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pia 삼국유사Home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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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卷第一
紀異 第一 上
古朝鮮 원문국역문
魏滿朝鮮 원문국역문
馬韓 원문국역문
二府 원문국역문
七十二國 원문국역문
樂浪國 원문국역문
北帶方 원문국역문
南帶方 원문국역문
靺鞨 渤海 원문국역문
伊西國 원문국역문
五伽耶 원문국역문
北扶餘 원문국역문
東扶餘 원문국역문
高句麗 원문국역문
卞韓 百濟 원문국역문
辰韓 원문국역문
又四節遊宅 원문국역문
新羅始祖 赫居世王 원문국역문
第二南解王 원문국역문
第三弩禮王 원문국역문
第四脫解王 원문국역문
金閼智 脫解王代 원문국역문
延烏郎 細烏女 원문국역문
未鄒王 竹葉軍 원문국역문
奈勿王 金堤上 원문국역문
第十八實聖王 원문국역문
射琴匣 원문국역문
智哲老王 원문국역문
眞興王 원문국역문
桃花女 鼻荊郞 원문국역문
天賜玉帶 원문국역문
善德王知幾三事 원문국역문
眞德王 원문국역문
金庾信 원문국역문
太宗春秋公 원문국역문
長春郎 罷郎 원문국역문
三國遺事卷第二
紀異 第二 下
文虎王法敏 원문국역문
萬波息笛 원문국역문
孝昭王代 竹旨郞 원문국역문
聖德王 원문국역문
水路夫人 원문국역문
孝成王 원문국역문
景德王 忠談師 表訓大德 원문국역문
惠恭王 원문국역문
元聖大王 원문국역문
早雪 원문국역문
興德王 鸚 원문국역문
神武大王 閻長 弓巴 원문국역문
四十八景文大王 원문국역문
處容郎 望海寺 원문국역문
眞聖女大王 居陁知 원문국역문
孝恭王 원문국역문
景明王 원문국역문
景哀王 원문국역문
金傅大王 원문국역문
南扶餘 前百濟 北扶餘已見上 원문국역문
武王 원문국역문
後百濟 甄萱 원문국역문
駕洛國記 원문국역문
居登王 원문국역문
麻品王 원문국역문
居叱彌王 원문국역문
伊尸品王 원문국역문
坐知王 원문국역문
吹希王 원문국역문
銍知王 원문국역문
鉗知王 원문국역문
仇衡王 원문국역문
三國遺事卷第三
興法第三
順道肇麗 원문국역문
難陁闢濟 원문국역문
阿道基羅 원문국역문
原宗興法 厭髑滅身 원문국역문
法王禁殺 원문국역문
寶藏奉老 普德移庵 원문국역문
東京興輪寺金堂十聖 원문국역문
塔像第四
迦葉佛宴坐石 원문국역문
遼東城育王塔 원문국역문
金官城婆娑石塔 원문국역문
高麗靈塔寺 원문국역문
皇龍寺丈六 원문국역문
皇龍寺九層塔 원문국역문
皇龍寺鐘 芬皇寺藥師 奉德寺鍾 원문국역문
靈妙寺丈六 원문국역문
四佛山 掘佛山 萬佛山 원문국역문
生義寺石彌勒 원문국역문
興輪寺壁畵普賢 원문국역문
三所觀音 衆生寺 원문국역문
栢栗寺 원문국역문
敏藏寺 원문국역문
前後所將舍利 원문국역문
彌勒仙花 未尸郎 眞慈師 원문국역문
南白月二聖 努肹夫得 怛怛朴朴 원문국역문
芬皇寺千手大悲 盲兒得眼 원문국역문
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 원문국역문
魚山佛影 원문국역문
臺山五萬眞身 원문국역문
溟州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 원문국역문
臺山月精寺五類聖衆 원문국역문
南月山 원문국역문
天龍寺 원문국역문
鍪藏寺彌陁殿 원문국역문
伯嚴寺石塔舍利 원문국역문
靈鷲寺 원문국역문
有德寺 원문국역문
五臺山文殊寺石塔記 원문국역문
三國遺事 卷第四
義解 第五
圓光西學 원문국역문
寶壤梨木 원문국역문
良志使錫 원문국역문
歸竺諸師 원문국역문
二惠同塵 원문국역문
慈藏定律 원문국역문
元曉不覊 원문국역문
義湘傳敎 원문국역문
虫也福不言 원문국역문
眞表傳簡 원문국역문
關東楓岳鉢淵藪石記 원문국역문
勝詮髑髏 원문국역문
心地繼祖 원문국역문
賢瑜珈 海華嚴 원문국역문
三國遺事 卷第五
神咒 第六
密本摧邪 원문국역문
惠通降龍 원문국역문
明朗神印 원문국역문
感通 第七
仙桃聖母隨喜佛事 원문국역문
郁面婢念佛西昇 원문국역문
廣德 嚴莊 원문국역문
憬興遇聖 원문국역문
眞身受供 원문국역문
月明師兜率歌 원문국역문
善律還生 원문국역문
金現感虎 원문국역문
融天師彗星歌 眞平王代 원문국역문
正秀師救氷女 원문국역문
避隱 第八
朗智乘雲 普賢樹 원문국역문
緣會逃名 文殊岾 원문국역문
惠現求靜 원문국역문
信忠掛冠 원문국역문
包山二聖 원문국역문
永才遇賊 원문국역문
勿稽子 원문국역문
迎如師 원문국역문
布川山 五比丘 景德王代 원문국역문
念佛師 원문국역문
孝善 第九
眞定師孝善雙美 원문국역문
大城孝二世父母 神文代 원문국역문
向得舍知割股供親 景德王代 원문국역문
孫順埋兒 興德王代 원문국역문
貧女養母 원문국역문
跋文 원문국역문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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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범례
home三國遺事 卷第三塔像 第四 > 前後所將舍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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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

≪국사(國史)≫에 이렇게 말했다. "진흥왕(眞興王) 때인 태청(太淸) 3년 기사(己巳[549])에 양(梁)나라에서 심호(沈湖)를 시켜 사리(舍利) 몇 알을 보내왔다. 선덕왕(善德王) 때인 정관(貞觀) 17년 계묘(癸卯[643])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唐)나라에서 부처의 머리뼈와 어금니와 부처의 사리 100알과 부처가 입던 붉은 비단에 금색 점이 있는 가사(袈裟) 한 벌을 가지고 왔는데, 그 사리를 셋으로 나누어 하나는 황룡사(皇龍寺) 탑에 두고, 하나는 대화사(大和寺) 탑에 두고, 하나는 가사와 함께 통도사(通度寺) 계단(戒壇)에 두었으나, 그 나머지는 어디에 있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통도사 계단에는 두 층이 있는데 위층 가운데에는 돌 뚜껑을 덮어서 마치 가마솥을 엎어놓은 것과 같았다.

속설(俗說)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 본조(本朝)에서 전후로 염사(廉使) 두 사람이 와서 계단에 절을 하고 공손히 돌솥을 들어 보았는데, 처음에는 긴 구렁이가 돌 함(函) 속에 있는 것을 보았고, 다음 번에는 큰 두꺼비가 돌 밑에 쪼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으므로 이로부터는 감히 이 돌을 들어 보지 못했다 한다. 요새 상장군(上將軍) 김공(金公) 이생(利生)과 유시랑(庾侍郞) 석(碩)이 고종(高宗)의 명령을 받아 강동(江東)을 지휘할 때 부절(符節)을 가지고 절에 와서 돌을 들고 절하려고 하니 절의 중은 지난 일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난처하게 여겼다. 두 사람이 군사를 시켜 돌을 들게 하니 그 속에 작은 돌 함이 있고, 함 속에는 유리통(瑠璃筒)이 들어 있고, 통 속에는 사리(舍利)가 단지 네 알뿐이었다. 이것을 서로 돌려보면서 경례했는데 통에 조금 상한 곳이 있었다. 이에 유공(庾公)이 마침 가지고 있던 수정함 하나를 시주하여 함께 간수해 두게 하고, 그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 이때는 강화도(江華島)로 서울을 옮긴 지 4년이 되던 을미년(乙未年[1235])이었다."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사리(舍利) 100개를 세 곳에 나누어 두었더니, 이제는 오직 네 개뿐이다. 그것은 숨겨지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여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니 수효가 많고 적은 것이 괴이할 것이 없다." 또 속설(俗說)에는 이렇게 말한다. "황룡사(皇龍寺) 탑이 불타던 날에 돌솥 동쪽에 처음 큰 얼룩이 생겼는데 이것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때는 바로 요(遼)의 응력(應曆) 3년 계축(癸丑[953])이요, 본조(本朝) 광종(光宗) 5(4)년으로, 탑이 세 번째로 불타던 때였다. 조계(曹溪)의 무의자(無衣子)가 시를 남겨 말하기를, "들으니 황룡사탑이 불타던 날, 번져서 탄 한 쪽에도 틈이 없었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지원(至元) 갑자년(甲子年[1264]) 이후로 원(元)나라 사신과 본국 황화(皇華)들이 다투어 와서 이 돌함에 절했으며 사방의 운수(雲水)들도 몰려들어 참례했는데, 돌함을 들어보기도 하고 혹은 들지 않기도 했다. 진신(眞身)의 사리 네 알 외에 변신(變身) 사리가 모래알처럼 부셔져서 돌함 밖으로 나와 있었는데 이상한 향기를 강하게 풍겨 여러 날 동안 없어지지 않는 일이 이따금 있었으니, 이것은 말세에 있는 한 지방의 기이한 일인 것이다.

당(唐)나라 대중(大中) 5년 신미(辛未[851])에 당나라로 갔던 사신 원홍(元弘)이 당에서 가지고 온 부처의 어금니[지금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신라 문성왕文聖王 때의 일이다]와 후당(後唐) 동광(同光) 원년 계미(癸未[ 923]) 곧 본조(本朝) 태조(太祖) 즉위 6년에 당(唐)나라로 보냈던 사신 윤질(尹質)이 가지고 온 오백나한(五百羅漢)의 상(像)은 지금 북숭산(北崇山) 신광사(神光寺)에있다. 송(宋)나라의 선화(宣和) 원년 기묘(己卯(亥)[예종睿宗 15(4), 1119])에 입공사(入貢使) 정극영(鄭克永)·이지미(李之美) 등이 가지고 온 부처의 어금니는 지금 내전(內殿)에 모셔 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서로 전해 내려오는 말은 이러하다. 옛날 의상법사(義湘法師)가 당나라에 들어가 종남산(終南山)의 지상사(至相寺) 지엄존자(智儼尊者)에게 가 있었는데, 이웃에 선율사(宣律師)가 있어서, 항상 하늘의 공양을 받고 재를 올릴 때마다 하늘 주방(廚房)에서 먹을 것을 보내 왔다. 어느날 선율사는 의상법사를 청하여 재를 올리는데 의상이 자리를 잡고 앉은 지 오랜데도 하늘에서 보내는 음식은 때가 지나도 오지 않는다. 의상이 빈 바리때만 가지고 돌아가자 비로소 천사(天使)가 내려왔다. 선율사가 "오늘은 어찌해서 늦으셨소"하고 묻자 천사는 대답한다. "온 동네에 가득히 신병(神兵)이 막고 있어서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율사는 의상법사에게 신의 호위가 있는 것을 알고는 그의 도(道)의 힘이 자기보다 나은 것에 탄복하고는 하늘에서 보내 온 음식을 그대로 두었다가, 이튿날 또 지엄(智儼)과 의상(義湘) 두 대사를 재 올리는데 청해다가 그 사유를 자세히 말했다. 의상이 조용히 율사에게 말한다. "율사는 이미 천제(天帝)의 존경을 받고 계신데, 일찍이 듣건대 제석궁(帝釋宮)에는 부처님의 이빨 40개 중에 어금니 하나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들을 위해서 천제께 청하여 그것을 인간에게 내려보내어 복이 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율사는 이 후에 천사와 함께 그 뜻을 천제에게 전하니 천제는 7일을 기한하여 이를 보내 주니 의상은 경례를 다한 뒤에 맞이하여 대궐에 안치했다.

그 후 송(宋)나라 휘종조(徽宗朝)에 이르러 좌도(左道)를 믿으니, 이때 나라 사람들은 도참(圖讖)을 전하여 퍼뜨리기를, "금인(金人)이 이 나라를 망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황건(黃巾)의 무리들이 일관(日官)을 충동하여 위에 아뢰기를, "금인이란 불교를 말하는 것이니 장차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입니다"하였다. 이리하여 조정에서는 장차 불교를 없애고 중들을 무찔러 죽이고, 경전(經典)을 불사르고, 따로 조그만 배를 만들어 부처의 어금니를 실어 큰 바다에 띄워 인연이 있는 곳으로 흘려 보내려 했다. 이때 마침 고려 사신이 송나라에 갔다가 그 사실을 듣고는 천화용(天花茸) 50령(領)과 저포(紵布) 300필을 배를 호송(護送)하는 관원에게 뇌물로 주고 남몰래 부처의 어금니를 받고 빈 배만 흘려 보내게 했다. 사신들이 부처의 어금니를 얻어 가지고 와서 왕에게 아뢰자 예종(睿宗)은 크게 기뻐하여 십원전(十員殿) 왼쪽에 있는 소전(小殿)에 모시고 항상 소전 문을 잠그고 밖에는 향과 등불을 설치하여 왕이 친히 거둥하는 날에만 대궐 문을 열고 경례를 했다.

임진년(壬辰年[1232])에 서울을 강화(江華)로 옮길 때 내관(內官)들은 총망한 중에 잊어버리고 이를 거두어 챙기지 못했다. 병신년(丙申年) 4월에 왕의 원당(願堂)인 신효사(神孝寺) 중 온광(蘊光)이 불아(佛牙)에 경례하기를 청하므로 왕에게 아뢰니 왕은 내신(內臣)을 시켜서 두루 궁중(宮中)을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이때 백대(栢臺) 시어사(侍御史) 최충(崔沖)이 설신(薛伸)에게 명하여 급히 여러 알자(謁者)의 방을 다니면서 물었으나 모두 어쩔 줄을 모를 뿐이었다. 내신(內臣) 김승로(金承老)가 아뢰기를, "임진년(壬辰年)에 서울을 옮길 때의 ≪자문일기(紫門日記)≫를 조사해 보십시오"하므로 그 말을 쫓아 조사해보니 일기(日記)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입내시대부경(入內侍大府卿) 이백전(李白全)이 불아함(佛牙函)을 받다." 이백전(李白全)을 불러 물으니 대답한다. "청컨대 집에 돌아가서 다시 저의 사사 일기(日記)를 찾아보게 해 주십시오." 집에 가서 찾아보고 좌번알자(左番謁者) 김서룡(金瑞龍)이 불아함(佛牙函)을 받았다는 기록을 갖다가 바쳤다. 김서룡(金瑞龍)을 불러 물었으나 대답을 못한다. 또 김승로(金承老)가 아뢰는 대로 임진년(壬辰年)에서 지금 병신년(丙申年)까지 5년간의 어불당(御佛堂)과 경령전(景靈殿)에 수직한 자들을 잡아 가두고 심문했으나, 아무런 결말도 나지 않았다. 그런지 3일이 지난 날 밤중에 김서룡의 집 담 안으로 무엇을 던지는 소리가 나므로 불을 켜 조사해 보니 바로 불아함(佛牙函)이었다. 함은 본래 속 한 겹은 심향합(沈香合)이고 다음 겹은 순금합(純金合)이고 그 다음 바깥 겁은 백은함(白銀函)이고, 다음 바깥 겁은 유리함이고, 그 다음 겹은 나전함(螺鈿函)으로 각 함(各函)의 폭은 서로 꼭 맞게 되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만 유리함뿐이었다. 김서룡은 찾은 것이 기뻐서 대궐로 들어가 아뢰었다. 그러나 유사(有司)는 죄를 의논하여 김서룡과 어불당(御佛堂)과 경령전(景靈殿)의 수직하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 하니 진양부(晉陽府)에서 아뢰었다. "불사(佛事)로 인하여 사람을 많이 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모두 죽음을 면했다. 다시 십원전(十員殿) 안뜰에 특별히 불아전(佛牙殿)을 지어서 불아함(佛牙函)을 모시게 하고 장사(將士)들을 시켜 지키게 했다. 길일(吉日)을 가려서 신효사(神孝寺)의 상방(上房) 온광(蘊光)을 청해다가 승도(僧徒) 30명을 거느리고 궁중에 들어가 재를 올려 정성을 드리도록 했다. 그날 입직(入直)했던 승선(承宣) 최홍(崔弘)과 상장군(上將軍) 최공연(崔公衍)·이영장(李令長)과 내시(內侍)·다방(茶房) 관원들은 대궐 뜰에서 왕을 모시고 서서 차례로 불아함(佛牙函)을 머리에 이고 정성을 드렸는데 불아함 구멍 사이에 있는 사리는 그 수를 알지 못할 만큼 많았다. 진양부(晉陽府)에서는 백은(白銀) 상자에 그것을 담아 모셨다. 이때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불아(佛牙)를 잃은 후로 스스로 네 가지 의심이 생겼었소. 첫째 의심은, 천궁(天宮)의 7일 기한이 차서 하늘로 올라갔을까 하는 것이고. 둘째 의심은 국난(國亂)이 이러하니, 불아는 신물(神物)이므로 인연이 있는 무사(無事)한 나라로 옮겨 간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오. 셋째 의심은, 재물을 탐낸 소인(小人)이 그 상자를 도둑질하고 불아는 구렁에 버렸으리라는 것이오. 넷째 의심은, 도둑이 보물을 훔쳐가기는 했으나 이것을 드러낼 수가 없어서 집 속에 감추어 두었으리라는 것이었는데 이제 네 번째 의심이 맞았소"하고 이내 소리를 내어 크게 우니 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헌수(獻壽)하는데, 심지어 이마와 팔을 불에 태우는 사람도 있어서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 실록(實錄)은 당시 내전(內殿)에서 향(香)을 피우며 기도하던, 전지림사(前祗林寺) 대선사(大禪師) 각유(覺猷)에게서 얻은 것이니, 그는 자기가 친히 본 것이라면서 날더러 기록하라고 했다.

또 경오년(庚午年[1270])에 강화(江華)에서 환도(還都)할 때의 난리는 몹시 심하여 임진년(壬辰年)보다도 더했다. 십원전(十員殿)의 감주(監主)인 선사(禪師) 심감(心鑑)은 자기의 위태로움을 잊고 불아함을 가지고 나와 도둑의 난리에서 화를 면하게 하였다. 이 사실을 대궐에 알리니 왕은 그 공을 크게 칭찬하고 이름 있는 절로 옮겨 살게 하여 지금 빙산사(빙山寺)에 살고 있다. 이것도 역시 각유(覺猷)에게서 친히 들은 것이다.

진흥왕(眞興王) 때인 천가(天嘉) 6년 을유(乙酉[565])에 진(陳)나라에서는 유사(劉思)와 중 명관(明觀)을 시켜 불경(佛經)·논(論) 1,700여 권을 보내왔으며, 정관(貞觀) 17년(643)에는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삼장(三藏) 400여 상자를 싣고 돌아와서 통도사(通度寺)에 안치했다. 흥덕왕(興德王) 때인 태화(太和) 원년 정미(丁未[ 827])에는 당(唐)에 간 학승(學僧)인 고구려 중 구덕(丘德)이 불경(佛經) 몇 상자를 가지고 오니 왕은 여러 절의 승도(僧徒)들과 함께 나가서 흥륜사(興輪寺) 앞길에 가서 맞이했다. 대중(大中) 5년(851)에는 당나라에 보낸 사신 원홍(元弘)이 불경(佛經) 몇 축(軸)을 가지고 왔고, 나말(羅末)에 보요선사(普耀禪師)가 두 번이나 오월국(吳越國)에 가서 대장경(大藏經)을 싣고 왔으니, 그는 곧 해룡왕사(海龍王寺)의 개산조(開山祖)이다.

송(宋)나라 원우(元祐) 갑술년(甲戌年[1094])에 어떤 사람이 선사(禪師)의 진영(眞影)을 찬(讚)해 말했다.

거룩도 해라, 개조(開祖) 스님이시여!
우뚝 빼어났구나 저 참 모습이.
두 번이나 오월(吳越)에 가,
대장경(大藏經)을 가지고 오는 데 성공했네.
보요(普耀)라는 직함을 하사하시고,
네 번이나 조서(詔書)를 내리셨으니,
만일 그의 덕을 묻거든,
밝은 달 맑은 바람과 같다 하겠네.

또 대정(大定) 연간(1161∼1189)에 한남 관기(漢南管記) 팽조적(彭祖적)이 시(詩)를 지어 남겼다.

물과 구름 조용한 절에 부처님 계신데,
더구나 신룡(神龍)이 한 지경을 보호하네.
마침내 이 좋은 절 어느 누가 이어받을까,
처음 불교는 남쪽에서 전해왔네.

발문(跋文)이 있는데 이러하다.

옛날 보요선사(普耀禪師)가 처음으로 남월(南越)에서 대장경(大藏經)을 구해 가지고 돌아오는데 바닷바람이 갑자기 일더니 조각배가 물결 사이에서 뒤집힐 것 같았다. 선사는 말하기를, "이것은 신룡(神龍)이 대장경을 여기에 머물러 두려는 것이 아닐까"하고 드디어 주문(呪文)으로 정성껏 축원하여 용(龍)까지 함께 받들고 돌아오니, 바람도 자고 물결도 가라앉았다. 본국에 돌아오자 산천(山川)을 두루 구경하면서 대장경을 안치할 곳을 구하다가 이 산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상서로운 구름이 산 위에서 일어나는 곳을 보고 이에 수제자(首弟子) 홍경(弘慶)과 함께 연사(蓮社)를 세웠으니, 불교가 동방으로 전해 온 것은 실로 이때에 시작된 것이었다.

한남 관기(漢南管記) 팽조적(彭祖적)은 제(題)한다.

이 해룡왕사(海龍王寺)에는 용왕당(龍王堂)이 있는데 자못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많았다. 당시 용왕은 대장경(大藏經)을 따라와서 여기에 머물러 있었는데, 용왕당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또 천성(天成) 3년 무자(戊子[928])에 묵화상(默和尙)이 당에 들어가 역시 대장경을 가지고 왔으며, 본조(本朝) 예종(睿宗) 때에는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조서를 받들고 중국으로 유학가서 요본(遼本) 대장경 3부(部)를 사 가지고 왔는데, 그 한 본(本)은 지금 정혜사(定惠寺)에 있다[해인사海印寺에 한 본本이 있고 허참정許參政댁에 한 본本이 있다].

대안(大安) 2년(1086) 본조(本朝) 선종(宣宗) 때에는 우세승통(祐世僧統) 의천(義天)이 송(宋)나라에 들어가서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많이 가지고 왔으며, 이 밖에도 서적에 실리지 않은 고승(高僧)과 신사(信士)들이 왕래하면서 가지고 온 것은 이루 자세히 기록할 수가 없다. 대체로 불교가 동방으로 전해 오는 데는 그 앞길이 양양(洋洋)했으니 경사스러운 일이다.

찬(讚)해 말한다.

중국과 동방은 오히려 연기로 막혔고,
녹원(鹿苑)의 학수(鶴樹)는 2,000년이네.
이 땅에 전해 오니 참으로 하례할 일이라,
동진(東震)과 서건(西乾)이 한 세상 되었네.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의상전(義湘傳)을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의상은 영휘(永徽) 초년(650)에 당나라에 들어가 지엄선사(智儼禪師)를 뵈었다"한다. 그러나 부석사(浮石寺) 본비(本碑)에 의하면, "의상은 무덕(武德) 8년(625)에 태어나 어려서 중이 되었다. 영휘(永徽) 원년 경술(庚戌[650])에 원효(元曉)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려고 고구려에 갔다가 어려운 일이 있어서 그대로 돌아갔다. 용삭(龍朔) 원년 신유(辛酉[661])에 당에 들어가 지엄법사에게 배웠다. 총장(總章) 원년(668)에 지엄법사가 죽자 함형(咸亨) 2년(671)에 의상은 신라로 돌아와 장안(長安) 2년 임인(壬寅[702])에 죽으니 나이 78세였다"했다. 그렇다면 지엄과 함께 선율사(宣律師)가 있는 곳에서 재를 올리고, 천궁(天宮)의 불아(佛牙)를 청하던 일은 신유(辛酉[661])에서 무진(戊辰[668])까지의 7, 8년 사이가 될 것이다. 본조(本朝) 고종(高宗)이 강화(江華)로 옮기던 임진년(壬辰年[1232])에 천궁의 7일 기한이 다 찼다고 의심한 것은 잘못된 것이니, 도리천(도利天)의 1주야는 인간(人間) 100세에 해당되는 것이다.

또 의상이 처음 당에 갔던 신유년(辛酉年[661])에서부터 계산하여 본조(本朝) 고종(高宗) 임진(壬辰[1232])까지는 693년이니 경자년(更子年[1240])에 이르러야 비로서 700년이 차며, 7일 기한도 차는 것이다. 환도(還都)하던 지원(至元) 7년 경오(庚午[1270])까지는 730년이니, 만일 천제(天帝)의 말과 같이 7일 후에 천궁(天宮)으로 돌아갔다고 하면 심감선사(心鑑禪師)가 환도(還都)할 때 가져다 바친 것은 필시 진짜 불아(佛牙)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해 봄 환도(還都)하기 전에 왕은 대궐 안 제종(諸宗)의 이름난 중들을 모아서 불아와 사리를 빌어 구하여 비록 정성과 부지런함을 다했지만 하나도 얻지 못했으니, 필경 7일 기한이 차서 하늘로 올라간 듯 싶다. 지원(至元) 21년 갑신(甲申[1284])에 국청사(國淸寺)의 금탑(金塔)을 보수(補修)하고 충렬왕(忠烈王)은 장목왕후(莊穆王后)와 함께 묘각사(妙覺寺)에 거둥하여 신도(信徒)의 무리들을 모아 경하(慶賀)하고 찬미(讚美)했다. 이것이 끝나자 심감(心鑑)이 바친 불아와 낙산(落山)의 수정염주(水精念珠)와 여의주(如意珠)를 군신(君臣)과 여러 신도(信徒)들이 모두 쳐다보고 경배한 뒤에 함께 금탑(金塔) 안에 안치했다.

나도 역시 이 모임에 참석해서 이른바 불아라고 하는 것을 친히 보았는데 그 길이는 세 치 가량 되고 사리는 없었다. 무극(無極)은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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