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pia 삼국유사Home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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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卷第一
紀異 第一 上
古朝鮮 원문국역문
魏滿朝鮮 원문국역문
馬韓 원문국역문
二府 원문국역문
七十二國 원문국역문
樂浪國 원문국역문
北帶方 원문국역문
南帶方 원문국역문
靺鞨 渤海 원문국역문
伊西國 원문국역문
五伽耶 원문국역문
北扶餘 원문국역문
東扶餘 원문국역문
高句麗 원문국역문
卞韓 百濟 원문국역문
辰韓 원문국역문
又四節遊宅 원문국역문
新羅始祖 赫居世王 원문국역문
第二南解王 원문국역문
第三弩禮王 원문국역문
第四脫解王 원문국역문
金閼智 脫解王代 원문국역문
延烏郎 細烏女 원문국역문
未鄒王 竹葉軍 원문국역문
奈勿王 金堤上 원문국역문
第十八實聖王 원문국역문
射琴匣 원문국역문
智哲老王 원문국역문
眞興王 원문국역문
桃花女 鼻荊郞 원문국역문
天賜玉帶 원문국역문
善德王知幾三事 원문국역문
眞德王 원문국역문
金庾信 원문국역문
太宗春秋公 원문국역문
長春郎 罷郎 원문국역문
三國遺事卷第二
紀異 第二 下
文虎王法敏 원문국역문
萬波息笛 원문국역문
孝昭王代 竹旨郞 원문국역문
聖德王 원문국역문
水路夫人 원문국역문
孝成王 원문국역문
景德王 忠談師 表訓大德 원문국역문
惠恭王 원문국역문
元聖大王 원문국역문
早雪 원문국역문
興德王 鸚 원문국역문
神武大王 閻長 弓巴 원문국역문
四十八景文大王 원문국역문
處容郎 望海寺 원문국역문
眞聖女大王 居陁知 원문국역문
孝恭王 원문국역문
景明王 원문국역문
景哀王 원문국역문
金傅大王 원문국역문
南扶餘 前百濟 北扶餘已見上 원문국역문
武王 원문국역문
後百濟 甄萱 원문국역문
駕洛國記 원문국역문
居登王 원문국역문
麻品王 원문국역문
居叱彌王 원문국역문
伊尸品王 원문국역문
坐知王 원문국역문
吹希王 원문국역문
銍知王 원문국역문
鉗知王 원문국역문
仇衡王 원문국역문
三國遺事卷第三
興法第三
順道肇麗 원문국역문
難陁闢濟 원문국역문
阿道基羅 원문국역문
原宗興法 厭髑滅身 원문국역문
法王禁殺 원문국역문
寶藏奉老 普德移庵 원문국역문
東京興輪寺金堂十聖 원문국역문
塔像第四
迦葉佛宴坐石 원문국역문
遼東城育王塔 원문국역문
金官城婆娑石塔 원문국역문
高麗靈塔寺 원문국역문
皇龍寺丈六 원문국역문
皇龍寺九層塔 원문국역문
皇龍寺鐘 芬皇寺藥師 奉德寺鍾 원문국역문
靈妙寺丈六 원문국역문
四佛山 掘佛山 萬佛山 원문국역문
生義寺石彌勒 원문국역문
興輪寺壁畵普賢 원문국역문
三所觀音 衆生寺 원문국역문
栢栗寺 원문국역문
敏藏寺 원문국역문
前後所將舍利 원문국역문
彌勒仙花 未尸郎 眞慈師 원문국역문
南白月二聖 努肹夫得 怛怛朴朴 원문국역문
芬皇寺千手大悲 盲兒得眼 원문국역문
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 원문국역문
魚山佛影 원문국역문
臺山五萬眞身 원문국역문
溟州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 원문국역문
臺山月精寺五類聖衆 원문국역문
南月山 원문국역문
天龍寺 원문국역문
鍪藏寺彌陁殿 원문국역문
伯嚴寺石塔舍利 원문국역문
靈鷲寺 원문국역문
有德寺 원문국역문
五臺山文殊寺石塔記 원문국역문
三國遺事 卷第四
義解 第五
圓光西學 원문국역문
寶壤梨木 원문국역문
良志使錫 원문국역문
歸竺諸師 원문국역문
二惠同塵 원문국역문
慈藏定律 원문국역문
元曉不覊 원문국역문
義湘傳敎 원문국역문
虫也福不言 원문국역문
眞表傳簡 원문국역문
關東楓岳鉢淵藪石記 원문국역문
勝詮髑髏 원문국역문
心地繼祖 원문국역문
賢瑜珈 海華嚴 원문국역문
三國遺事 卷第五
神咒 第六
密本摧邪 원문국역문
惠通降龍 원문국역문
明朗神印 원문국역문
感通 第七
仙桃聖母隨喜佛事 원문국역문
郁面婢念佛西昇 원문국역문
廣德 嚴莊 원문국역문
憬興遇聖 원문국역문
眞身受供 원문국역문
月明師兜率歌 원문국역문
善律還生 원문국역문
金現感虎 원문국역문
融天師彗星歌 眞平王代 원문국역문
正秀師救氷女 원문국역문
避隱 第八
朗智乘雲 普賢樹 원문국역문
緣會逃名 文殊岾 원문국역문
惠現求靜 원문국역문
信忠掛冠 원문국역문
包山二聖 원문국역문
永才遇賊 원문국역문
勿稽子 원문국역문
迎如師 원문국역문
布川山 五比丘 景德王代 원문국역문
念佛師 원문국역문
孝善 第九
眞定師孝善雙美 원문국역문
大城孝二世父母 神文代 원문국역문
向得舍知割股供親 景德王代 원문국역문
孫順埋兒 興德王代 원문국역문
貧女養母 원문국역문
跋文 원문국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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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三國遺事 卷第二紀異 第二 > 後百濟 甄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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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

≪삼국사(三國史)≫ 본전(本傳)에 보면 이러하다. 견훤(甄萱)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으로, 함통(咸通) 8년 정해(丁亥[867])에 났다. 근본 성(姓)은 이(李)였는데 뒤에 견(甄)으로 씨(氏)를 고쳤다. 아버지 아자개(阿慈개)는 농사지어 생활했었는데, 광계(光啓) 연간에 사불성(沙弗城[지금의 상주尙州)]에 웅거하여 스스로 장군(將軍)이라 했다. 아들이 넷이 있어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는데 그 중에 견훤(甄萱)은 남보다 뛰어나고 지략(智略)이 많았다.

≪이제가기(李제家記)≫에 보면 이렇게 말했다. 진흥대왕(眞興大王)의 비(妃) 사도(思刀)의 시호는 백융부인(白융夫人)이다. 그 셋째아들 구륜공(仇輪公)의 아들 파진간(波珍干) 선품(善品)의 아들 각간(角干) 작진(酌珍)이 왕교파리(王咬巴里)를 아내로 맞아 각간 원선(元善)을 낳으니 이가 바로 아자개이다. 아자개의 첫째부인은 상원부인(上院夫人)이요, 둘째부인은 남원부인(南院夫人)으로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으니 그 맏아들이 상부(尙父) 훤(萱)이요, 둘째아들이 장군 능애(能哀)요, 셋째아들이 장군 용개(龍盖)요, 넷째아들이 보개(寶盖)요, 다섯째아들이 장군 소개(小盖)이며, 딸이 대주도금(大主刀金)이다.

또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부자 한 사람이 있어 모양이 몹시 단정했다. 딸이 아버지께 말하기를 "밤마다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와서 관계하고 갑니다"하자 아버지는 "너는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꽂아 두어라"하여 그 말대로 시행했다. 날이 밝아 그 실이 간 곳을 찾아보니 북쪽 담 밑에 있는 큰 지렁이 허리에 꽂혀 있다. 이로부터 태기가 있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甄萱)이라 일컬었다. 경복(景福) 원년(元年) 임자(壬子[892])에 이르러 왕이라 일컫고 완산군(完山郡)에 도읍을 정했다. 나라를 다스린지 43년 청태(淸泰) 원년(元年) 갑오(甲午[934])에 견훤의 세 아들 즉 신검(神劒)·용검(龍劒)·양검(良劒)이 즉위하여 천복(天福) 원년(元年) 병신(丙申[936])에 고려 군사와 일선군(一善郡)에서 싸워서 패하니 후백제(後百濟)는 아주 없어졌다.

처음에 견훤이 나서 포대기에 싸였을 때, 아버지는 들에서 밭을 갈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밥을 가져다 주려고 아이를 수풀 아래 놓아 두었더니 범이 와서 젖을 먹이니 마을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이상하게 여겼다. 아이가 장성하자 몸과 모양이 웅장하고 기이했으며 뜻이 커서 남에게 얽매이지 않고 비범했다. 군인이 되어 서울로 들어갔다가 서남의 해변으로 가서 변경을 지키는데 창을 베개삼아 적군을 지키니 그의 기상(氣象)은 항상 사졸(士卒)에 앞섰으며 그 공로로 비장(裨將)이 되었다. 당(唐)나라 소종(昭宗) 경복(景福) 원년(元年)은 신라 진성왕(眞聖王)의 재위 6년이다. 이때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곁에 있어서 국권(國權)을 농간하니 기강(紀綱)이 어지럽고 해이하였으며, 기근(饑饉)이 더해지니 백성들은 떠돌아다니고 도둑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견훤은 남몰래 반역할 마음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울의 서남 주현(州縣)들을 공격하니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호응하여 한 달 동안에 무리는 5,000이나 되었다. 드디어 무진주(武珍州)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감히 공공연하게 왕이라 일컫지는 못하고 스스로 신라서남도통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국개국공(新羅西南都統 行全州刺史 兼 御史中承上柱國 漢南國開國公)이라 했으니 용화(龍化) 원년(元年) 기유(己酉[889])였다. 이것을 혹 경복(景福) 원년(元年) 임자(壬子[892])의 일이라고도 한다.

이때 북원(北原)의 오둑 양길(良吉)의 세력이 몹시 웅대하여 궁예(弓裔)는 자진해서 그 부하가 되었다.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멀리 양길에게 직책을 주어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견훤이 서쪽으로 순행(巡行)하여 완산주(完山州)에 이르니 고을 백성들이 영접하면서 위로했다. 견훤은 민심을 얻은 것이 기뻐서 좌우 사람들에게 말했다. "백제가 나라를 시작한 지 600여 년에 당나라 고종(高宗)은 신라의 요청으로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서 수군(水軍) 13만 명이 바다를 건너오고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은 있는 군사를 거느리고 황산(黃山)을 거쳐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으니 어찌 감히 도읍을 세워 옛날의 분함을 씻지 않겠는가." 드디어 스스로 후백제 왕이라 일컫고 벼슬과 직책을 나누었으니 이는 당나라 광화(光化) 3년이요 신라 효공왕(孝恭王) 4년(900)이다.

정명(貞明) 4년 무인(戊寅[918])에 철원경(鐵原京)의 민심이 졸지에 변하여 우리 태조(太祖)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니 견훤은 이 소식을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서 경하(慶賀)하고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智異山)의 죽전(竹箭) 등을 바쳤다. 견훤은 우리 태조에게 겉으로는 화친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시기하였다. 그는 태조에게 총마(총馬)를 바치더니 3년 겨울 10월에는 기병(騎兵) 3,000을 거느리고 조물성(曹物城[지금의 어딘지 자세히 알 수 없음])까지 오자 태조(太祖)도 역시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와서 싸웠으나 견훤의 군사가 날래어 승부(勝負)를 결단할 수가 없었다. 이에 태조는 일시적으로 화친하여 견훤의 군사들이 피로하기를 기다리려고 글을 보내서 화친할 것을 요구하고 종제(從弟) 왕신(王信)을 인질로 보내니 견훤도 역시 그 사위 진호(眞虎)를 보내서 교환했다. 12월에 견훤은 거서(居西[지금의 어딘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등 20여 성을 쳐서 차지하고 사자를 후당(後唐)에 보내서 번신(藩臣)이라 일컬으니 후당에서는 그에게 검교태위 겸 시중판백제군사(檢校太尉 兼 侍中判百濟軍事)의 벼슬을 주고, 전과 같이 도독행전주자사 해동서면도통지휘병마판치등사 백제왕(都督行全州刺史 海東西面都統指揮兵馬判置等事 百濟王)이라 하고 식읍(食邑) 2,500호를 주었다. 4년에 진호가 갑자기 죽자 견훤은 일부러 죽인 것이라고 의심해서 즉시 왕신을 가두고 사람을 보내서 전년에 보낸 총마를 돌려보내라고 하니 태조는 웃고 그 말을 돌려보냈다. 천성(天成) 2년 정해(丁亥[927]) 9월에 견훤은 근품성(近品成[ 지금의 산양현山陽縣])을 쳐 빼앗아 불을 질렀다. 이에 신라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자 태조는 장차 군사를 내려는데 견훤은 고울부(高鬱府[지금의 울주蔚州])를 쳐서 취하고 족시림(族始林[혹은 계림鷄林 서쪽 들이라고 했다])으로 진군하여 졸지에 신라 서울로 들어갔다. 이때 신라 왕은 부인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 나가 놀고 있었으므로 더욱 쉽게 패했다. 견훤은 왕의 부인을 억지로 끌어다가 욕보이고 왕의 족제(族弟) 김부(金傅)로 왕위를 잇게 한 뒤에 왕의 아우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英景)을 사로잡고, 나라의 귀한 보물과 무기와 자제(子弟)들, 그리고 여러 가지 공인(工人) 중에 우수한 자들을 모두 데리고 갔다. 태조는 정예(精銳)한 기병(騎兵) 5,000을 거느리고 공산(公山) 아래에서 견훤을 맞아서 크게 싸웠으나 태조의 장수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은 죽고 모든 군사가 패했으며, 태조만이 겨우 죽음을 면했을 뿐 대항하지 못했기 때문에 견훤은 많은 죄악을 짓게 되었다. 견훤은 전쟁에 이긴 기세를 타서 대목성(大木城)과 경산부(京山府)와 강주(康州)를 노략하고 부곡성(缶谷城)을 공격했는데 의성부(義成府)의 태수(太守) 홍술(洪述)은 대항해 싸우다가 죽었다. 태조는 이 소식을 듣고 말했다. "나는 오른손을 잃었다."

42년 경인(庚寅: 930)에 견훤은 고창군(古昌郡[지금의 안동부安東府])을 치려고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석산(石山)에 영채를 마련하니 태조는 백보(百步) 가량을 공격해서 고을 북쪽 병산(甁山)에 영채를 마련했다. 여러 번 싸웠으나 견훤이 패하여 시랑(侍郞) 김악(金渥)이 사로잡혔다. 다음날 견훤이 군사를 거두어 순주성(順州城)을 습격하니 성주(城主) 원봉(元逢)은 막지 못하고 성을 버리고 밤에 도망했다. 태조는 몹시 노하여 그 고을을 낮추어 하지현(下枝縣[지금의 풍산현豊山縣. 원봉元逢이 본래 순주성順州城 사람인 까닭이다])을 삼았다.

신라(新羅)의 군신(君臣)들은 망해 가는 세상에 다시 일어날 수가 없으므로 우리 태조를 끌어들여 좋은 의(誼)를 맺어서 자기들을 후원해 주도록 했다.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또다시 신라 서울에 들어가 나쁜 짓을 하려 하는데, 태조가 먼저 들어갈까 두려워해서 태조에게 편지를 보냈다. "전일에 국상(國相) 김웅렴(金雄廉) 등이 장차 그대를 서울로 불러들이려 한 것은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호응하는 것과 같으며, 종달새가 매의 죽지를 찢으려 드는 것과 같으니, 반드시 백성들을 도탄(塗炭)에 빠뜨리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빈 터전으로 만들 것이오. 나는 이 때문에 먼저 조적(祖적)의 채찍을 가지고 홀로 한금호(韓擒虎)의 도끼를 휘둘러 백관(百官)들에게 맹세하기를 백일(白日)과 같이 했고, 육부(六部)를 의리 있는 풍도로 설유(說諭)했더니 뜻밖에 간신(奸臣)은 도망하고 임금[경애왕景哀王]은 세상을 떠났소. 이에 경명왕(景明王)의 외종제(外從弟)인 헌강왕(憲康王)의 외손(外孫)을 받들어 왕위에 오르게 해서 위태로운 나라를 다시 세우고 없는 임금을 다시 있게 만들었소. 그런데 그대는 내 충고(忠告)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한갓 흘러 다니는 말만을 듣고 온갖 계교로 왕위를 엿보고 여러 가지로 나라를 침노했으나 오히려 내가 탄 말의 머리도 보지 못했고 내 쇠털 하나도 뽑지 못했소. 이 겨울 초순에는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星山)의 진(陣) 밑에서 손을 묶어 항복했고, 또 이달 안에는 좌장(左將) 김락(金樂)이 미리사(美利寺) 앞에서 전사(戰死)했소. 이밖에 죽인 것도 많고 사로잡은 것도 적지 않았소. 그 강하고 약한 것이 이와 같으니 이기고 질 것은 알 만한 일이오. 내가 바라는 일은 활을 평양성(平壤城) 문루(門樓)에 걸고 말에게 패강(浿江)의 물을 먹이는 일이오. 그러나 지난달 7일에 오월국(吳越國)의 사신 반상서(班尙書)가 와서 국왕(國王)의 조서(詔書)를 전하기를, '경(卿)은 고려와 오랫동안 좋은 화의(和誼)를 통하고 함께 이웃 나라의 맹약(盟約)을 맺은 줄 알았었소. 그런데 인질로 간 사람이 죽은 것을 보고 드디어 화친(和親)하던 옛 뜻을 잃어버리고 서로 국경을 침범하여 전쟁이 쉬지 않게 되었소. 이제 일부러 사신을 경의 고을로 보내고 또 고려에도 글을 보내어 마땅히 각각 서로 친목해서 길이 평화를 도모하도록 한 것이오.' 내가 생각하는 의리는 왕실을 높이는 데에 독실하고 마음은 큰 나라를 섬기는 데 깊었었소. 이제 오월왕(吳越王)이 조칙(詔勅)을 타이르는 것을 듣고 즉시 받들어 행하고자 하나, 다만 그대가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가 없고 국경에 있으면서도 싸우려는 것을 걱정하는 바요. 이제 그 조서(詔書)를 베껴서 보내는 터이니 청컨대 유의해서 자세히 살피시오. 또 토끼와 사냥개가 다 함께 지치고 보면 마침내는 반드시 남의 조롱을 받는 법이오. 조개와 황새가 서로 버티다가는 역시 남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오. 마땅히 미복(迷復)을 경계하여 후회하는 일을 스스로 불러오지 말도록 하시오."

천성(天成) 2년(927) 정월에 태조는 회답을 보냈다. "오월국(吳越國)의 통화사(通和使) 반상서(班尙書)가 전한 조서(詔書) 한 통을 받들고, 겸하여 그대가 보낸 긴 편지도 받아 보았소. 화초부사(華초膚使)가 조서를 가지고 왔고, 척소호음(尺素好音)과 겸해서 가르침도 받았소. 지검(芝檢)을 받아 비록 감격은 더했지만 편지를 펴 보고 의심스러운 마음을 없애기 어려웠소. 이제 돌아가는 사신에게 부탁하여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려 하오. 나는 위로 하늘의 명령을 받들고 아래로 백성들의 추대에 못 이겨서 외람되이 장수의 직권(職權)을 맡아서 천하를 경륜할 기회를 얻었던 것이오. 저번에 삼한(三韓)이 액운(厄運)을 당하고 모든 국토에 흉년이 들어 황폐해져서 백성들은 모두 황건(黃巾)에 소속되고, 논밭은 적토(赤土)가 아닌 땅이 없었소. 난리의 시끄러움을 그치게 하고 나라의 재앙을 구하려 하여 이에 스스로 선린(善隣)의 우호(友好)를 맺으니 과연 수천 리 되는 국토가 농상(農桑)으로 생업(生業)을 즐기고, 사졸(士卒)은 7,8년 동안 한가롭게 쉬었소. 그러던 것이 계유(癸酉)년 10월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교전(交戰)하게 되었소. 그대가 처음에는 적을 가볍게 여겨 곧장 전진해 와서 마치 당랑(螳螂)이 수레바퀴를 막는 것 같이 하더니, 마침내 어려움을 알고 용감히 물러가서 마치 모기가 산을 짊어진 것과 같이 했소. 그리고 손을 모아 공손한 말로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기를, '오늘 이후로는 길이 화목하며, 혹시라도 이 맹세를 어긴다면 신(神)이 벌을 줄 것이라'하였소. 이에 나도 전쟁을 중지하는 무(武)를 숭상하고 사람을 죽이지 않는 인(仁)을 기약하여 드디어 여러 겹 포위했던 것을 풀어 피로한 군사들을 쉬게 했으며, 인질 보내는 것도 거절하지 않고 다만 백성만을 편안하게 하려 했으니, 이것은 곧 내가 남쪽 사람들에게 큰 덕(德)을 베푼 것이었소. 그런데 맹약(盟約)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흉악한 세력이 다시 일어나 봉채(蜂채)의 독이 생민(生民)을 침해하고 미친 이리와 호랑이가 서울땅을 가로막아 금성(金城)이 군색하고 황옥(黃屋)을 몹시 놀라게 할 줄 어찌 생각했겠소? 큰 의리에 의거해서 주(周)나라 왕실을 높이는 것이 그 누가 환공(桓公)·문공(文公)의 패업(패業)과 같겠는가. 기회를 타서 한(漢)나라를 도모한 것은 오직 왕망(王莽)·동탁(董卓)의 간사함을 볼 뿐이오. 왕의 지극히 높은 지위로서 몸을 굽혀 그대에게 자(子)라고 하게 하여 높고 낮은 차서를 잃게 하였으니 상하(上下)가 모두 조심해서 원보(元輔)의 충순(忠純)이 아니면 어찌 사직(社稷)을 편안케 할 수 있으랴 했소, 나의 마음에는 악한 것이 없고 뜻은 왕실(王室)을 높이는 데 간절하여 장차 조정을 구원해서 나라를 위태로운 데서 구해 내려 했소. 그대는 터럭만한 작은 이익을 보고 천지의 두터운 은혜를 저버려 임금을 죽이고 대궐을 불사르며 대신(大臣)들을 죽이고 사민(士民)을 도륙했소. 궁녀(宮女)들은 잡아서 수레에 실어 가고 보물은 빼앗아서 짐 속에 실었으니 그 흉악함은 걸왕(桀王)·주왕(紂王)보다 더하고 어질지 못함은 경짐승[경]과 올빼미보다 더 심했소. 나는 붕천(崩天)의 원한과 각일(却日)의 깊은 정성으로, 매가 참새를 쫓듯이 국가에 대해 견마(犬馬)의 수고로움을 다하려 했소. 그리하여 두 번째 군사를 일으켜 2년이 지났는데, 육로(陸路)로 진격하는 데는 천둥과 번개처럼 빨리 달렸고, 수로(水路)로 치는 데는 범과 용처럼 용맹스러워 움직이면 반드시 공을 세우고 일을 하는 데 헛일이 없었소. 윤경(尹卿)을 바닷가로 쫓으면 쌓인 갑옷이 산더미 같았고, 추조(雛造)를 성 가에서 잡았을 때에는 시체가 들을 덮었소. 연산군(燕山君)에서는 길환(吉奐)을 군전(軍前)에서 베었고, 마리성(馬利城[아마 이산군伊山郡인 듯싶다]) 가에서는 수오(隨晤)를 깃발 아래서 죽였소. 임존성(任存城[지금의 대흥군大興郡])을 함락시키던 날에는 형적(刑積) 등 수백 명이 목숨을 버렸고, 청천현(淸川縣[ 상주尙州 영내領內의 현縣 이름])을 깨칠 때에는 직심(直心) 등 4, 5 무리가 머리를 바쳤소. 동수(桐藪[지금의 동화사桐華寺])는 깃발만 바라보고 도망해 흩어졌고, 경산(京山)은 구슬을 입에 물고 항복했소. 강주(康州)는 남쪽으로부터 귀순해 왔고, 나부(羅府)는 서쪽에서 와서 소속되었소. 공격하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수복(收復)될 날이 어찌 멀겠소? 반드시 저수(지水)의 영채에서 장이(張耳)의 묵은 원한을 씻고, 오강(烏江) 기슭에서 한왕(漢王)의 한번 승전(勝戰)한 마음을 이룩해서 마침내 바람과 물결을 쉬게 하여 길이 천하를 맑게 할 것이오. 이는 하늘이 돕는 바이니 천명(天命)이 어디로 돌아가겠소? 더구나 오월왕(吳越王) 전하의 덕은 포황(包荒)에도 흡족하고 인(仁)은 어린 백성에게도 깊어 특히 대궐에서 명령을 내려 우리 나라에서 난리를 그치라고 효유하였소. 이미 가르침을 받았으니 어찌 받들어 행하지 않겠소? 만일 그대도 이 조서(詔書)를 받들어 흉악한 싸움을 그친다면, 다만 오월국의 어진 은혜에 보답할 뿐만 아니라 또한 동방(東方)의 끊어진 대(代)도 이을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만일 허물을 고치지 않는다면, 후회해도 미치지 못할 것이오."[이 글은 최치원崔致遠이 지었다]

장흥(長興) 3년(932)에 견훤의 신하 공직(공直)이 용맹스럽고 지략(智略)이 있었는데 태조(太祖)에게로 와서 항복하니 견훤은 공직의 두 아들과 딸 하나를 잡아서 다리 힘줄을 지져서 끊었다. 9월에 견훤은 일길(一吉)을 보내어 수군(水軍)을 이끌고 고려 예성강(禮成江)으로 들어가 3일 동안 머무르면서 염주(鹽州)·백주(白州)·진주(眞州) 등 세 주(州)의 배 100여 척을 빼앗아 불사르고 돌아갔다.

청태(淸泰) 원년(元年) 갑오(甲午[934])에 견훤은 태조가 운주(運州[자세히 알 수 없다])에 주둔해 있다는 말을 듣고 갑옷 입은 군사를 뽑아 욕식(욕食)시켜 빨리 가게 하였는데, 미처 영채에 이르기 전에 장군(將軍) 유금필(庾黔弼)이 강한 기병(奇兵)으로 쳐서 3,000여 명을 목베니 웅진(熊津) 이북(以北)의 30여 성은 이 소문을 듣고 자진해서 항복하였으며, 견훤의 부하였던 술사(術士) 종훈(宗訓)과 의사(醫師) 지겸(之謙), 용장(勇將) 상봉(尙逢)·최필(崔弼) 등도 모두 태조에게 항복했다.

병신(丙申[936])년 정월에 견훤은 그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신라말(新羅末)에 후백제를 세운 지 여러 해가 되어 군사는 북쪽의 고려 군사보다 배나 되는데도 오히려 이기지 못하니 필경 하늘이 고려를 위하여 가수(假手)하는 것 같다. 어찌 북쪽 고려 왕에게 귀순해서 생명을 보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러나 그 아들 신검(神劍)·용검(龍劍)·양검(良劍) 등 세 사람은 모두 응하지 않았다. ≪이제가기(李제家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견훤에게는 아들 아홉이 있으니, 맏이는 신검(神劍), 둘째는 태사(太師) 겸뇌(謙腦), 셋째는 좌승(佐承) 용술(龍述), 넷째는 태사(太師) 총지(聰智), 다섯째는 대아간(大阿干) 종우(宗祐), 여섯째는 이름을 알 수 없고, 일곱째는 좌승(佐承) 위흥(位興), 여덟째는 태사(太師) 청구(靑丘)이며, 딸 하나는 국대부인(國大夫人)이니 모두 상원부인(上院夫人)의 소생(所生)이다." 또 말하기를, "견훤은 처첩(妻妾)이 많아서 아들 10여 명을 두었는데, 넷째아들 금강(金剛)은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아 견훤이 특히 그를 사랑하여 왕위를 전하려 하니 그 형 신검·양검·용검 등이 알고 몹시 근심했다. 이때 양검은 강주도독(康州都督), 용검은 무주도독(武州都督)으로 있고, 홀로 신검만이 견훤의 곁에 있었다. 이찬(伊飡) 능환(能奐)이 사람을 강주와 무주에 보내서 양검 등과 모의했다. 청태(淸泰) 2년 을미(乙未[935]) 3월에 이들은 영순(英順) 등과 함께 신검을 권해서 견훤을 금산(金山) 불당(佛堂)에 가두고 사람을 보내서 금강을 죽이고 신검이 자칭 대왕이라 하고 나라 안의 모든 죄수들을 사면(赦免)해 주었다"고 한다.

처음에 견훤이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멀리 대궐 뜰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므로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묻자 신검이 아버지에게 아뢰었다. "왕께서는 늙으시어 군국(軍國)의 정사(政事)에 어두우시므로 장자(長子) 신검이 부왕(父王)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해서 여러 장수들이 기뻐하는 소리입니다." 조금 후에 아버지를 금산사(金山寺) 불당(佛堂)으로 옮기고 파달(巴達) 등 30 명의 장사(壯士)를 시켜서 지키게 하니, 동요(童謠)에 이렇게 말했다.

가엾은 완산(完山) 아이
아비를 잃어 울고 있네.

당시 견훤은 후궁과 나이 어린 남녀 두 명, 시비(侍婢) 고비녀(古比女), 나인(內人) 능예남(能乂男) 등과 함께 갇혀 있었다. 그러다가 4월에 이르러 견훤은 술을 빚은 뒤에 지키는 장사 30명에게 먹여 취하게 하고는 고려로 도망해 왔다. 이에 태조는 소원보향예(小元甫香乂)·오염(吳琰)·충질(忠質) 등을 보내서 수로(水路)로 가서 맞아오게 했다. 고려에 이르자 태조는 견훤의 나이가 10년 위라고 하여 높여서 상부(尙父)라 하여 남궁(南宮)에 편안히 있게 하고 양주(楊洲)의 식읍(食邑)·전장(田莊)과 노비 40명, 말 아홉 필을 주고, 먼저 항복해 와 있는 신강(信康)으로 아전(衙前)을 삼았다. 견훤의 사위 장군 영규(英規)가 비밀히 그 아내에게 말했다. "대왕께서 나라를 위해서 애쓰신 지 40여 년에 공업(功業)이 거의 이루어지려 하는데 하루아침에 집안 사람의 화(禍)로 나라를 잃고 고려에 따르니, 대체로 정녀(貞女)는 두 남편을 모시지 않고 충신(忠臣)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오. 만일 내 임금을 버리고 반역한 아들[神劍]을 섬긴다면 무슨 낯으로 천하의 의사(義士)들을 본단 말이오. 더구나 고려의 왕공(王公)은 인후근검(仁厚勤儉)하여 민심을 얻었다 하니 이는 아마 하늘의 계시(啓示)로, 필경 삼한(三韓)의 임금이 될 것이니 어찌 글을 올려 우리 임금을 위안하고, 겸해서 왕공에게 은근히 하여 뒷날의 복을 도모하지 않겠소?" 그 아내가 말했다. "당신의 말씀이 바로 저의 뜻입니다." 이에 천복(天福) 원년(元年) 병신(丙申[936]) 2월에 사람을 보내서 태조에게 자기의 뜻을 말했다. "왕께서 의기(義旗)를 드시면 저는 내응(內應)하여 고려 군사를 맞이하겠습니다." 태조는 기뻐하여 사자에게 예물을 후히 주어 보내고 영규에게 치사했다. "만일 그대의 은혜를 입어 한번 합세해서 길에서 막히는 일이 없게 한다면 곧 먼저 장군께 뵙고, 다음에 올라 부인께 절하여, 형으로 섬기고 누님으로 받들어 반드시 끝까지 후하게 보답하겠소. 천지와 귀신은 모두 이 말을 들을 것이오." 6월에 견훤이 태조에게 말했다. "노신(老臣)이 전하께 항복해 온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어 반역한 자식을 죽이기 위한 것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대왕은 신병(神兵)을 빌어 적자난신(賊子亂臣)을 죽이시면 신이 비록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태조가 말했다. "그들을 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 때를 기다리는 것이오." 이에 먼저 태자 무(武)와 장군 술희(述希)에게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10만을 거느려 천안부(天安府)로 나가게 하고, 9월에 태조는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천안(天安)에 이르러 군사를 합하여 일선군(一善郡)으로 진격해 나가니 신검이 군사를 거느리고 막았다. 갑오일(甲午日)에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니 고려 군사는 동북방을 등지고 서남쪽을 향해 진을 쳤다. 태조는 견훤과 함께 군대를 사열하는데, 갑자기 칼과 창 같은 흰 구름이 일어나 적군(敵軍)을 향해 가므로 북을 치고 나가자 후백제의 장군 효봉(孝奉)·덕술(德述)·애술(哀述)·명길(明吉) 등은 고려 군사의 형세가 크고 정돈된 것을 바라보고 갑옷을 버리고 진 앞에 나와 항복했다. 태조는 이를 위로하고 장수가 있는 곳을 물으니 효봉 등은 말한다. "원수(元帥) 신검(神劍)은 중군(中軍)에 있습니다." 태조는 장군 공훤(公萱) 등에게 명하여 삼군을 일시에 진군시켜 협격(挾擊)하니 백제군은 무너져 달아났다. 황산(黃山) 탄현(炭峴)에 이르자 신검은 두 아우와 장군 부달(富達)·능환(能奐) 등 40여 명과 함께 항복했다. 태조는 항복을 받고 나머지는 모두 위로하여 처자(妻子)와 함께 서울로 돌아가도록 허락했다. 태조가 능환(能奐)에게 물었다. "처음에 양검 등과 비밀히 모의하여 대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세운 것은 네 꾀이니, 신하된 의리(義理)에 이래야 마땅하단 말이냐." 능환은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한다. 태조는 명하여 이를 베어라 했다. 신검이 참람되이 왕위를 빼앗은 것은 남의 위협으로, 그의 본심이 아니었으며 또 항복하여 죄를 빌어 특히 그 죽음을 용서하였더니, 견훤은 분하게 여겨 등창이 나서 수일만에 황산(黃山) 불사(佛舍)에서 죽으니 때는 9월 8일이고 나이는 70이었다.

태조는 군령(軍令)은 엄하고 분명해서 군사들이 조금도 범하지 않아 주현(州縣)이 편안하여 늙은이와 어린이가 모두 만세를 불렀다. 태조는 영규(英規)에게, "전왕(前王)이 나라를 잃은 후에 그의 신하된 사람으로서 한 사람도 위로해 주는 이가 없었는데 오직 경(卿)의 내외만이 천리 밖에서 글을 보내서 성의를 보였고, 겸해서 아름다운 명예를 나에게 돌렸으니 그 의리를 잊을 수 없소."하고 좌승(左承)이란 벼슬과 밭 1,000경(頃)을 내리고, 역마(驛馬) 35필을 빌려 주어 가족들을 맞게 했으며 그 두 아들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견훤은 당나라 경복(景福) 원년(元年[892])에 나라를 세워 진(晉)나라 천복(天福) 원년(元年[936])에 이르니, 45년 만인 병신(丙申)년에 망했다.

≪사론(史論)≫에 이렇게 말했다. "신라는 운수가 다하고 올바른 도리를 잃어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이 돌아갈 곳이 없이 되었다. 이에 뭇 도둑이 틈을 타서 일어나서 마치 고슴도치의 털과 같았다. 그 중에서도 강한 도둑은 궁예(弓裔)와 견훤(甄萱) 두 사람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로서 도리어 제 나라를 원수로 삼아 심지어는 선조의 화상(畵像)을 칼로 베었으니 그 어질지 않은 것이 너무 심했다. 견훤은 신라의 백성으로 태어나서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 화심(禍心)을 품어 나라의 위태로움을 기화로 신라의 도읍을 쳐서 임금과 신하를 마치 짐승처럼 죽였으니 참으로 천하의 원흉(元兇)이다. 때문에 궁예는 그 신하에게서 버림을 당했고, 견훤은 그 아들에게서 화(禍)가 생겼으니 모두 스스로 취한 것인데 누구를 원망한단 말인가. 비록 항우(項羽)·이밀(李密)의 뛰어난 재주로도 한(漢)과 당(唐)이 일어나는 것을 대적하지 못했거늘, 하물며 궁예와 견훤 같은 흉한 자들이 어찌 우리 태조를 대항할 수 있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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