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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상고해 보면, 대정(大定) 12년 경자(庚子[1180])는 곧 고려 명종(明宗)
11년인데 이때 비로소 만어사(萬魚寺)를 세웠다. 동량(棟梁) 보림(寶林)이 임금에게 글을 올렸는데 그 글에 말했다. "이
산 속의 기이한 자취가 북천축(北天竺) 가라국(訶羅國) 부처의 영상(影像)과 서로 같은 것이 세 가지가 있다. 그 첫째는 산 가까운
곳이 양주(梁州) 경계의 옥지(玉池)인데 여기에도 역시 독룡(毒龍)이 살고 있다는 것이요, 둘째는 때때로 강가에서 구름 기운이 일어나서
산마루에까지 이르는데, 그 구름 속에서 음악소리가 나는 것이요, 셋째는 부처 영상(影像)의 서북쪽에 반석(盤石)이 있어 항상 물이 괴어 없어지지
않는데, 이것은 부처가 가사(袈裟)를 빨던 곳이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이상은 모두 보림(寶林)의 말인데, 지금 친히 와서 모두
참례(參禮)하고 보니 또한 분명히 공경하고 믿을 만한 일이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골짜기 속의 돌이 전체의 3분의 2는 모두 금과
옥의 소리를 내는 것이 그 하나요, 멀리서 보면 나타나고 가까이서 보면 보이지 않아서 혹은 보이기도 하고 혹은 보이지 않기도 하는 것이 그
하나이다. 북천축(北天竺)의 글은 뒤에 갖추어 기록되어 있다.
가자함(可字函)의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 제7권에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이 야건가라국(耶乾訶羅國) 고선산(古仙山), 담복화림(담복花林) 독룡(毒龍)의 옆이요 청련화천(靑蓮花泉)의 북쪽인,
나찰혈(羅刹穴) 가운데에 있는 아나사산(阿那斯山) 남쪽에 이르렀다. 이때 그 구멍에는 나찰(羅刹) 다섯이 있어 이것이 여룡(女龍)으로
화하여 독룡과 교접하는데, 독룡은 다시 우박을 내리고 나찰(羅刹)은 난폭한 행동을 하니 기근(飢饉)과 역질(疫疾)이 4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왕은 놀라고 두려워하여 신기(神祇)에게 빌고 제사지냈으나 아무런 도움도 없었다. 그때 총명하고 지혜가 많은 범지(梵志)가
대왕께 아뢰었다. '가비라국(伽毗羅國) 정반왕(淨飯王)의 왕자(王子)가 지금 도(道)를 이루어 호(號)를 석가문(釋迦文)이라고
합니다.' 완은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크게 기뻐하여 부처를 향해서 예를 올리고 말한다. '어찌해서 오늘날 불교가 이미
일어났다 하는데 이 나라에는 오지 않으십니까.' 그때 석가여래는 여러 비구(比丘)에게 영을 내려서 여섯 가지 신통력(神通力)을 얻은
자를 따르게 하고 나건가라왕(那乾訶羅王)의 불파부제(弗婆浮提)가 청하는 것을 받아 주기로 했다. 그때 세존(世尊)의 이마에서
광명(光明)이 나와서 1만이나 되는 여러 대화불(大化佛)을 만들어 그 나라로 갔다. 이때 용왕(龍王)과 나찰녀(羅刹女)는 온몸뚱이를
땅에 던져 부처에게 계(戒)를 받기를 청했다. 이에 부처는 곧 그들을 위하여 삼귀(三歸) 오계(五戒)를 설법(說法)하니 용왕은 이
설법을 다 듣고 나자 꿇어앉자 합장(合掌)하고 세존이 항상 여기에 머물러 있기를 청하여 '부처님께서 만일 이곳에 계시지 않으면 저에게 악한
마음이 생겨서 아누보리(阿누菩提)가 될 수 없습니다.' 이때 범천왕(梵天王)이 다시 와서 부처에게 예(禮)하고 청한다.
'파가파(婆伽婆)께서는 앞으로 올 세상의 모든 중생(衆生)들을 위할 것이요, 이 작은 한 용(龍)만을 위하지 마시옵소서.'
이에 백천(百千)의 범왕(梵王)들도 모두 이러한 청을 했다.
이때 용왕이 칠보대(七寶臺)를 내어 여래(如來)에게 바치니 부처는 용왕에게 말한다.
'이 대(臺)는 나에게 필요치 않으니 너는 지금 다만 나찰(羅刹)이 있는 석굴(石窟)을 가져다가 나에게 시주(施主)하도록 하라.'
용왕은 이 말을 듣고 기뻐했다 한다. 이때 여래가 용왕을 위로했다. '내가 네 청을 받아들여 네 굴 속에 앉아서
1,500년을 지내겠다.' 말을 마치고 부처가 몸을 솟구쳐 굴 속으로 들어가니 이내 그 돌은 밝은 거울과 같아져서, 사람들이 그 얼굴
모습을 볼 수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모든 용들이 다 나타났다. 부처는 돌 속에 있으면서 빛을 밖으로 나타내니 모든 용들은 합장하고
기뻐하면서 그곳을 떠나지 않고서도 항상 부처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이때 세존(世尊)은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석벽(石壁) 속에 앉아
있었는데, 중생들이 볼 때에 멀리서 바라보면 나타나 있다가도 가까이서 보면 나타나지 않았다. 제천(諸天)이 부처의 영상(影像)에
공양하면 부처의 영상도 역시 설법(說法)했다."
또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이 바위 위를 발로 밟으니 문득 금옥(金玉)의 소리가
났다."
≪고승전(高僧傳)≫에는 또 이렇게 말했다. "혜원(惠遠)이 들으니
천축국(天竺國)에 부처님의 영상이 있는데 그것은 옛날 용을 위해서 남겨 놓은 부처님의 영상으로, 북천축(北天竺) 월지국(月支國)
나갈가성(那竭呵城)의 남쪽 고선인(古仙人)의 석실(石室) 속에 있었다 한다."
또 법현(法現)의 ≪서역전(西域傳)≫에는 이렇게 말했다.
"나갈국(那竭國)의 국경에 가면 나갈성(那竭城) 남쪽으로 반 유순(由旬)이 되는 곳에 석실(石室)이 있으니, 그곳은 박산(博山)의
서남쪽이며 그 속에 부처가 영상을 남겼다. 여기서 10여 보(步)를 가서 보면 부처의 진형(眞形)처럼 광명이 환하게 나타나지만
멀어질수록 점점 희미하게 보였다. 여러 나라 왕들이 화공(畵工)을 보내서 이것을 그리려 했지만 비슷하게도 그릴 수가 없었다.
나라 사람들에게 전해 오는 말로는 현겁(賢劫)의 천불(千佛)이 모두 마땅히 여기에 영상(影像)을 남길 것이니, 그 영상의 서쪽
100보쯤 되는 곳에, 부처가 이 세상에 있을 때 머리를 깎고 손톱을 깎던 곳이 있다고 한다."
성자함(星字函)의 ≪서역기(西域記)≫ 제2권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여래(如來)가 세상에 있을 때에 이 용이 소 치는 사람이 되어 왕에게 소의 젖을 올렸는데, 올리다가 잘못하여 꾸지람을 받자
속으로 분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어 돈을 주고 꽃을 사서 부처님에게 공양했다. 그리고 솔도파(솔堵婆)에게 수기(授記)하기를, '부디
악룡(惡龍)이 되어 나라를 깨뜨리고 왕을 해치게 해 주시오'하고는 석벽(石壁)에 가서 몸을 던져 죽자, 드디어 이 굴 속의 대룡왕(大龍王)이
되어 악한 마음을 일으켰다. 여래(如來)가 이것을 보고 몸을 변하여 신통력(神通力)을 가지고 여기에 오니 용은 부처를 보자 독한
마음이 드디어 그쳐져서 불살계(不殺戒)를 받고 청하기를, '부처님께서 항상 이 굴에 계시면서 저의 공양을 받아 주십시오'했다. 이에
부처가 말했다. '나는 장차 적멸(寂滅)할 것이다. 그러나 너를 위해서 내 영상을 남겨 둘 것이니 네가 만일 독하고 분한
마음이 생기거든 항상 내 영상을 바라보면 독한 마음이 없어질 것이다.' 부처는 정신을 가다듬어 홀로 석실(石室)로 들어갔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이내 나타나고 가까이서 보면 나타나지 않았다. 또 돌 위를 발로 차서 칠보(七寶)로 삼았다 한다." 이상은 모두
경문(經文)이니 대략 이와 같다.
해동(海東) 사람들은 이 산을 이름하여 아나사(阿那斯)라고 했으나 마땅히
마나사(摩那斯)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나사를 번역하면 어(魚)가 되니, 대개 저 북천(北天)에서 있었던 일을 취해다가 산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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