을 두었다. 1품으로; 내신좌평은 조칙을 받아 호령함을 맡고, 내두좌평은 창고와 재물관리를 맡고, 내법좌평은 예법과 의장을 맡고, 위사좌평은 숙위를 맡고, 조정좌평은 형옥의 일을 맡고, 병관좌평은 군사를 맡게 하였다. 그 밑으로는; 2품 달솔, 3품 은솔, 4품 덕솔, 5품 한솔, 6품 내솔, 7품 장덕, 8품 시덕, 9품 고덕, 10품 계덕, 11품 대덕, 12품 문독, 13품 무독, 14품 좌군, 15품 진무, 16품 극우를 두었다. 6품 이상은 자색 옷에 은화 관모를, 11품 이상은 비색 옷을, 16품 이상은 청색 옷을 입도록 하였다. 상이 이 소식을 듣고 웃으며 이르길 “성실한 놈의 풍모로구나”라고 하였다.
이게 고구려 중천대제기 맞습니까? 고구려인이 백제 16품 말단관직까지를 자신들의 국정기록에 남겨야 합니까? 상식적으로 보아도 말이 안되지요. 이것은 고구려인들이 남긴 사서가 아닙니다. 더구나 2-3세기의 고구려는 한반도 북부의 대국으로 한강유역 일부를 통치하던 백제나 영남내륙의 신라와는 비교가 안 되는 큰 나라였습니다.
한반도에는 마한만 해도 54개국이 있었고 삼국사기의 백제(한성백제)는 그 중에 한나라였습니다. 한성백제가 고구려와 접촉했다면 다른 소국들도 고구려와 접촉했을 것이지만 남당유고집에는 다른 삼한소국이 고구려와 접촉한 내용은 하나도 없습니다. 남당의 사고력이 어디까지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박창화가 자신이 공부한 내용을 쓴 것이고, 마지막 부분의 "상이 이 소식을 듣고 웃으며 이르길 '성실한 놈의 풍모로구나'라고 하였다." 부분은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첨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고구려사초란 사서는 없었다고 봅니다. 현존하는 남당의 고구려사초는 그가 본 여러 사서들을 참고로 하여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사서형식으로 정리한 것, 즉 자신이 공부한 내용입니다. 사초니 사략이니 하는 것도 남당 자신이 붙인 것입니다. 집필자에 삼국사기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삼국사기는 기존 역사서를 편찬하며 필자들의 견해는 따로 구분하여 적었습니다. 그들은 국가를 대표하는 역사가이자 대 학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사초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 박창화가 공부를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채호나 박은식 같은 역사학자의 예우를 받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물어보신 분의 관심은 이런 원론적인 것이 아니라 고구려사초 중에 얼마나 진실이 포함되었느냐일 것입니다. 이것은 저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읽다보면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미추이사금이 고구려로부터 신라왕이 될 허락을 받았다는 내용 같은 것입니다. 제가 놀라는 이유는 생략하고.
<고구려사초> 중천대제기
14년 12월 28일 <첨해>가 갑자기 죽었다. <조분>의 사위인 <미추>가 섰다. <미추>는 <옥모>의 동생이다. <미추>가 글을 올려 <신라국>황제를 세움에 대하여 청하길 “조카인 황제가 나라를 등졌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신에게 감국 하라고 하나, 신은 재주가 용렬하여 즉위하기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누님이신 후와 형황께서 될 만한 사람을 택하여 주심이 마땅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상은 이윽고 <명림어윤>을 시켜 칙명을 받들어 <신라>로 가서 <미추>를 <신라국>황제・<동해>대왕・우위대장군을 봉하고, 금・은으로 만든 인장과 면{면류관}・포{황제나 왕의 관복}를 내렸다.
고구려사초의 이 기록이 인정을 받으려면 고고학적으로 이에 해당하는 무엇인가가 나와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혹시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저 위에 든 삼국사기의 백제 비유왕과 신라 눌지마립간이 선물을 주고 받았다는 것은 고고학적으로 입증이 되어서 믿느냐고요.
그렇습니다. 저 위에 든 비유왕과 눌지마립간사이의 선물기록은 고고학적 유물로 입증된 사실입니다.(제가 이전 어딘가에 이에 관한 어떤 고고학적인 유물이 어디에서 어떻게 나왔는지에 대하여 상세히 적어놓았습니다) 그래서 믿는 것입니다. 저 고고학적으로 입증된 삼국사기의 선물기록과, 아직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지 못한 고구려사초의 선물기록은 같은 무게를 가지지 않습니다.
한번 딱 보고 저 기록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척 알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보고 또 보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한두명이 보면 안 되고 여럿이 보아야 합니다. 수많은 전공자들이 각기 자기 분야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화랑세기 필사본처럼 대중 앞으로 끌고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공개된 자리에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끊임없이 검증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