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군(扶餘郡)은 전 백제(百濟)의 도읍이니, 혹 소부리군(所夫里郡)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백제의 성왕(聖王) 26년 무오(戊午) 봄에 도읍을 사자(泗차)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했다" 하고, 주(注)에 "그 지명(地名)은 소부리(所夫里)이니 사자(泗차)는 지금의 고성진(古省津)이요 소부리는 부여의 딴
이름이다" 했다.
또 양전장부(量田帳簿)에 의하면, "소부리군은 농부의 주첩(柱貼)이다" 했으니 지금 말하는
부여군이란 옛 이름을 되찾은 셈이다. 백제 왕의 성(姓)이 부씨(扶氏)였으므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혹 여주(餘州)라고도 말하는 것은, 군(郡)의 서쪽에 있는 자복사(資福寺) 고좌(高座)에
수놓은 장막이 있는데 그 수놓은 글에 말하기를, "통화(統和) 15년 정유(丁酉[997]) 5월 일 여주 공덕대사(功德大寺)의
수장(繡帳)이다" 했다. 또 옛날에는 하남(河南)에 임주자사(林州刺史)를 두었는데 그때 도적(圖籍) 중에 여주라는 두 글자가 있었으니
임주(林州)는 지금의 가림군(佳林郡)이고 여주는 지금의 부여군이다.
≪백제지리지(百濟地理志)≫에는 ≪후한서(後漢書)≫에 있는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했다. '삼한(三韓)이 대개 78개 국인데 백제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
≪북사(北史)≫에는 이렇게 말했다. '백제(百濟)는 동쪽으로는
신라(新羅)에 접하고 서남쪽은 큰 바다에 접하며, 북쪽은 한강(漢江)을 경계로 했다. 그 도읍은 거발성(居拔城) 또는
고마성(固麻城)이라고 하며, 이 밖에 다시 오방성(五方城)이 있다.'
≪통전(通典)≫에는 이렇게 말했다. '백제는 남쪽으로 신라에 접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았다.'
≪구당서(舊唐書)≫에서는 또 이렇게 말했다. '백제는 부여의 딴
종족이다. 동북쪽은 신라이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서 월주(越州)에 이르며 남쪽은 바다를 건너서 왜국에 이르고, 북쪽은 고구려이다.
그 왕이 거처하는 곳에 동서(東西)의 두 성이 있다.'
≪신당서(新唐書)≫를 보면 이러하다. '백제는 서쪽으로 월주(越州)와
경계를 이루고, 남쪽은 왜국인데 모두 바다를 건너게 된다. 북쪽은 고구려이다.'
≪삼국사(三國史)≫ 본기(本紀)에는 이렇게 말했다. '백제의 시조는
온조(溫祚)요, 그의 아버지는 추모왕(雛牟王)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하니, 그는 북부여(北扶餘)에서 난리를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왔었다. 그곳 왕에게 아들이 없고 다만 딸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자 범상치 않은 사람인 것을 알고 둘째딸을 아내로 주었다.
얼마 안 되어 부여주(扶餘州)의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沸流)이고
다음은 온조(溫祚)다. 그들은 후에 태자(太子)에게 용납되지 않을 것을 걱정하여 드디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여 명
신하들과 함께 남쪽으로 가니 백성들도 이를 따르는 자가 많았다.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서 살 만한 곳이 있는가
찾아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가서 살자고 하자 열 명의 신하들은 간하기를 "이 하남(河南)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가 흐르며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했고, 남쪽으로 기름진 못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가로놓여 있어서 천험(天險)과 지리(地利)가 좀체로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했다. 그러나 비류는 이 말을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雛忽)에 가서 살았다. 한편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하여 열 명의 신하를 보필(輔弼)로 삼아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했으니, 이 때는 한(漢)나라 성제(成帝) 홍가(鴻佳(嘉)) 3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이란 곳이 습기가 많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가 없었다. 위례성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은 편안히 살고 있으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해서
죽었다. 이에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그 뒤에, 백성들이 올 때에 기뻐했다고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고쳤다. 그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씨(氏)를 해(解)라고 했다. 그 뒤
성왕(聖王) 때에 도읍을 사비(泗차)로 옮겼으니 이것이 지금의 부여군이다[미추홀彌雛忽은 인주仁州이고 위례慰禮는 지금의
직산稷山이다].
≪고전기(古典記)≫에 의하면 이러하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아들 온조(溫祚)는
전한(前漢) 홍가(鴻佳) 3년 계유(癸酉)(묘卯[前 18])에 졸본부여에서 위례성(慰禮城)으로 와서 도읍을 정하고 왕이라 일컬었다.
14년 병진(丙辰)에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겨 389년을 지냈으며, 13세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인 함안(咸安) 원년(元年[
371])에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빼앗아 도읍을 북한성(北漢城[지금의 양주楊洲])으로 옮겨 105년을 지냈다. 22세
문주왕(文周王)이 즉위하던 원휘(元徽) 3년 을묘(乙卯[475])에는 도읍을 웅천(熊川[지금의 공주公州])으로 옮겨 63년을 지내고, 26세
성왕(聖王) 대에 도읍을 소부리(所夫里)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하여 31세 의자왕(義慈王)에 이르기까지 120년을
지냈다.
당(唐)나라 현경(顯慶) 5년(660)은 의자왕이 왕위에 있던 20년으로 신라
김유신(金庾信)이 소정방(蘇定方)과 백제를 쳐서 평정하던 해이다. 백제에는 본래 다섯 부(部)가 있어
37군(郡)·200성(城)·76만호(戶)로 나뉘었었다. 그런데 당에서는 그 땅에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蓮)·덕안(德安) 등 다섯 도독부(都督府)를 두고, 그 추장(酋長)들로 도독부(都督府),
자사(刺史)를 삼았는데 얼마 안 되어 신라가 그 땅을 모두 병합했다. 그리고 거기에 웅주(熊州)·전주(全州)·무주(武州) 등 세
주(州)와 여러 군현(郡縣)을 두었다.
또 호암사(虎암寺)에는 정사암(政事암)이란 바위가 있는데, 나라에서 장차 재상(宰相)감을
의논할 때에 뽑힐 사람 3, 4명의 이름을 써서 상자에 넣고 봉해서 바위 위에 두었다가 얼마 후에 열어 보아 이름 위에 도장이 찍힌 자리가 있는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있다.
또 사자하(泗차河) 가에는 바위 하나가 있는데 소정방이 일찍이 그 바위 위에 앉아서
물고기와 용을 낚았다 하여 바위 위에는 용이 꿇어앉았던 자취가 있으므로 그 바위를 용암(龍巖)이라고 한다.
또 고을 안에는 산이 세 개가 있어서 그곳을 일산(日山)·오산(吳山)·부산(浮山)이라고
하는데 백제가 전성(全盛)하던 때에 신(神)들이 그 산 위에 살면서 서로 날아 왕래하기를 조석으로 끊이지 않았다.
사비수(泗泚水) 언덕에는 또 돌 하나가 있는데 10여 명이 앉을 만하다. 백제
왕이 왕흥사(王興寺)에 가서 부처에게 예(禮)를 드리려 할 때면 먼저 그 돌에서 부처를 바라보고 절을 하면 그 돌이 저절로 따뜻해졌다 해서 그
돌을 환석(煥石)이라고 한다.
또 사자하(泗차河)의 양쪽 언덕은 마치 그림 병풍과 같아서 백제 왕이 매양 그곳에서 잔치를
열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즐겼다. 그런 때문에 지금도 이곳을 대왕포(大王浦)라고 일컫는다.
또 시조(始祖) 온조왕은 동명왕(東明王)의 셋째아들로서 몸이 장대하고 효도와 우애가
지극하고, 말 타기와 활 쏘기를 잘했다. 또 다루왕(多婁王)은 너그럽고 관후했으며 위엄과 인망이 있었다. 또
사비왕(沙沸王[혹은 사이왕沙伊王])은 구수왕(仇首王)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했으나 나이가 어려서 정사를 보살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즉시 이를
폐하고 고이왕(古爾王)을 세웠다. 혹은 말하기를, 낙초(樂初) 2년 기미(己未)에 사비왕(沙沸王)이 죽고 고이왕이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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