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승전(勝詮)은 그 내력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일찍이 배를 타고 중국에 가서
현수국사(賢首國師)의 강석(講席)에 나가 현언(玄言)을 받아 정미한 것을 연구하여 생각을 쌓고, 보는 것이 슬기롭고 뛰어나 깊은 것과 숨은 것을
찾아 그 묘함이 심오(深奧)함을 다하였다. 이에 그는 인연 있는 곳으로 가고자 하여 고국(故國)으로 돌아올 마음을
가졌다.
처음에 현수(賢首)는 의상(義湘)과 함께 배워 지엄화상(智儼和尙)의 사랑스런 가르침을
받았다. 현수는 스승의 말에 대하여 글뜻과 과목(科目)을 연술(演述)하여, 승전법사(勝詮法師)가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기회로 이 글을
보내니 의상도 역시 글을 보냈다 한다. 그 별폭(別幅)에는 이렇게 말했다. "≪탐현기(探玄記)≫ 20권 중에서
두 권은 아직 완성되지 못했고, ≪교분기(敎分記)≫ 3권, ≪현의장등잡의(玄義章等雜義)≫ 1권,
≪화엄범어(華嚴梵語)≫ 1권, ≪기신소(起信疎)≫ 2권, ≪십이문소(十二門疎)≫ 1권,
≪법계무차별론소(法界無差別論疏)≫ 1권을 모두 옮겨 베꼈으니 승전법사 편에 보내드립니다. 저번에 신라의 중 효충(孝忠)이
금 9푼을 갖다 주면서 상인(上人)이 보낸 것이라고 하오니, 비록 편지는 받지 못했지만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지금 인도의
군지조관(軍持조灌) 한 개를 보내어 적은 정성을 표하오니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아룁니다." 승전법사가 돌아오자 이
현수의 글을 의상에게 전했다. 의상은 법장(法藏)의 이 글을 보니 마치 지엄(智儼)의 가르침을 친히 듣는 것과 같았다.
수십 일 동안 탐색(探索)하고 연구하여 제자들에게 주어 이 글을 널리 연술(演述)시켰으니, 이 말은 의상의 전기에 실려
있다.
상고해 보면 이렇다. 이 원만하고 융통(融通)하는 가르침이 청구(靑丘)에 널리
퍼진 것은 실로 승전법사의 공이다. 그 후에 중 범수(梵修)가 멀리 당나라에 가서 새로 번역한
≪후분화엄경(後分華嚴經)≫·≪관사의소(觀師義疏)≫를 구해 가지고 돌아와 연술했다고 하니, 이때는 정원(貞元) 기묘(己卯[
799])년이었다. 이도 역시 불법을 구해다가 널리 드날린 사람이라 하겠다.
승전은 상주(尙州) 영내(領內)의 개령군(開寧郡) 경계에 절을 새로 짓고 돌들로
관속(官屬)으로 삼아 ≪화엄경(華嚴經)≫을 개강(開講)했다. 그 뒤에 신라 중 가귀(可歸)가 자못 총명하고 도리를 알아서
전등(傳燈)을 계속하여 이에 ≪심원장(心源章)≫을 편찬하였으니, 그 대략에 보면 이러하다. 승전법사는 돌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불경을 논의(論議)하고 강연했다고 하니, 그곳은 지금의 갈항사(葛項寺)이다. 그 돌 80여 개는 지금까지 강사(綱司)가
전하고 있는데 자못 신령스럽고 이상한 것이 있다.
그 밖의 사적들은 모두 비문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대각국사실록(大覺國師實錄)≫
속에 있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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