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 효소왕(孝昭王)이 즉위하여 처음으로
망덕사(望德寺)를 세워 당나라 제실(帝室)의 복을 받들려 했다. 그 후 경덕왕(景德王) 14년(755)에 망덕사 탑이 흔들리더니 이 해에
안사(安史)의 난(亂)이 일어났다. 신라 사람들은 말했다. "당나라 제실을 위하여 이 절을 세웠으니 마땅히 그 영험이 있을
것이다."
8년 정유(丁酉)에 낙성회(落成會)를 열고 효소왕이 친히 가서 공양하는데, 한
비구(比丘)가 몹시 허술한 모양을 하고 몸을 움츠리고 뜰에 서서 청했다. "빈도(頻度)도 또한 이 재(齋)에 참석하기를 바랍니다." 왕은 이를
허락하여 말석(末席)에 참여하게 했다. 재가 끝나자 왕은 그를 희롱하여 말했다. "그대는 어디 사는가." 비구승이 대답한다. "비파암(琵琶암)에
있습니다." 왕이 말했다.
"이제 가거든 다른 사람들에게 국왕이 친히 불공하는 재에 참석했다고 말하지 말라." 중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폐하께서도 역시 다른 사람에게 진신(眞身) 석가(釋迦)를 공양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말을 마치자 몸을 솟구쳐 하늘로
올라가 남쪽을 향하여 갔다. 왕이 놀랍고 부끄러워 동쪽 언덕에 달려 올라가서 그가 간 곳을 향해 멀리 절하고 사람을 시켜 찾게 하니 남산(南山)
삼성곡(參星谷), 혹은 대적천원(大적川源)이라고 하는 돌 위에 이르러 지팡이와 바리때를 놓고 숨어 버렸다. 사자가 와서 복명(復命)하자 왕은
드디어 석가사(釋迦寺)를 비파암 밑에 세우고, 또 그 자취가 없어진 곳에 불무사(佛無寺)를 세워 지팡이와 바리때를 두 곳에 나누어 두었다. 두
절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으나 지팡이와 바리때는 없어졌다.
≪지론(智論)≫ 제4에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계빈(계賓) 삼장법사(三藏法師)가
아란야법(阿蘭若法)을 행하여 일왕사(一王寺)에 이르니 절에서는 큰 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문지기는 그의 옷이 추솔한 것을 보고 문을 막고 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여러 번 들어가려 했건만 옷이 추하다 해서 번번이 들어가지 못했다. 그는 문득 방편(方便)을 써서 좋은 옷을 빌어 입고 가니
문지기가 보고 들어가게 하고 막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그 자리에 나아가, 여러 가지 좋은 음식을 얻어 옷에게 먼저 주니 여러 사람들이 물었다.
"어찌해서 그렇게 하는가." 그는 대답했다.
"내가 여러 번 왔으나 매번 들어올 수가 없었는데 이번에 옷 때문에 이 자리에 오게 되어
여러 가지 음식을 얻었으니 마땅히 이 옷에게 음식을 주어야 할 것이다." 아마 이것도 같은 사례인가 한다.
찬(讚)해 말한다.
향을 사르고 부처님을 가려 새 그림을
보았고,
음식 만들어 중을 대접하고 옛 친구
불렀네.
이제부터 비파암 위의 달은,
때때로 구름에 가려 못에 더디게
비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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