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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貞觀) 17년 계묘(癸卯[643]) 16일에 자장법사는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佛經)·불상(佛像)·가사(袈裟)·폐백(幣帛) 등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탑 세울 일을 임금에게 아뢰자 선덕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 일을
의논하니 신하들은 말하기를, "백제에서 공장이를 청해 데려와야 되겠습니다."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에 가서 청해 오게 했다.
이리하여 아비지(阿非知)라고 하는 공장이가 명을 받고 와서 나무와 돌을 재고, 이간(伊干) 용춘(龍春[혹은 용수龍樹])이 그 역사를 주관하는데
거느리고 일한 소장(小匠)들은 200 명이나 되었다.
처음에 절의 기둥을 세우던 날에 공장이는 꿈에 본국인 백제가 멸망하는 모양을 보았다.
공장이는 마음 속에 의심이 나서 일을 멈추었더니,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며 어두워지는 가운데 노승(老僧) 한 사람과 장사(壯士) 한
사람이 금전문(金殿門)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는 중과 장사는 모두 없어지고 보이지 않았다. 공장이는 일을 멈춘 것을 후회하고 그
탑을 완성시켰다. ≪찰주기(刹柱記)≫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가 42척, 철반 이하는
183척이다." 자장이 오대산에서 받아 가져온 사리(舍利) 100알을 탑 기둥 속과, 통도사(通度寺) 계단(戒壇)과 또
대화사(大和寺) 탑에 나누어 모셨으니, 이것은 못에 있는 용의 청에 따른 것이다[대화사大和寺는 아곡현阿曲縣 남쪽에 있다. 지금의
울주蔚州이니 역시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세운 것이다]. 탑을 세운 뒤에 천하가 형통하고 삼한(三韓)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이
아니겠는가. 그 뒤에 고려왕이 신라를 칠 계획을 하다가 말했다. "신라에는 세 가지 보배가 있어 침범할 수 없다고 하니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황룡사(皇龍寺) 장륙존상(丈六尊像)과 구층탑(九層塔), 그리고 진평왕(眞平王)의
천사옥대(天賜玉帶)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고려왕은 그 침범할 계획을 그만두었다. 주(周)나라에 구정(九鼎)이 있어서
초(楚)나라 사람이 감히 주나라를 엿보지 못했다고 하니 이와 같은 따위일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귀신의 힘으로 한 듯이 제경(帝京)을
누르니,
휘황한 채색으로 처마가 움직이네.
여기에 올라 어찌 구한(九韓)의 항복만을
보랴,
건곤(乾坤)이 특별히 편안한 것 처음
깨달았네.
또 해동(海東)의 명현(名賢) 안홍(安弘)이 지은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는
이런 말이 있다. "신라 제 27대에는 여자가 임금이 되니 비록 올바른 도리는 있어도 위엄이 없어서 구한(九韓)이 침범하는 것이다.
만일 대궐 남쪽 황룡사(皇龍寺)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가 침범하는 재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 제1층은
일본(日本),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제4층은 탁라(托羅), 제5층은 응유(鷹遊), 제6층은 말갈(靺鞨), 제7층은
거란(契丹), 제8층은 여진(女眞), 제9층은 예맥(穢貊)을 진압시킨다."
또 ≪국사(國史)≫ 및 ≪사중고기(寺中古記)≫를 상고하면,
"진흥왕(眞興王) 14년 계유(癸酉[553])에 황룡사(皇龍寺)를 처음 세운 후에 선덕왕(善德王) 때인 정관(貞觀) 19년 을사(乙巳[
645])에 탑이 처음 이루어졌다. 제32대 효소왕(孝昭王)이 즉위한 7년 성력(聖歷) 원년 무술(戊戌[698]) 6월에 절이 벼락을
맞았다[≪사중고기寺中古記≫에는 성덕왕善德王 때라 했으나 잘못이다. 성덕왕 때에는 무술년이 없다]. 제33대
성덕왕 경신(庚申[720])에 다시 이 절을 세웠으나 제 48대 경문왕(景文王) 무자(戊子[868]) 6월에 두 번째 벼락을 맞았으며, 같은
임금 때에 세 번째로 중수(重修)하였다. 본조 (本朝) 광종(光宗)의 즉위 5(4)년 계축(癸丑[953]) 10월에는 세
번째 벼락을 맞았고, 현종(顯宗) 13년 신유(辛酉[1021])에 네 번째 중수(重修)했다. 또 정종(靖宗) 2(元)년 을해(乙亥[
1035])에 네 번째 벼락을 맞았는데 이것을 문종(文宗) 갑진(甲辰[1064])에 다섯 번째 중수(重修)했더니 또 헌종(憲(獻)宗) 말년
을해(乙亥[1095])에 다섯 번째 벼락을 맞았다. 숙종(肅宗) 원년 병자(丙子[1096])에 여섯 번째로 중수했더니, 또
고종(高宗) 16년 무술(戊戌[1238]) 겨울에 몽고(蒙古)의 병화(兵火)로 탑과 장륙존상(丈六尊像)과 절의 전우(殿宇)가 모두 재앙을
입었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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