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와서 뵙기를 청했으나 왕은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았다. 아찬이 다시 청하여 한 번 뵙기를 원하므로 왕이
이를 허락하니 아찬이 물었다. "공께서 꺼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왕이 꿈을 점쳤던 일을 자세히 말하니 아찬이 일어나서
절하고 말한다. "이는 좋은 꿈입니다. 공이 만일 왕위에 올라서도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공을 위해서 꿈을 풀어
보겠습니다." 왕이 이에 좌우 사람들을 물리고 아찬에게 해몽(解夢)하기를 청하니 아찬은 말한다. "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앉는 이가 없다는 것이요,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요, 열두 줄 가야금을 든 것은 12대손(代孫)이 왕위를 이어받을 징조요,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에 들어갈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이 말한다. "위에 주원(周元)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상위(上位)에 있을 수가 있단 말이오?" 아찬이 "비밀히 북천신(北川神)에게 제사지내면 좋을 것입니다"하니 이에
따랐다.
얼마 안 되어 선덕왕(宣德王)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은 김주원(金周元)을 왕으로 삼아
장차 궁으로 맞아들이려 했다. 그의 집이 북천(北川) 북쪽에 있었는데 갑자기 냇물이 불어서 건널 수가 없었다. 이에 왕이
먼저 궁에 들어가 왕위에 오르자 대신(大臣)들이 모두 와서 따라 새 임금에게 축하를 드리니 이가 원성대왕(元聖大王)이다.
왕의 이름은 경신(敬信)이요 성(姓)은 김씨(金氏)이니 대개 길몽(吉夢)이 맞은 것이었다.
주원은 명주(溟洲)에 물러가 살았다. 경신이 왕위에 올랐으나 이 때 여산(餘山)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의 자손들을 불러
벼슬을 주었다. 왕에게는 손자가 다섯 있었으니,
혜충태자(惠忠太子)·헌평태자(憲平太子)·예영잡간(禮英잡干)·대룡부인(大龍夫人)·소룡부인(小龍夫人) 등이다.
대왕(大王)은 실로 인생의 곤궁하고 영화로운 이치를 알았으므로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
노래는 없어져서 자세치 못하다])를 지을 수가 있었다. 왕의 아버지 대각간(大角干) 효양(孝讓)이 조종(祖宗)의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왕에게 전했다. 왕은 이것을 얻게 되었으므로 하늘의 은혜를 두텁게 입고 그 덕이 멀리까지 빛났던 것이다.
정원(貞元) 2년 병인(丙寅[786]) 10월 11일에 일본왕 문경(文慶[
≪일본제기日本帝紀≫를 보면 제55대 왕 문덕文德이라고 했는데 아마 이인 듯하다. 그 밖에 문경文慶은 없다. 어떤
책에는 이 왕王의 태자太子라고 했다])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다가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물리고 금(金) 50냥을
사자(使者)에게 주어 보내서 피리를 달라고 청하므로 왕이 사자에게 일렀다. "나는 들으니 상대(上代) 진평왕(眞平王) 때에 그 피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듬해 7월 7일에 다시 사자를 보내어 금 1,000냥을 가지고 와서 청하며
말하기를 "내가 그 신비로운 물건을 보기만 하고 그대로 돌려보내겠습니다"하였다. 왕은 먼저와 같은 대답으로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은(銀) 3,000냥을 그 사자에게 주고, 보내 온 금은 돌려주고 받지 않았다. 8월에 사자가 돌아가자 그 피리를
내황전(內黃殿)에 간수해 두었다.
왕이 즉위한 지 11년 을해(乙亥[795])에 당(唐)나라 사자가 서울에 와서 한 달을
머물러 있다가 돌아갔는데, 하루 뒤에 두 여자가 내정(內廷)에 나와서 아뢴다. "저희들은 동지(東池)·청지(靑池[청지靑池는 곧
동천사東泉寺의 샘이다. 절에 있는 기록을 보면 이 샘은 동해東海의 용龍이 왕래하면서 불법佛法을 듣던 곳이요 절은 진평왕眞平王이 지은
것으로서 오백五百 성중聖衆과 오층탑五層塔과 전민田民까지 함께 헌납했다고 했다])에 있는 두 용(龍)의 아내입니다. 그런데 당나라 사자가
하서국(河西國)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 남편인 두 용(龍)과 분황사(芬皇寺) 우물에 있는 용까지 모두 세 용의 모습을 바꾸어 작은 고기로
변하게 해서 통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그 두 사람에게 명령하여 우리 남편들인 나라를 지키는 용을
여기에 머무르게 해 주십시오." 왕은 하양관(河陽館)까지 쫓아가서 친히 연회를 열고 하서국 사람들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어찌해서 우리 나라의 세 용을 잡아 여기까지 왔느냐. 만일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반드시 사형(死刑)에 처할 것이다."
그제야 하서국 사람들이 고기 세 마리를 내어 바치므로 세 곳에 놓아 주자, 각각 물 속에서 한 길이나 뛰고 기뻐하면서 가 버렸다.
이에 당나라 사람들은 왕의 명철(明哲)함에 감복했다.
어느날 왕이 황룡사(皇龍寺[어떤 책에는 화엄사華嚴寺라 했고, 또 금강사金剛寺라고도 했으니
이것은 아마 절 이름과 불경佛經 이름을 혼동한 것인 듯싶다])의 중 지해(智海)를 대궐 안으로 청하여 화엄경(華嚴經)을 50일 동안 외게 했다.
사미(沙彌) 묘정(妙正)이 매양 김광정(金光井[대현법사大賢法師가 이 이름을 지었다]) 가에서 바리때를 씻는데 자라 한 마리가 우물
속에서 떴다가는 다시 가라앉곤 하므로 사미는 늘 먹다 남은 밥을 자라에게 주면서 희롱했다. 법석(法席)이 끝나려 할 무렵 사미 묘정은
자라에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은덕을 베푼 지가 오랜데 너는 무엇으로 갚으려느냐?" 그런 지 며칠 후에 자라는 조그만
구슬 한 개를 입에서 토하더니 묘정에게 주려는 것같이 하므로 묘정은 그 구슬을 얻어 허리띠 끝에 달았다. 그 후로부터 대왕(大王)은
묘정을 보면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 내전(內殿)에 맞아들여 좌우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이 때 잡간(잡干) 한 사람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도 묘정을 사랑해서 같이 가기를 청하자 왕은 이를 허락했다. 이들이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니 당나라의
황제(皇帝)도 역시 묘정을 보자 매우 사랑하게 되고 승상(丞相)과 좌우 신하들도 모두 그를 존경하고 신뢰했다. 관상보는 사람 하나가
황제에게 아뢰었다. "사미를 살펴보니 하나도 길(吉)한 상(相)이 없는데 남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으니 틀림없이 이상한 물건을 가졌을
것입니다." 황제가 사람을 시켜서 몸을 뒤져 보니 허리띠 끝에 조그만 구슬이 매달려 있다. 황제는 말한다.
"나에게 여의주(如意珠) 네 개가 있던 것을 지난 해에 한 개를 잃었는데 이제 이 구슬을 보니 내가 잃은 그 구슬이다."
황제가 묘정에게 그 구슬을 가진 연유를 물으니 묘정은 그 사실을 자세히 말했다. 황제가 생각하니 구슬을 잃었던 날짜가
묘정이 구슬을 얻은 날과 똑같다. 황제가 그 구슬을 빼앗아 두고 묘정을 돌려보냈더니 그 뒤로는 아무도 묘정을 사랑하지도 않고
신뢰하지도 않았다.
왕의 능(陵)은 토함산(吐含山) 서쪽 동곡사(洞鵠寺[지금의 崇德寺])에 있는데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문이 있다. 왕은 또 보은사(報恩寺)와 망덕루(望德樓)를 세웠고, 조부(祖父) 훈입잡간(訓入잡干)을
추봉(追封)하여 흥평대왕(興平大王)이라 하고, 증조(曾祖) 의관잡간(議官잡干)을 신영대왕(神英大王)이라 하고, 고조(高祖)
법선대아간(法宣大阿干)을 현성대왕(玄聖大王)이라 했다. 현성대왕의 아버지는 곧 마질차잡간(摩叱次잡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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