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pia 삼국유사Home으로
today : 175   total : 122490  통계보기
三國遺事卷第一
紀異 第一 上
古朝鮮 원문국역문
魏滿朝鮮 원문국역문
馬韓 원문국역문
二府 원문국역문
七十二國 원문국역문
樂浪國 원문국역문
北帶方 원문국역문
南帶方 원문국역문
靺鞨 渤海 원문국역문
伊西國 원문국역문
五伽耶 원문국역문
北扶餘 원문국역문
東扶餘 원문국역문
高句麗 원문국역문
卞韓 百濟 원문국역문
辰韓 원문국역문
又四節遊宅 원문국역문
新羅始祖 赫居世王 원문국역문
第二南解王 원문국역문
第三弩禮王 원문국역문
第四脫解王 원문국역문
金閼智 脫解王代 원문국역문
延烏郎 細烏女 원문국역문
未鄒王 竹葉軍 원문국역문
奈勿王 金堤上 원문국역문
第十八實聖王 원문국역문
射琴匣 원문국역문
智哲老王 원문국역문
眞興王 원문국역문
桃花女 鼻荊郞 원문국역문
天賜玉帶 원문국역문
善德王知幾三事 원문국역문
眞德王 원문국역문
金庾信 원문국역문
太宗春秋公 원문국역문
長春郎 罷郎 원문국역문
三國遺事卷第二
紀異 第二 下
文虎王法敏 원문국역문
萬波息笛 원문국역문
孝昭王代 竹旨郞 원문국역문
聖德王 원문국역문
水路夫人 원문국역문
孝成王 원문국역문
景德王 忠談師 表訓大德 원문국역문
惠恭王 원문국역문
元聖大王 원문국역문
早雪 원문국역문
興德王 鸚 원문국역문
神武大王 閻長 弓巴 원문국역문
四十八景文大王 원문국역문
處容郎 望海寺 원문국역문
眞聖女大王 居陁知 원문국역문
孝恭王 원문국역문
景明王 원문국역문
景哀王 원문국역문
金傅大王 원문국역문
南扶餘 前百濟 北扶餘已見上 원문국역문
武王 원문국역문
後百濟 甄萱 원문국역문
駕洛國記 원문국역문
居登王 원문국역문
麻品王 원문국역문
居叱彌王 원문국역문
伊尸品王 원문국역문
坐知王 원문국역문
吹希王 원문국역문
銍知王 원문국역문
鉗知王 원문국역문
仇衡王 원문국역문
三國遺事卷第三
興法第三
順道肇麗 원문국역문
難陁闢濟 원문국역문
阿道基羅 원문국역문
原宗興法 厭髑滅身 원문국역문
法王禁殺 원문국역문
寶藏奉老 普德移庵 원문국역문
東京興輪寺金堂十聖 원문국역문
塔像第四
迦葉佛宴坐石 원문국역문
遼東城育王塔 원문국역문
金官城婆娑石塔 원문국역문
高麗靈塔寺 원문국역문
皇龍寺丈六 원문국역문
皇龍寺九層塔 원문국역문
皇龍寺鐘 芬皇寺藥師 奉德寺鍾 원문국역문
靈妙寺丈六 원문국역문
四佛山 掘佛山 萬佛山 원문국역문
生義寺石彌勒 원문국역문
興輪寺壁畵普賢 원문국역문
三所觀音 衆生寺 원문국역문
栢栗寺 원문국역문
敏藏寺 원문국역문
前後所將舍利 원문국역문
彌勒仙花 未尸郎 眞慈師 원문국역문
南白月二聖 努肹夫得 怛怛朴朴 원문국역문
芬皇寺千手大悲 盲兒得眼 원문국역문
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 원문국역문
魚山佛影 원문국역문
臺山五萬眞身 원문국역문
溟州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 원문국역문
臺山月精寺五類聖衆 원문국역문
南月山 원문국역문
天龍寺 원문국역문
鍪藏寺彌陁殿 원문국역문
伯嚴寺石塔舍利 원문국역문
靈鷲寺 원문국역문
有德寺 원문국역문
五臺山文殊寺石塔記 원문국역문
三國遺事 卷第四
義解 第五
圓光西學 원문국역문
寶壤梨木 원문국역문
良志使錫 원문국역문
歸竺諸師 원문국역문
二惠同塵 원문국역문
慈藏定律 원문국역문
元曉不覊 원문국역문
義湘傳敎 원문국역문
虫也福不言 원문국역문
眞表傳簡 원문국역문
關東楓岳鉢淵藪石記 원문국역문
勝詮髑髏 원문국역문
心地繼祖 원문국역문
賢瑜珈 海華嚴 원문국역문
三國遺事 卷第五
神咒 第六
密本摧邪 원문국역문
惠通降龍 원문국역문
明朗神印 원문국역문
感通 第七
仙桃聖母隨喜佛事 원문국역문
郁面婢念佛西昇 원문국역문
廣德 嚴莊 원문국역문
憬興遇聖 원문국역문
眞身受供 원문국역문
月明師兜率歌 원문국역문
善律還生 원문국역문
金現感虎 원문국역문
融天師彗星歌 眞平王代 원문국역문
正秀師救氷女 원문국역문
避隱 第八
朗智乘雲 普賢樹 원문국역문
緣會逃名 文殊岾 원문국역문
惠現求靜 원문국역문
信忠掛冠 원문국역문
包山二聖 원문국역문
永才遇賊 원문국역문
勿稽子 원문국역문
迎如師 원문국역문
布川山 五比丘 景德王代 원문국역문
念佛師 원문국역문
孝善 第九
眞定師孝善雙美 원문국역문
大城孝二世父母 神文代 원문국역문
向得舍知割股供親 景德王代 원문국역문
孫順埋兒 興德王代 원문국역문
貧女養母 원문국역문
跋文 원문국역문
개요
목록 원문국역문
해제
범례
home三國遺事 卷第四 > 義解 第五 > 寶壤梨木
first prev next last
원문국역문 국역원문비교보기
http://www.histopia.net/url.php?ID=yusa_05_002r ::: URL

보양이목(寶壤梨木)

중 보양전(寶壤傳)에는 그의 향리(鄕里)와 씨족(氏族)은 실려 있지 않으나 삼가 청도군청(淸道郡廳)의 문적(文籍)을 상고해 보면 이렇게 씌어 있다. "천복(天福) 8년 계유(癸酉[943. 태조太祖 즉위 제26년]) 정월 일의 청도군 계리(界里) 심사(審使) 순영(順英) 대내말수문(大乃末水文) 등의 주첩(柱貼) 문공(文公)을 보면, 운문산선원(雲門山禪院) 장생(長生)은 남쪽은 아니점(阿尼岾)이요, 동쪽은 가서현(嘉西峴)이라고 했다. 절의 삼강(三剛)의 전주인(典主人)은 보양화상(寶壤和尙)이요, 원주(院主)는 현회장로(玄會長老), 정좌(貞座)는 현량상좌(玄兩上座), 직세(直歲)는 신원선사(信元禪師[위 공문公文은 청도군淸道郡의 도전장부都田帳簿에 의한 것])다."했다.

또 개운(開運) 3년 병진(丙辰(午)[946])의 운문산선원(雲門山禪院) 장생표탑(長生標塔)에 관계되는 공문(公文) 한 통에 보면, "장생(長生)이 11개이니 아니점·가서현·무현(畝峴)·서북매현(西北買峴[혹은 면지촌面知村])·북저족문(北猪足門) 등이다."했다.

또 경인년(庚寅年)의 진양부첩(晉陽府貼)에는, "오도안찰사(五道按察使)가 각 도의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사원(寺院)이 처음 세워진 연월(年月)과 그 모양을 자세히 조사해서 장부를 만들 때, 차사원(差使員) 동경장서기(東京掌書記) 이선(李선)이 자세히 조사하여 적었다."고 했다.

정풍(正豊) 6년 신사(辛巳[1161, 이것은 대금大金의 연호이니 본조本朝 의종毅宗 즉위 16년임]) 9월의 군중고적비보기(郡中古籍裨補記)에 따르면 이렇다. 청도군 전부호장(前副戶長) 어모부위(禦侮副尉) 이칙정(李則禎)의 집에 있는 옛 사람들의 소식 및 우리말로 전해 오는 기록에는, 치사(致仕)한 상호장(上戶長) 김양신(金亮辛), 치사한 호장 민육(旻育), 호장 동정(同正) 윤응(尹應), 전기인(前其人) 진기(珍奇) 등과 당시 상호장 용성(用成) 등의 말이 적혀 있다. 그 때 태수(太守) 이사로(李思老)와 호장 김양신은 나이 89세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나이 70세 이상이었다. 다만 용성만이 나이 60세 이상[운운云云이라 쓴 것은 이 다음부터는 쓰지 않는다]이었다. 신라 시대 이래로 이 청도군의 절과 작갑사(鵲岬寺)와 그밖의 크고 작은 사원(寺院)인 대작갑(大鵲岬)·소작갑(小鵲岬)·소보갑(所寶岬)·천문갑(天門岬)·가서갑(嘉西岬) 등 다섯 갑사(岬寺)가 모두 후삼한(後三韓)의 난리에 없어져서 다섯 갑사(岬寺)의 기둥을 대작갑사(大鵲岬寺)에 모아 두었다.

조사(祖師) 지식(知識[윗글에는 보양寶壤이라 했다])이 중국에서 불법을 전해 받아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서해 가운데에 이르니, 용이 그를 용궁으로 맞아들여 불경을 외게 하더니 금빛 비단의 가사(袈裟) 한 벌을 주고, 겸하여 아들 이목(璃目)을 그에게 주면서 조사를 모시고 가게 했다. 이때 용왕은 부탁한다. "지금 삼국(三國)이 시끄러워서 아직은 불법에 귀의(歸依)하는 군주(君主)가 없지만, 만일 내 아들과 함께 본국(本國)으로 돌아가서 작갑(鵲岬)에 절을 짓고 살면 능히 적병을 피할 수 있을 것이오. 또한 몇 해가 안 되어서 반드시 불법을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와서 삼국을 평정할 것이오." 말을 마치자 서로 작별하고 돌아와서 이 골짜기에 이르니 갑자기 늙은 중이 스스로 원광(圓光)이라 하면서 도장이 든 궤를 안고 나와서 조사에게 주더니 이내 없어졌다[상고하건대 원광圓光은 진陳의 말년에 중국에 들어갔다가 수隋의 개황開皇 연간에 본국으로 돌아온 사람이다. 또 가서갑嘉西岬에 살다가 황륭사皇隆寺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햇수를 계산하면 청태淸泰 초년까지는 무려 300년이나 된다. 이제 여러 갑사岬寺가 모두 없어진 것을 슬퍼하고 보양寶壤이 와서 장차 절이 이룩될 것을 보고 기뻐하여 여기에 왔을 것이다].

이에 보양법사(寶壤法師)는 장차 허물어진 절을 일으키려 하여 북쪽 고개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뜰에 5층의 누런 탑이 있었다. 그러나 내려가서 찾아보면 아무런 자취도 없으므로 다시 올라가서 바라보니 까치가 땅을 쪼고 있다. 법사는 해룡(海龍)이 작갑(鵲岬)이라는 말이 생각나서 그 곳을 찾아가서 파보니 과연 예전 벽돌이 수없이 있었다. 이것을 모아 쌓아 올려 탑을 이루니 남은 벽돌이 하나도 없으므로 이곳이 전대(前代)의 절터임을 알았다. 여기에 절을 세우고 살면서 절 이름을 작갑사(鵲岬寺)라고 했다. 그런 지 얼마 안 되어 고려 태조(太祖)가 삼국을 통일하고 보양법사가 이곳에 절을 짓고 산다는 말을 듣고 다섯 갑(岬)의 밭 500결(結)을 합해서 이 절에 바쳤다. 또 청태(淸泰) 4년 정유(丁酉[937])에는 절 이름을 운문선사(雲門禪寺)라 내리고, 가사(袈裟)의 신령스러운 음덕(蔭德)을 받들게 했다. 이때 이목(璃目)은 항상 절 곁에 있는 작은 못에 살면서 법화(法化)를 음으로 돕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에 몹시 가물어서 밭에 채소가 모두 타고 마르므로 보양(寶壤)이 이목을 시켜 비를 내리게 하니 온 고을이 흡족하였다. 이에 천제(天帝)가 그를 죽이려 하자 이목이 보양에게 위급함을 고하니 법사가 침상 밑에 숨겨 주었다. 이윽고 천사(天使)가 뜰에 와서 이목을 내놓으라고 청하자 법사는 뜰앞의 배나무[梨木]를 가리키니 천사는 거기에 벼락을 치고 하늘로 올라갔다. 배나무가 부러졌으므로 용이 쓰다듬으니 곧 되살아났다. 그 나무는 근년에 와서 땅에 쓰러졌는데 어떤 사람이 망치를 만들어서 선법당(善法堂)과 식당(食堂)에 안치(安置)하였다. 그 망치 자루에는 명(銘)이 있다.

처음 법사가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먼저 추화군(推火郡) 봉성사(奉聖寺)에 머물렀는데, 이때 마침 고려 태조가 동쪽을 정벌해서 청도(淸道)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산적들이 견성(犬城[산봉우리가 물을 굽어보고 뾰족하게 섰는데 지금 민간民間에서 이것을 미워하여 이름을 견성犬城이라고 고쳤다 한다])에 모여서 교만을 부리고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가 산 밑에 이르러 법사에게 산적들을 쉽게 물리칠 방법을 물으니 법사는 대답했다. "대체로 개란 짐승은 밤만을 맡았고 낮은 맡지 않았으며, 앞만 지키고 그 뒤는 잊고 있습니다. 하오니 마땅히 대낮에 그 북쪽으로 쳐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태조가 그 말을 좇으니 적은 과연 패해서 항복했다. 태조는 법사의 그 신통한 꾀를 가상히 여겨 매년 가까운 고을의 조(租) 50석을 주어 향화(香火)를 받들게 했다. 이에 이 절에 이성(二聖)의 진용(眞容)을 모시고 절 이름을 봉성사(奉聖寺)라고 했다. 뒤에 법사는 진용을 작갑사(鵲岬寺)로 옮겨서 크게 절을 세우고 세상을 마쳤다.

법사의 행장은 고전(古傳)에는 실려 있지 않고 다만 민간에서 이렇게 말한다. "석굴사(石굴寺)의 비허사(備虛師[혹은 비허毗虛])와 형제가 되어 봉성(奉聖)·석굴(石굴)·운문(雲門) 등 세 절이 연접된 산봉우리에 늘어서 있었기 때문에 서로 왕래했다."

후세 사람들이 ≪신라이전(新羅異傳)≫을 고쳐 지으면서 작갑사의 탑과 이목(璃目)의 사실을 원광(圓光)의 전기 속에 잘못 기록해 넣었다. 또 견성(犬城)의 사실을 비허사(備虛師)의 전기에 넣은 것도 이미 잘못인 데다가 더구나 또 ≪해동승전(海東僧傳)≫을 지은 자도 여기에 따라서 글을 윤색하고 보양(寶壤)의 전기가 없어 뒷사람들이 의심내고 잘못 알게 했으니 그 얼마나 무망(誣妄)한 짓인가.

digitized by jikji. HiSTOPIA™
도움말
오류신고
Top으로
Copyright ⓒ 2008-2019 HISTOPIA™ all rights reserved, Designed by Sungjee J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