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 가서 죽었다는 말도 있다. 관기도 또한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지금 두 성사(聖師)의 이름으로써 그 터를 명명(命名)했는데 모두 유지(遺址)가 있다.
도성암(道成암)은 높이가 두어 길이나 되는데, 후인들이 그 굴 아래에 절을 지었다.
태평흥국(太平興國) 7년 임오(壬午)에 중 성범이 처음으로 이 절에 와서 살았다.
만일미타도랑(萬日彌陀道場)을 열어 50여 년을 부지런히 힘썼는데 여러 번 특이한 상서(祥瑞)가 있었다. 이때 현풍(玄風)의 신도 20여 명이
해마다 결사(結社)하여 향나무를 주워 절에 바쳤는데, 언제나 산에 들어가 향나무를 채취해서 쪼개어 씻어서 발[箔] 위에 펼쳐 두면 그 향나무가
밤에 촛불처럼 빛을 발하였다. 이로부터 고을 사람이 그 향나무에게 보시(布施)하고 빛을 얻은 해라 하여 하례하였다. 이는 두 성사의
영감(靈感)이요 혹은 산신(山神)의 도움이었다. 산신의 이름은 정성천왕(靜聖天王)으로 일찍이 가섭불(迦葉佛) 때에 부처님의 부탁을 받았으니 그
본서(本誓)에 말하기를, 산중에서 1,000명의 출세(出世)를 기다려 남은 과보(果報)를 받겠다고 했다.
지금 산중에 9성(聖)의 유사(遺事)를 기록한 것이 있는데 자세하지는 않으나 9성(聖)은
관기(觀機)ㆍ도성(道成)ㆍ반사(반師)ㆍ첩사(첩師)ㆍ도의(道義[백암사栢岩寺 터가 있음])ㆍ자양(子陽)ㆍ성범(成梵)ㆍ금물녀(今勿女)ㆍ백우사(白牛師)
들이다.
찬(讚)해 말한다.
서로 지나가다 달빛을 밟고 운천(雲泉)을
희롱하던,
두 노인의 풍류(風流) 몇 백 년이
지났는고.
연하(烟霞) 가득한 구령엔 고목(古木)만이
남았는데,
어긋버긋 찬 그림자 서로 맞는
모양일레.
반(반)은 음이 반(般)인데 우리말로는 피나무라 하고, 첩(첩)은 음이 첩(牒)인데
우리말로는 갈나무(떡갈나무)라 한다.
이 두 성사(聖師)는 오랫동안 산골에 숨어 지내면서 인간 세상과 사귀지 않고 모두 나뭇잎을
엮어 옷으로 입고 추위와 더위를 겪었으며 습기를 막고 하체를 가릴 뿐이었다. 그래서 반사(반師)ㆍ첩사(첩師)로 호를 삼았던 것인데, 일찍이
들으니 풍악(風岳)에도 이런 이름이 있었다고 한다. 이로써 옛 은자(隱者)들의 운치가 이와 같은 것이 많았음을 알겠으나 다만 답습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내가 일찍이 포산(包山)에 살 때에 두 스님이 남긴 미덕(美德)을 쓴 것이 있기에 이제
여기 아울러 기록한다.
자모(紫茅)와 황정(黃精)으로 배를 채웠고,
입은 옷은 나뭇잎, 누에 치고 베짠 것
아닐세.
찬바람 쏴 쏴 불고 돌은 험한데,
해 저문 숲속으로 나무 해 돌아오네.
밤 깊고 달 밝은데 그 아래 앉았으면,
반신(半身)은 시원히 바람따라 나는
듯.
떨어진 포단(蒲團)에 가로 누워 잠이 들면
꿈 속에도 속세에는 가지
않노라.
운유(雲遊)는 가 버리고 두 암자만 묵었는데,
산사슴만 뛰놀뿐 인적은
드물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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