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양지(良志)는 그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신라
선덕왕(宣德王) 때에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석장(錫杖) 끝에 포대(布帶) 하나를 걸어 두기만 하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
시주(施主)의 집에 가서 흔들리면서 소리를 낸다. 그 집에서 이를 알고 재(齋)에 쓸 비용을 여기에 넣는데, 포대가 차면 날아서
돌아온다. 때문에 그가 있던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했다.
양지의 신기하고 이상하여 남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그는 또
한편으로 여러 가지 기예(技藝)에도 통달해서 신묘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 또 필찰(筆札)에도 능하여 영묘사(靈廟寺)
장육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天王像), 또 전탑(殿塔)의 기와와 천왕사(天王寺) 탑(塔) 밑의 팔부신장(八部神將),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主佛三尊)과 좌우 금강신(金剛神) 등은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靈廟寺)와 법림사(法林寺)의 현판을 썼고, 또 일찍이
벽돌을 새겨서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삼천불(三千佛)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셔 두고 공경했다. 그가
영묘사(靈廟寺)의 장육상(丈六像)을 만들 때에는 입정(入定)해서 정수(正受)의 태도로 주물러서 만드니, 온 성 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해 주었다. 그때 부른 풍요(風謠)는 이러하다.
왔도다. 왔도다.
인생은
서러워라.
서러워라 우리들은,
공덕(功德) 닦으러
왔네.
지금까지도 시골 사람들이 방아를 찧을 때나 다른 일을 할 때에는 모두 이 노래를 부르는데
그것은 대개 이때 시작된 것이다. 장육상(丈六像)을 처음 만들 때에 든 비용은 곡식 2만 3,700석이었다[혹은 이 비용이 금빛을
칠할 때 든 것이라고도 한다].
논평해 말한다. "양지 스님은 가위 재주가 온전하고 덕이 충만(充滿)했다.
그는 여러 방면의 대가(大家)로서 하찮은 재주만 드러내고 자기 실력은 숨긴 것이라 할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재(齋)가 파하여 법당 앞에 석장(錫杖)은
한가한데,
향로에 손질하고 혼자서 단향(檀香)
피우네.
남은 불경 다 읽자 더 할 일
없으니
소상(塑像) 만들어 합장하고
쳐다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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