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심지(心地)는 진한(辰韓) 제41대 헌덕대왕(憲德大王) 김씨(金氏)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깊고 천성이 맑고 지혜가 있었다. 학문에 뜻을 두는 나이서 불도(佛道)에 부지런했다.
중악(中岳[지금의 공산公山])에 가서 살고 있는데 마침 속리산(俗離山)의 심공(深公)이 진표율사(眞表律師)의 불골간자(佛骨簡子)를
전해 받아서 과정법회(果訂法會)를 연다는 말을 듣고, 뜻을 결정하여 찾아갔으나 이미 날짜가 지났기 때문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이에
땅에 앉아서 마당을 치면서 신도(信徒)들을 따라 예배하고 참회했다. 7일이 지나자 큰 눈이 내렸으나 심지(心地)가 서 있는 사방
10척 가량은 눈이 내리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그 신기하고 이상함을 보고 당(堂)에 들어오기를 허락했으나 심지는 사양하여 거짓 병을
칭탁하고 방 안에 물러앉아 당을 향해 조용히 예배했다. 그의 팔꿈치와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려 마치 진표공(眞表公)이
선계산(仙溪山)에서 피를 흘리던 일과 같았는데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매일 와서 위문했다. 법회가 끝나고 산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옷깃
사이에 간자(簡子) 두 개가 끼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가지고 돌아가서 심공(深公)에게 아뢰니 영심(永深)이 말하기를, "간자는
함 속에 들어 있는데 그럴 리가 있는가."하고 조사해 보니 함은 봉해 둔 대로 있는데 열고 보니 간자는 없었다. 심공이 매우 이상히
여겨 다시 간자를 겹겹이 싸서 간직해 두었다. 심지가 또 길을 가는데 간자가 먼저와 같았다. 다시 돌아와서 아뢰니 심공이
말하기를, "부처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는 받들어 행하도록 하라"하고 간자를 그에게 주었다. 심지가 머리에 이고 중악으로
돌아오니 중악의 신이 선자(仙子) 둘을 데리고 산꼭대기에서 심지를 맞아 그를 인도하여 바위 위에 앉히고는 바위 밑으로 돌아가 엎드려서 공손히
정계(正戒)를 받았다. 이때 심지가 말했다. "이제 땅을 가려서 부처님과 간자를 모시려 하는데, 이것은 우리들만이 정할
일이 못되니 그대들 셋과 함께 높은 곳에 올라가서 간지를 던져 자리를 점치도록 하자." 이에 신들과 함께 산마루로 올라가서 서쪽을
향하여 간자를 던지니, 간자는 바람에 날아간다. 이때 신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막혔던 바위 멀리 물러가니 숫돌처럼
평평하고, 낙엽이 날아 흩어지니 앞길이
훤해지네. 불골(佛骨) 간자(簡子)를 찾아
얻어서, 깨끗한 곳 찾아 정성드리려네.
노래를 마치자 간자를 숲속 샘에서 찾아 곧 그 자리에 당(堂)을 짓고 간자를 모셨으니,
지금 동화사(桐華寺) 첨당(籤堂) 북쪽에 있는 작은 우물이 이것이다.
본조(本朝) 예종(睿宗)이 일찍이 부처의 간자를 맞아 대궐 안에서 예배했는데, 갑자기 아홉
번째 간자 하나를 잃어 아간(牙簡)으로 대신하여 본사(本寺)에 돌려보냈더니, 지금은 이것이 점점 변해서 같은 빛이 되어 새것과 옛것을 분별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 바탕은 상아도 옥도 아니다.
≪점찰경(占察經)≫ 상권(上卷)을 상고해 보면 189개 간자(簡子)의 이름이
있는데 이러하다. 1은 상승(上乘)을 구해서 불퇴위(不退位)를 얻은 것이요, 2는 구하는 과(果)가 마땅한 증(證)을 나타내는
것이요, 제3과 제4는 중승(中乘)과 하승(下乘)을 구해서 불퇴위(不退位)를 얻은 것이요, 5는 신통력(神通力)을 구해서 성취함이요, 6은
사범(四梵)을 구해서 성취함이요, 7은 세선(世禪)을 닦아 성취함이요, 8은 받고 싶은 묘계(妙戒)를 얻음이요, 9는 일찍이 받은 구계(具戒)를
얻음이요[이 글을 가지고 고정考訂한다면, 미륵보살彌勒菩薩이 말한, '새로 얻은 계戒'는 금세今世에 처음 얻는 계戒를 말하는 것이요, '옛날 얻은
계戒'는 과거세過去世에 일찍이 받았다가 금세今世에 또 더 받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수생본유修生本有의 신구新舊를 말한 것이 아님을
알겠다], 10은 하승(下乘)을 구하며 아직 신심(信心)에 살지 않는 것이요, 다음은 중승(中乘)을 구하여 아직 신심에 살지 않음이다.
이와 같이 해서 제172까지는 모두 과거세(過去世)나 현세(現世) 사이에 혹 착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고, 혹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한
일들이다. 제173은 몸을 버려 이미 지옥에 들어감이요[이상은 모두 미래未來에의 과果이다], 제174는 죽은 후에 축생(畜生)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귀(餓鬼)·수라(修羅)·인(人)·인왕(人王)·천(天)·천왕(天王)에까지 미치고, 불법(佛法)을 들음,
출가(出家), 성승(聖僧)을 만남,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남, 정토(淨土)에 태어남, 부처를 찾아뵘, 하승(下乘)에 머무름, 중승에 머무름,
상승에 머무름, 해탈(解脫)을 얻음의 제189 등이 이것이다[위에서는 하승下乘에 머무름에서부터 상승上乘에서 불퇴전不退轉함을 얻음까지 말했고,
이제 상승上乘에서 해탈解脫을 얻음 등을 말함은 이것으로 분별된다]. 이들은 모두 삼세(三世)의 선악과보(善惡果報)의 차별의
모습이다.
이것으로 점을 쳐 보면, 마음이 행하려고 한 일과 간자가 서로 맞으면 감응(感應)하고
그렇지 못하면 지극한 마음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이것을 허류(虛謬)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8과 9의 두 간자는 오직 189개
가운데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송전(宋傳)≫에서는 다만 108 첨자(籤子)라고만 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필경
저 백팔번뇌(百八煩惱)의 명칭으로 알고 말한 것 같다. 그리고 또 경문(經文)을 상고해 보지도 않은 것 같다.
또 상고해 보면, 본조(本朝)의 문사(文士)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 2권에 신라 말년의 고승(高僧) 석충(釋沖)이 고려 태조(太祖)에게 진표율사(眞表律師)의 가사 한 벌과
계간자(戒簡子) 189개를 바쳤다고 써 있다. 이것이 지금 동화사(桐華寺)에 전해 오는 간자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알 수
없다.
찬(讚)해 말한다.
금규(金閨) 속에서 자랐건만 일찍 속박을
벗어났고, 부지런함과 총명함 하늘이 주었네. 뜰에 가득 쌓인 눈 속에서 간자를
뽑아, 동화산(桐華山) 높은 봉우리에 갖다
놓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