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pia 삼국유사Home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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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卷第一
紀異 第一 上
古朝鮮 원문국역문
魏滿朝鮮 원문국역문
馬韓 원문국역문
二府 원문국역문
七十二國 원문국역문
樂浪國 원문국역문
北帶方 원문국역문
南帶方 원문국역문
靺鞨 渤海 원문국역문
伊西國 원문국역문
五伽耶 원문국역문
北扶餘 원문국역문
東扶餘 원문국역문
高句麗 원문국역문
卞韓 百濟 원문국역문
辰韓 원문국역문
又四節遊宅 원문국역문
新羅始祖 赫居世王 원문국역문
第二南解王 원문국역문
第三弩禮王 원문국역문
第四脫解王 원문국역문
金閼智 脫解王代 원문국역문
延烏郎 細烏女 원문국역문
未鄒王 竹葉軍 원문국역문
奈勿王 金堤上 원문국역문
第十八實聖王 원문국역문
射琴匣 원문국역문
智哲老王 원문국역문
眞興王 원문국역문
桃花女 鼻荊郞 원문국역문
天賜玉帶 원문국역문
善德王知幾三事 원문국역문
眞德王 원문국역문
金庾信 원문국역문
太宗春秋公 원문국역문
長春郎 罷郎 원문국역문
三國遺事卷第二
紀異 第二 下
文虎王法敏 원문국역문
萬波息笛 원문국역문
孝昭王代 竹旨郞 원문국역문
聖德王 원문국역문
水路夫人 원문국역문
孝成王 원문국역문
景德王 忠談師 表訓大德 원문국역문
惠恭王 원문국역문
元聖大王 원문국역문
早雪 원문국역문
興德王 鸚 원문국역문
神武大王 閻長 弓巴 원문국역문
四十八景文大王 원문국역문
處容郎 望海寺 원문국역문
眞聖女大王 居陁知 원문국역문
孝恭王 원문국역문
景明王 원문국역문
景哀王 원문국역문
金傅大王 원문국역문
南扶餘 前百濟 北扶餘已見上 원문국역문
武王 원문국역문
後百濟 甄萱 원문국역문
駕洛國記 원문국역문
居登王 원문국역문
麻品王 원문국역문
居叱彌王 원문국역문
伊尸品王 원문국역문
坐知王 원문국역문
吹希王 원문국역문
銍知王 원문국역문
鉗知王 원문국역문
仇衡王 원문국역문
三國遺事卷第三
興法第三
順道肇麗 원문국역문
難陁闢濟 원문국역문
阿道基羅 원문국역문
原宗興法 厭髑滅身 원문국역문
法王禁殺 원문국역문
寶藏奉老 普德移庵 원문국역문
東京興輪寺金堂十聖 원문국역문
塔像第四
迦葉佛宴坐石 원문국역문
遼東城育王塔 원문국역문
金官城婆娑石塔 원문국역문
高麗靈塔寺 원문국역문
皇龍寺丈六 원문국역문
皇龍寺九層塔 원문국역문
皇龍寺鐘 芬皇寺藥師 奉德寺鍾 원문국역문
靈妙寺丈六 원문국역문
四佛山 掘佛山 萬佛山 원문국역문
生義寺石彌勒 원문국역문
興輪寺壁畵普賢 원문국역문
三所觀音 衆生寺 원문국역문
栢栗寺 원문국역문
敏藏寺 원문국역문
前後所將舍利 원문국역문
彌勒仙花 未尸郎 眞慈師 원문국역문
南白月二聖 努肹夫得 怛怛朴朴 원문국역문
芬皇寺千手大悲 盲兒得眼 원문국역문
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 원문국역문
魚山佛影 원문국역문
臺山五萬眞身 원문국역문
溟州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 원문국역문
臺山月精寺五類聖衆 원문국역문
南月山 원문국역문
天龍寺 원문국역문
鍪藏寺彌陁殿 원문국역문
伯嚴寺石塔舍利 원문국역문
靈鷲寺 원문국역문
有德寺 원문국역문
五臺山文殊寺石塔記 원문국역문
三國遺事 卷第四
義解 第五
圓光西學 원문국역문
寶壤梨木 원문국역문
良志使錫 원문국역문
歸竺諸師 원문국역문
二惠同塵 원문국역문
慈藏定律 원문국역문
元曉不覊 원문국역문
義湘傳敎 원문국역문
虫也福不言 원문국역문
眞表傳簡 원문국역문
關東楓岳鉢淵藪石記 원문국역문
勝詮髑髏 원문국역문
心地繼祖 원문국역문
賢瑜珈 海華嚴 원문국역문
三國遺事 卷第五
神咒 第六
密本摧邪 원문국역문
惠通降龍 원문국역문
明朗神印 원문국역문
感通 第七
仙桃聖母隨喜佛事 원문국역문
郁面婢念佛西昇 원문국역문
廣德 嚴莊 원문국역문
憬興遇聖 원문국역문
眞身受供 원문국역문
月明師兜率歌 원문국역문
善律還生 원문국역문
金現感虎 원문국역문
融天師彗星歌 眞平王代 원문국역문
正秀師救氷女 원문국역문
避隱 第八
朗智乘雲 普賢樹 원문국역문
緣會逃名 文殊岾 원문국역문
惠現求靜 원문국역문
信忠掛冠 원문국역문
包山二聖 원문국역문
永才遇賊 원문국역문
勿稽子 원문국역문
迎如師 원문국역문
布川山 五比丘 景德王代 원문국역문
念佛師 원문국역문
孝善 第九
眞定師孝善雙美 원문국역문
大城孝二世父母 神文代 원문국역문
向得舍知割股供親 景德王代 원문국역문
孫順埋兒 興德王代 원문국역문
貧女養母 원문국역문
跋文 원문국역문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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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三國遺事 卷第四 > 義解 第五 > 慈藏定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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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정률(慈藏定律)

대덕(大德) 자장(慈藏)은 김씨(金氏)이니 본래 진한(辰韓)의 진골(眞骨) 소판(蘇判[ 삼급三級의 벼슬 이름]) 무림(茂林)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맑은 요직을 지냈으나 뒤를 계승할 아들이 없으므로 삼보(三寶)에 마음을 돌려 천부관음(千部觀音)에게 아들 하나 낳기를 바라고 이렇게 빌었다. "만일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이를 내놓아서 법해(法海)의 진량(津梁)으로 삼겠습니다." 갑자기 그 어머니의 꿈에 별 하나가 떨어져서 품 안으로 들어오더니 이내 태기가 있어서 아이 하나를 낳았는데 석존(釋尊)과 같은 날이므로 이름을 선종랑(善宗郞)이라 했다. 그는 정신과 뜻이 맑고 슬기로웠으며 문사(文思)가 날로 풍부하고 속세의 취미에 물들지 않았다. 일찍이 두 부모를 여의고 속세의 시끄러움을 싫어해서 처자를 버리고, 자기의 전원(田園)을 내어 원녕사(元寧寺)를 삼았다. 혼자서 그윽하고 험한 곳에 거처하면서 이리나 범도 피하지 않았다. 고골관(枯骨觀)을 닦는데 조금 피곤한 일이 있으면 작은 집을 지어서 가시덤불로 둘러막고, 그 속에 발가벗고 앉아서 조금만 움직이면 가시에 찔리도록 했으며, 머리는 들보에 매달아 어두운 정신이 없어지게 했다.

때마침 조정에 재상 자리가 비어 있어서 자장이 문벌(門閥) 때문에 물망(物望)에 올라 여러 번 불렀지만 나가지 않으니 왕이 칙명(勅命)을 내렸다. "만일 나오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 자장이 듣고 말했다. "내가 차라리 하루 동안 계율(戒律)을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100년 동안 계율을 어기고 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 말을 들은 왕은 그가 중이 되는 것을 허락했다. 자장이 바위 사이에 깊이 숨어서 사니 양식 한 알 돌봐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이상한 새가 과일을 물어다 바쳐서 이것을 손으로 받아 먹었더니 이윽고 꿈에 천인(天人)이 와서 오계(五戒)를 주었다. 이에 자장이 비로소 골짜기에서 나오니 향읍(鄕邑)의 남녀가 다투어 와서 계(戒)를 받았다.

자장은 변방 나라에 태어난 것을 스스로 탄식하고 중국으로 가서 대화(大化)를 구했다. 인평(仁平) 3년 병신(丙申[636, 곧 정관貞觀 10년임])에 왕명(王命)을 받아 제자 실(實) 등 중 10여 명과 더불어 서쪽 당(唐)나라로 들어가서 청량산(淸凉山)에 가서 성인(聖人)을 뵈었다. 이 산에는 만수대성(曼殊大聖)의 소상(塑像)이 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이 서로 전해 말했다. "제석천(帝釋天)이 공인(工人)을 데리고 와서 조각해 만든 것이다." 자장은 소상 앞에서 기도하고 명상(冥想)하니, 꿈에 소상이 그의 이마를 만지면서 범어(梵語)로 된 게(偈)를 주었는데 깨어 생각하니 알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 이상한 중이 오더니 이것을 해석하여 주고[이 이야기는 이미 황룡사皇龍寺 탑편塔篇에 나와 있다] 또 말하기를, "비록 만 가지 가르침을 배운다 해도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하고는 가사(袈裟)와 사리(舍利) 등을 주고 사라졌다[자장은 처음에 이것을 숨기고 말하지 않았으므로 ≪당승전唐僧傳≫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자장은 자기가 이미 성별(聖별)을 받은 것을 알고 북대(北臺)에서 내려와 태화지(太和池)에 이르러 당나라 서울에 들어가니 태종(太宗)이 칙사(勅使)를 보내어 그를 위무(慰撫)하고 승광별원(勝光別院)에 거처하도록 했다. 태종의 은총과 내린 물건이 매우 많았으나 자장은 그 번거로움을 꺼려서 표문(表文)을 올리고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 동쪽 절벽에 들어가서 바위에 나무를 걸쳐 방을 만들고 3년 동안을 살면서 사람과 신들이 계를 받아 영험이 날로 많았는데, 말이 번거로워서 여기에는 싣지 않는다. 이윽고 다시 서울로 들어오자 또 칙사를 보내 위무(慰撫)하고 비단 200필을 내려서 의복의 비용으로 쓰게 했다.

정관(貞觀) 17년 계유(癸酉[643])에 신라 선덕왕(宣德王)이 표문을 올려 자장을 돌려보내 주기를 청하니 태종은 이를 허락하고 그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비단 1령(領)과 잡채(雜綵) 500필을 하사했으며, 또 동궁(東宮)도 비단 200필을 내려 주고 그 밖에 예물로 준 물건도 많았다. 자장은 본국에 아직 불경(佛經)과 불상(佛像)이 구비되지 못했으므로 대장경(大藏經) 1부(部)와 여러 가지 번당(幡幢)·화개(花蓋) 등 복리(福利)가 될 만한 것을 청해서 모두 싣고 돌아왔다. 그가 본국에 돌아오자 온 나라가 그를 환영하고 왕은 그를 분황사(芬皇寺[≪당전唐傳≫에서는 왕분사王芬寺라고 했다])에 있게 하니, 물건과 시위(侍衛)는 조밀하고도 넉넉했다. 어느 해 여름에 왕이 궁중으로 청하여 ≪대승론(大乘論)≫을 강(講)하게 하고 또 황룡사(黃龍寺)에서 보살계본(菩薩戒本)을 7일 밤낮 동안 강연하게 하니, 하늘에서는 단비가 내리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강당을 덮었다. 이것을 보고 사중(四衆)이 모두 그의 신기함을 탄복했다. 이에 조정에서 의론하기를, "불교가 우리 동방에 번져서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 주지(住持)를 수봉(修奉)하는 규범(規範)이 없으니 이것을 통괄해서 다스리지 않고는 바로잡을 수가 없다."하고 왕이 자장을 대국통(大國統)으로 삼아 중들의 모든 규범을 승통(僧統)에게 위임하여 주장하도록 했다[상고해 보건대, 북제北齊의 천보天寶 연간에는 전국全國에 10통統을 두었는데, 유사有司가 아뢰기를, "마땅히 직위職位를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하여 이에 선문제宣文帝는 법상법사法上法師로 대통大統을 삼고 나머지는 통통通統을 삼았다. 또 양梁·진陳의 시대에는 국통國統·주통州統·국도國都·주도州都·승도僧都·승정僧正·도유내都維乃 등 이름이 있었으니 모두 소현조昭玄曺에 소속되었다. 소현조昭玄曺는 승니僧尼를 거느리는 관명官名이다. 당唐나라 초기에는 또 10대덕大德의 성盛함이 있었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11년 경오庚午에 안장법사安藏法師로 대서성大書省을 삼으니 이것은 한 사람뿐이고, 또 소서성小書省 두 사람이 있었다. 그 이듬해 신미辛未에는 고구려의 혜량법사惠亮法師를 국통國統으로 삼았으니 사주寺主라고도 한다. 보량법사寶良法師 한 사람을 대도유나大都維那로 삼고 주통州統 9인人과 도통都統 18인人을 두었다. 자장慈藏 때에 와서 다시 대국통大國統 한 사람을 두었으니 이것은 상직常職이 아니다. 이것은 또한 부예랑夫禮郞이 대각간大角干이 되고, 김유신金庾信이 태대각간太大角干이 된 것과 같다. 후에 원성대왕元聖大王 원년에 이르러 또 승관僧官을 두고 정법전政法典이라 하여 대사大舍 1인人과 사史 2인人을 사司로 삼아서 중들 중에서 재행才行이 있는 이를 뽑아서 그 일을 맡겼으며, 유고有故한 때에는 바꾸어서 연한年限은 정定하지 않았다. 때문에 지금 자의紫衣의 무리들은 역시 율종律宗과 다른 것이다. 향전鄕傳에 보면, 자장慈藏이 당唐나라에 갔더니 태종太宗이 식건전式乾殿에 맞아들여 ≪화엄경華嚴經≫의 강의를 청하매, 하늘이 단 이슬을 내려 비로소 그를 국사國師로 삼았다고 했으나 이것은 잘못이다. 당전唐傳이나 ≪국사國史≫에 모두 그런 글은 없다].

자장이 이와 같은 좋은 기회를 만나 용감히 나가서 불교를 널리 퍼뜨렸다. 그는 승니(僧尼)의 5부(部)에 각각 구학(舊學)을 더 증가시키고 15일마다 계율을 설명하였으며 겨울과 봄에는 시험해서 지범(持犯)을 알게 하고 관원을 두어서 이를 유지해 나가게 했다. 또 순사(巡使)를 보내어 서울 밖에 있는 절들을 조사하여 중들의 과실을 징계하고 불경과 불상을 엄중하게 신칙함을 일정한 법으로 삼으니, 한 시대에 불법을 보호하는 것이 이때에 가장 성했다. 이것은 공자(孔子)가 위(衛)나라에서 노(魯)나라로 돌아와 음악을 바로잡자 아(雅)와 송(頌)이 각각 그 마땅함을 얻었던 일과 같다. 이때를 당하여 나라 안 사람으로서 계(戒)를 받고 불법을 받든 이가 열 집에 여덟, 아홉은 되었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기를 청하는 이가 세월이 갈수록 더욱 많아지니 이에 통도사(通度寺)를 새로 세우고 계단(戒壇)을 쌓아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제도(濟度)했다. 또 자기가 난 집을 원녕사(元寧寺)로 고치고 낙성회(落成會)를 열어 잡화(雜花) 1만 게(偈)를 강의하니 오이녀(五二女)가 감동하여 현신(現身)해서 강의를 들었다. 문인(門人)들에게 그들의 수대로 나무를 심어 이상스러운 일들을 표하게 하고 그 나무를 지식수(知識樹)라고 이름지었다.

그는 일찍이 우리 나라의 복장(服章)이 제하(諸夏)와 같지 않다 하여 조정에 건의하니 조정에서는 허락하였다. 이에 진덕왕(眞德王) 3년 기유(己酉[649])에 처음으로 중국의 의관(衣冠)을 입게 하고, 이듬해인 경술(庚戌)에 또 정삭(正朔)을 받들어 비로소 영휘(永徽)의 연호를 썼다. 이 뒤부터는 중국에 조근(朝覲)할 때마다 상번(上蕃)에 있었으니 자장의 공이었다.

만년(晩年)에는 서울을 하직하고 강릉군(江陵郡[지금의 명주溟州])에 수다사(水多寺)를 세우고 거기에 살았더니 북대(北臺)에서 본 것과 같은 형상을 한 이상한 중이 다시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내일 대송정(大松汀)에서 그대를 만날 것이다." 자장이 놀라 일어나서 일찍 송정(松汀)에 가니 과연 문수보살(文殊菩薩)이 감응(感應)하여 와 있었다. 그에게 법요(法要)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태백산(太伯山) 갈반지(葛蟠地)에서 다시 만나자."하고 드디어 자취를 숨기고 나타나지 않았다. 자장이 태백산(太伯山)에 가서 찾다가 큰 구렁이가 나무 밑에 서리고 있는 것을 보고 시자(侍者)에게 말했다. "이곳이 바로 이른바 갈반지이다." 이에 석남원(石南院[지금의 정암사淨岩寺])을 세우고 대성(大聖)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늙은 거사(居士) 하나가 남루한 도포를 입고 칡으로 만든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메고 와서 시자에게 말했다. "자장을 보려고 왔다." 문인(門人)이 말했다. "내가 건추(巾추)를 받든 이래 우리 스승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보지 못했다.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미친 말을 하는 게냐." 거사가 말한다. "너는 너의 스승에게 아뢰기만 하면 된다." 시자가 들어가서 고하자 자장도 깨닫지 못하고 말했다. "필연 미친 사람이겠지." 문인이 나가서 그를 꾸짖어 쫓으니, 거사가 다시 말했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아상(我相)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겠느냐." 말을 마치자 삼태기를 거꾸로 들고 터니 강아지가 변해서 사자보좌(獅子寶座)가 되고 그 위에 올라앉아서 빛을 내고는 가버렸다. 자장이 이 말을 듣고 그제야 위의(威儀)를 갖추고 빛을 찾아 재빨리 남쪽 고개에 올라갔으나 이미 아득해서 따라가지 못하고 드디어 몸을 던져 죽으니, 화장하여 유골(遺骨)을 석혈(石穴) 속에 모셨다.

대체로 자장이 세운 절과 탑이 10여 곳인데, 세울 때마다 반드시 이상스러운 상서(祥瑞)가 있었기 때문에 그를 받드는 포색(浦塞)들이 거리를 메울 만큼 많아서 며칠이 안 되어 완성했다. 자장이 쓰던 도구(道具)·옷감·버선과 태화지(太和池)의 용이 바친 목압침(木鴨枕)과 석존(釋尊)의 유의(由衣)들은 모두 통도사(通度寺)에 있다. 또 헌양현(헌陽縣[지금의 언양彦陽])에 압유사(鴨遊寺)가 있는데, 침압(枕鴨)이 일찍이 이곳에서 이상한 일을 나타냈으므로 이름한 것이다.

또 원승(圓勝)이란 중이 있는데, 자장보다 먼저 중국에 유학갔다가 함께 고향에 돌아와서 자장을 도와 율부(律部)를 넓게 폈다고 한다.

찬(讚)해 말한다.

일찍이 청량산에 가서 꿈 깨고 돌아오니,
칠편삼취(七篇三聚)가 한꺼번에 열렸네.
치소(緇素)의 옷을 부끄럽게 여기어,
우리 나라 의관을 중국과 같이 만들었네.

digitized by jikji. HiS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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